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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일과속기록

[일과속기록] 그늘진 당신의 얼굴

입력 : 2019. 09. 20 | 수정 : 2020. 02. 22 | A35


오늘은 용기를 가지고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나면 어떤 말로 인사하며 뒤의 공백을 메울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헤어진 지 보름이 되었다. 순간이었다. 분노란 감정도 불꽃 튀는 랑데부도 예상치 못한 한 순간에 이뤄지듯, 헤어짐도 순간에 벌어졌다. 갑작스레 터져버린 순간에 수습조차 못하고서 보름이란 시간을 지내야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뚝 끊긴 발걸음이 이젠 허공에 떠돌아 귓가를 맴돈다. 오늘도 초인종에 반갑게 인사할 그 녀석이 언제쯤 찾아올까 아니, 이제 오지는 않을까. 상상만 했다. 어느새 한 편이 되어준 만남이 하루아침 사라져 버리니. 당혹감? 허망함? 자책도 해봤다. 물조차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란 교훈만 안은 채.


생각하면 바보 같았다. 붙잡아서 오해라고 괜찮다며 모든 걸 이해한다 말했어야 했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화낼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는 거라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한 마디면 되지 않을까. 거꾸로 생각해보면 고작 그런 걸로 뛰쳐나갔을까 싶었다. 그래, 실수.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 말했듯 그건 실수였다. 내가 원한다고 일어나지 않을 일도 아니었다. 진심이 아니었듯.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라도 서운할지 모르겠다. 강직해 보여도 속은 야들야들하지 않던가. 실수는 개뿔. 내가 책임지고 사과해야 했다. 미안하다고. 이것도 진심이다.

 


생각에 머물던 마음도 어느새 놀이터로 향해 있었다. 놀이터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다. 아이들로 붐빈 출입구엔 담쟁이로 뒤덮인 쉼터가 있다. 그늘 진 곳에 앉아 지나가길 기다렸다. 매일 이곳 놀이터를 방문해줬으니 오늘도 올 것임을 굳게 믿으며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그 아이가 지나간다. 인라인 스케이트 타고서 빠르게 지나가는 저 아이는 나를 보았을까. 그 사건이 지나고 보름의 공백이 거대한 벽으로 등장했다.


드드드 거리던 소리는 103동에서 102동을 지나려던 참이라고 알려주자 한 바퀴만 돌면 인사할지 말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화해는 쉬운 줄 알았다. 아니, 인사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맞은편 벤치엔 그 아이가 즐겨하던 게임CD 하나 놓여 있었다. 놀다가 두고 간 모양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시 건설 CD엔 치트키를 의미하는 노란 포스트잇 한 장뿐이었다. 103동 한 바퀴 돌고 담쟁이 쉼터가 있던 이 곳으로 내려올 참인 것 같다. 그 아이가 내려온다. 이번엔 분명히 나를 보았을 것이다. 재킷 하나 걸친 것 없이 CD만 바라보던 모습을.


어쩌다 벌어진 사건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무거운 책임을 지웠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돌이키지 못할 분명한 사건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함을 지녔을 뿐. 정신없이 한 바퀴, 두 바퀴를 돌던 세 바퀴 어간에 놀이터로 향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자 공백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머쓱히 웃었다. 그 아이는 새로운 놀이를 찾은 모양이다. 빙그레 웃으며 103동 감싸 돌던 밝은 얼굴이 무언의 말마디를 건넸다. CD를 자리에 두고서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그 동안 고마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