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 09. 12 | A29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의혹을 보며 분명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말조차 기록으로 박제되는 시대 말이다. 조 장관이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는 큰 이유 중 하나도 그가 말과 행동이 달랐다는 점이다.
우리는 박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말하든 커뮤니티 댓글에서 카카오톡 채팅창, 심지어 발화한 말조차 녹음으로 디지털화된다. 논쟁하다 댓글을 수정하면 곤란해진다. 그새 캡처해 “왜 말을 바꾸냐”고 따지기 때문이다. 글 삭제도 불가능하다. 아카이브 사이트에 주소 채 박제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카이빙이 무서운 이유다.
약학을 전공하겠다고 말한 그가 신학을 끝까지 밀고 간 행동도 마찬가지다. 그는 분명히 약학으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그가 한 부분 발언은 일과속기록(日課速記錄)의 후신 감회록(感懷錄)에 남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말을 바꿀 것이기 때문에 남겨놓은 발언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바꾸니 뒤늦게 드러난 사실이다.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보다 정의로운 말을 하는 건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다. 정의롭지 않게 살아온 이유도 변명으로 일관하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주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순결을 강조한 이재록 목사도, 청빈을 가르친 김기동 목사도. 자신이 한 말과 다른 삶을 살아 비판받는 현재. 모두 박제의 시대, 인터넷이란 공간 안에 벌어졌다.
그래서 신앙인으로 귀화(歸化)한 삶을 향해 축복의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이 발목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의 유학 자금으로 변명해도 소용없다. 먹고 살기 위해 신(神) 버려도 된단 말이며 아버지 힘으로 유학 간단 말을 증명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강조한 나머지 인류의 구체화 된 그리스도를 기린다 한들 말과 달리 행동에서 차별과 저주를 본다면 그는 은총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서는 보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1요한 4,20).
더구나 윤리와 떨어질 수 없는 신학 전공자로 살아가는 존재라면 더욱 자신이 한 말이 발목을 잡곤한다. 얼마 전까지 청어람ARMC 전 대표이자 이사였던 양희송 씨의 행동이 그가 발화한 말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청빈과 경건은 우리 사회를 기만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일반 사회와 교회라는 두 도성 이론으로 사회를 바라보면 곤란하다. 기독교인과 시민은 다르지 않은 동질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가 우월하단 증거도 경제 성장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외면 받기 시작했다. 윤리적 삶도, 하느님 나라 담론도 그렇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말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에 선조들은 혀를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때론 진실함을 강조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마음의 진실함을 요구하는 이유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자아비판 고백에 익숙한 것일까?
'오피니언 > 일과속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과속기록] “하늘도 끝 갈 날이 있다” (0) | 2020.10.22 |
---|---|
[일과속기록] 조선일보 100주년 (0) | 2020.03.05 |
[일과속기록] 그늘진 당신의 얼굴 (0) | 2020.02.22 |
[일과속기록] 유화, 너의 침묵 (0) | 2019.03.09 |
[일과속기록] “서른즈음에” (0) | 2019.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