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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현실논단

[현실논단] 기억담론과 시간 정책

입력 : 2020. 01. 22 | 수정 : 2020. 02. 05 | A6

 

 

전체주의 시대가 끝이 났다. 드디어 종결된 전체주의 시대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간 정책을 구사한다. ‘신(神)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談論)’도 그렇다. 신 죽음의 시대에 구가하던 전체주의 담론의 끝을 선언하고  새로운 담론으로 새 시대를 맞이하자는 의미였다.

전체주의 시대 시간 정책은 해방을 기저에 둔 담론이었다. 해방을 위한 자유, 해방을 위한 신앙, 자유 투쟁도 이러한 연장선에 등장한다. 전체주의 시대의 자유란 해방 그 자체였고, 신자유주의 시간 정책과는 무관한 신 죽음의 시대 이전의 담론이었다. 전체주의 망령(亡靈)에서 벗어나려던 신 죽음의 시대는 어떤가. 비로소 해방을 위한 자유와 신앙, 자유 투쟁이란 현실을 깨닫고 해방 너머의 자유를 등장시켰다. 그 자유란 자기가 자기 자신일 수 있어야 할 자유. 신과의 교감을 전혀 의지 하지 않은 채 스스로가 행위 가능한 주체성을 의미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깨달으며 반성하는 끝없는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가치를 돌이키고 찾아가는 주체성이다. 그럼에도 완전한 주체성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주체성을 가지고 과거를 보기 때문이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신 죽음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신 죽음의 시대 이전에 등장한 주체성은 신 죽음의 시대 연장선에 등장한 내러티브 인식과 함께 했다. 제2의 유일신은 아이돌이란 새 가면을 쓰고 제2의 오순절로 등장했다. 주체성을 언급하나 끌려 다니고, 존재를 물으나 자신의 존재는 사라진다. 시간 정책은 자기 착취적인 제2의 유일신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내 찾아온 소진증후군과 우울증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고 말았다.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사세를 탈출하자 다시금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구호로 등장한 자유와 해방은 신 죽음의 시대 이전에 등장한 구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현재라는 관점에서 아이돌은, 비로소 현재를 볼 수 있는 창이 되었으나 오순절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웠다. 다시금 과거로 돌아갔다는 비판이 이 지점에서 등장했다.


전체주의 종결 그 以後
時間 정책 여전히 과거
내러티브 神으로 부상
記憶을 넘을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담론의 화두로 등장한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어느 때보다 ‘주체성’에 집중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을 깨닫고 찾아가며, 찾아가리라는 믿음과 함께 ‘열심히’와 ‘최선을’ 다한 삶에 방점을 둔다. 하지만 공허한 ‘열심히’와 ‘최선을’ 사이에 낀 주체성은 앞으로도 세워지지 않을 테고, 존재론은 언제든 제3의 유일신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줄 용의를 보이는 듯하다. 주체성을 가지고 과거를 기억하는 순간, 제3의 유일신은 완성되고 만다. 타자성이 배제 되었다며 주체성이 소외되던 현상은 전체주의 시대를 통틀어 언제나 존재했다. 유일신에 기대지 않는 주체성이 존재하기는 할까? 성숙에 덧댄 내러티브는 다시금 신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기억을 한데 모아 긍정도 부정도 의미하지 않을 기억 그 자체에 집중한 나머지 점과 점들이 모여 내러티브를 형성한다는 유혹 속에 내러티브를 제3의 유일신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이전의 시간 정책은 언제든 과거를 지향하고 있었다. 성숙 내러티브는 현재와 미래로 향할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익함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만들어진 존재, 만들어질 내러티브에 부푼 희망으로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작금의 부정성은 부정하기 힘들다. 소외감을 견디지 못해 다시금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로 향할 때면 과거는 재소환 된다. 그렇다면 단지 과거의 나열만이 과거의 아픔을 해소하는 방법일까? 과거의 인식을 기억이란 내러티브로 소환해야 할까? 과거의 인식을 기억이란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만이 현재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까? 과거를 과거대로 내버려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과거의 기억들을 소유한 이들과의 연대, 대화가 진정한 대화이자 미래를 향할 교두보일까?

비로소 전체주의 망령에서 벗어나 등장한 자아와 타자, 그리고 세계라는 성질을 바라보며 시간 정책은 여전히 과거를 지시하고 있다. 주체성은 오로지 현재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지는 않는다. 주체성을 가진다 한들, 과거를 바꿀 순 없기 때문이다. 기억이 가져다 줄 내러티브라는 유혹이 제3의 오순절이자 새로운 신으로 등장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에 의존한 시간 정책을 직시하고 재고해야 한다.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야 말로 현재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교훈을 선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