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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현실논단

[현실논단] 기억은 슬픔과 기쁨만을 말하지 않는다

자유의새노래 2020. 6. 18. 23:13

입력 : 2020. 06. 18 | A34

 

2015년 일본대사관 앞에서

 

사학자 임지현은 자신의 저술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주도한다. 2007년 어느 날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이상한 현상들 때문이다. 한반도 북부 나남 지역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담은 일본인 거주민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문제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관점에서 일본인 거주민이 겪었던 고통을 당시의 11살 소녀였던 작가가 술회한 내용이다.


일본이 침략해 강점했던 시대를 마주하면,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헤매곤 한다. 문자로 전시된 당시 조선인이 겪었던 아픔을 되짚어 보노라면 일본제국이 조선과 동아시아에 끼친 행각 앞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앞에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가 그렇다. 생각보다 협소한 의미의 강제연행보다 ‘유괴나 다름없는’ 인신매매와 사기로 동원된 ‘광의의 강제동원’의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시동원체제의 민낯을 가늠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학자 임지현은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발견한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를 통해 기억의 조각들에 주목한다. 요코 이야기에 내재한 단순화 된 내러티브와 탈역사화도 문제지만, 미국과 유럽 중심의 문화와 교육 체계 대신, 비판의 초점이 과거 청산의 문제로 옮겨지면서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대립하는 현실이 전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위안부 기억가들의 완전하지 않은 기억의 한계를 이용해 거짓으로 매도하거나, 희생자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논변으로 쓰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기억을 단지 슬픔과 기쁨. 두 감정만이 존재하듯 이해하게 만든다.

 

 

日帝强占期 바라보는
다층적 기억들 속에
戰後 세대의 갈등을
보며 할 말을 잃는다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강남에 세우신 하느님의 자존심’이란 이름으로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대형교회 전도사의 글을 읽으며 앙천대소하고 말았는데. 문자 그대로 방역 일선에서 갈려나가는 의료진 앞에서 공무원들 밥 먹여주고 방역을 한들, 그게 어떻게 하느님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인가. 차라리 대형교회니 교인들 모이지 않게끔 하는 게 더 도와주는 일이잖은가 생각했다. 그런 기독교인이 또 있었다. 교회 창립 20주년 기념 영상으로 올라온 동영상엔 이미 4년 전에 교회를 나온 내 얼굴이 네 장에 걸쳐 사진으로 나오면서 교회 부흥과 성장에 재목(材木)으로 비유됐다.


두 사람 모두 한국 기독교인의 힘없는 사투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한 때 샐러리맨으로 생계를 영위했던 가부장적 남성이란 점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지만. 급여생활을 박차고 마치 대단한 사람이 낮은 자리에 임했다는 착각과 힘겨운 생활 속에서 교회 부흥을 일궈내기 위한 재목이 되었다는 구원 서사도 놀랄 만치 동일했다. 그러니 이들 눈에는 노동착취에 힘겨워 교회를 빠져 나온 가나안 신자들이 교회에서 도태되고, 신앙을 포기한 이들로 비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자신만의 해방사관에 가로 막혀 현실보다 신앙이란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바라보며 교회만이 방법이자 예수만이 대안이란 해괴한 프로파간다 속에서 강남에 세워진 하느님의 자존심 때문에 갈려 가는 의료진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보였더라면 그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4차위안단 기록 앞에서 징용과 징병, 정신대 같은 전시동원(41)이란 구조적 문제를 주목하다보면. 반생명적인 협의의 강제동원이 일상적이지 않았다 해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해도. 당시 일본제국이 정책으로 공창을 주도했고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과 가난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힘없는 여성들이 미끼처럼 가족의 부채를 변제하고 많은 수입과 고되지 않은 노동이란 신생활에 대한 전망으로 조선을 떠나야 했다는 구조적 국가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입에 담기 힘든 모욕 언사와 위안부 기억가들 증언을 하나의 소녀상 이미지로 보여준 이들, 그들을 조롱하는 보수언론, 여전히 성매매로 힘겨워하는 여성에게 기어이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오늘의 가부장적 인식을 보면서. 머리에만 맴도는 기억의 다층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히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