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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현실논단

[현실논단] 아아, 순진한. 이 순진함이여

자유의새노래 2021. 2. 5. 23:10

입력 : 2021. 02. 05  23:10 | A30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마주해 보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거대한 벽처럼 서 있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고, 가닿기 바래도 닿을 수 없는 현실 벽이 불가능과 무기력 사이에 냉소로 버티고 서 있었다. 비판과 대안이 방법으로 등장한 시대에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할 수 있다’는 말이 농락의 단어로 전락했다. 당장에야 내세워 개인 문제로 환원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그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도리가 없다. 그 지점에서 슬픔이 밀려왔다.

 

모든 것을 놔 버리고 싶었던 냉소와 슬픔은 잠시간 탈 이집트 하려던 순간으로 데려갔다. 서운함과 분노의 중간에 서 있던 야훼의 호통이 생생하던 그 장면. 누구라도 같은 환경에 처해 있다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라던 옛날의 교훈이 떠오르지 않았다. 슬픈 감정으로 도착해 저 신 야훼를 오해하며 발생한 서운함을 시작으로 산책했다. 과거라는 장소에서 벗어나 돌아갈 수 없는 현재의 강을 건너, 미래로 향하고 있을 그들 앞에 놓인 불안의 벽을 보았다.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고 습득하지 않았을 탈출자들에게 분노하던 야훼의 서운함에서 엇갈린 분위기가 보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탈출 21,10)’던 이상한 불일치가 냉소를 거둘 근거로 보인 것이다. 다혈질로 알려진 모세의 깨어진 두 돌판 앞에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슬픔을 보았고 두 번째로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마주했다.

 

 

침묵의 공간서 들리는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냉담한 현실 세계의 앞
모든 대안을 폐기한다

 

 

이 슬픔은 오랜 옛날부터 마음 어딘가에 숨은 존재였다. 외면하고 싶어도 만나야 하는, 만날 수밖에 없는, 친구도 아니고 악당도 아닌…. 그 존재는 항상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지켜볼 때 나타난다. 악마가 나타나 저주를 속삭일 때, 천사처럼 다가와 악마의 생각을 밀어주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게 만들어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붙인다. 그 존재와 마주할 때마다 감정의 변동을 느끼고 인식의 전환을 맞이한다. 그 존재가 탈 이집트 하려던 순간으로 데려간 것이다. 코로나 이전까지도 일상에서 마주하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건들 앞에서 유일한 대답은 정신승리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으니 그 존재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주장 말이다. 가난이란 건 없으니 가난하다고 느끼지 말 것. 음란이란 없으니 성욕을 느끼지 말 것. 죽음은 없으니 즐거운 상상만 할 것. 초연함 속에서 만들어진 신을 갈구할 것. 그러니 만나와 메추라기 꾸역꾸역 먹으며 겨우 살아가던 백성들 사이에서 움츠리던 소녀에게 다다르자 똑같은 말을 내뱉으려 했다. 당혹감에 직면한 순간 소녀의 눈망울엔 슬픔이 고여 있었다.

 

공허를 참기 힘든 시대에 노동의 부품으로 전락한 사람에게 공부하라 계몽하라 발길질을 해댈 수는 없었다. 나약하기 때문에 당할 만하다는 말도 견디기 어렵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강한 자의 주먹을 잡아야 할 당연함도 언더도그마와 함께 타버려 사라진다. 가녀린 소녀마저 뜨거운 사막을 견뎌내 보라고 내던져진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이 잡아지지 않아서 한탄에 빠진 노인의 멱살을 잡으며 제발 변해가는 사회를 읽으라고 윽박지르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건들을 만드는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거대한 짐을 개인에게 분산해서 가볍게 나눠지려는 순진함이 잘못 돌아가는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법을 고치고, 없는 법을 만들고, 규정들이 존재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해답을 미루고 끊임없이 자기 계발에 몰두하니. 타인의 눈망울을 볼 시간도, 소리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려오지도 않는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나는 내 앞의 소녀조차 도와주지 못하는 아둔한 인간일 뿐인데. 무슨 힘이 되어준다고 까불었던가. 냉소가 사라지고 슬픔이 밀려왔다. 부끄러움이 불어온다. 관념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물었다. 모든 대안이 대안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일? 누구의 편으로 인용해온 이념을 폐기하는 일? 아니었다. 꿈처럼 사라진 소녀의 눈물에서 흐르는 소리를 듣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망의 늪에서 울던 백성들을 기억하여 성벽 바깥에 서 있던 야훼처럼 냉소의 노이즈로 묻혀버려 평범한 슬픔이 되어버린, 눈물이 흐르는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