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마음 박물관②] 감정필름관, 추억을 인화해드립니다

2025년 01월 20일

“공간은 시간을 간직한다던 네 말, 진짜더라. 네가 없는 집에 앉아 있으면 늘 하던 대로 소파 한쪽에 기대곤 해. 네가 평소에 앉던 자리를 바라보면, 괜히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자주 가던 카페에서는 우리가 늘 앉던 창가 자리가 눈에 들어오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 공간들에 우리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둘 걸 그랬나 봐. 갈 때마다 네 흔적이 희미해질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단 말이야.”

창문에 내려앉은 입김이 사라지기 전, 서둘러 너의 이름을 새긴다. 하지만 석 자를 다 쓰기도 전에, 넌 허공으로 증발해버렸다. 지워진 이름을 손으로 문지르는 것만큼이나 덧없이, 주머니 속에서 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냈다. 사진 한 장. 그것이 모든 걸 시작했다.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들은 사실, 마르지 않는 바다였다. 언제든 파도가 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기억들. 처음엔 발끝만 스쳤던 물이, 어느새 가슴까지 차올랐다. 파도는 점점 거세져 귓가에 닿았고, 그 순간 네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완전히 지배해버렸다.

“도연아, 그 전설 들어봤어? 우리 엄마가 나 어릴 적에 들려줬던 건데, 월식이 뜨면 이 근방에 감정필름관이 나타난대. 그런데 아무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라더라. 떠난 사람이 너무 그리운 사람한테만 보인대. 나중에 월식 뜨면 이 골목길같이 걷자. 혹시 모르잖아? 전설의 감정필름관을 보게 될지도.”

어설프게도 너의 바람은 네가 바람이 됨과 동시에 산산조각 나버렸고, 남은 건 그 약속을 기억하는 나뿐이다. 그럼에도 혼자서라도 그 약속을 지키고픈 마음은 왜일까? 발걸음은 어느새 네가 말한 골목길로 향했다. 그 길 끝에, 너의 온기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길 기대하는 강아지처럼.

지도는 없었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파고들고,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에 갇힌 듯, 길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달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출 뿐이었다. 그 빛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둠을 밝히는 저 빛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끈질기게 걸었다.

“으아, 이게 뭐야?”

얼마나 걸었을까. 길을 밝혀오던 달빛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눈동자를 강렬히 휘감았다. 무대 조명이 망가져 이상한 곳을 비추는 것처럼. 잠시 후, 눈을 감싼 붉은빛이 서서히 거둬졌고, 눈앞에 작은 주택이 나타났다.

“감정 필름관….”

간판 아래로 유리구슬들이 오묘한 빛을 반사했다. 꽃잎처럼 나풀대는 옷깃을 지그시 잡았다. 그러곤 그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다가갔다.

“우와…  신기하다.”

가까이서 보니 구슬들은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저마다의 자아를 가진 것처럼. 손을 뻗어 구슬 위에 가만히 얹었다.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네.”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리자!” 분명 구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귀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뇌에서 구슬들의 말소리가 퍼졌다. ‘텔레파시 같은 건가…?’ 다시 구슬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또다시 말소리가 뇌리에 퍼졌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 봐!”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면 그냥 납득하게 된다고 하던가. 얼빠져서 한참 구슬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두터운 음성이 들렸다.

“거기 손님인가?”

고개를 돌리자 흰머리가 빼곡한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가 소문으로 듣던 감정필름관인가요?”

“맞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직접 보니 어때? 신기하지? 그나저나 날씨도 추운데 얼른 들어가자.”

안은 화려한 외부와 달리, 부드럽고 포근한 분위기였다.

“순간이 담긴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아요.”

이상하다. 할아버지와 초면인데도, 봄바람 끝자락에 머문 친근함이 느껴졌다. 비유하자면 할아버지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굳은 생각들을 망치로 노크하는 것 같았다. 미약한 떨림에도 굳은 생각들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 단 한 번의 노크라도 해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애써 그 부스럼을 담으려 다시 애썼다. 그러나 그 부단한 노력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눈물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은 눈물로 흐려져 있었고, 할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이고 계셨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처럼. 그분은 조용히 내게 유리병을 건네곤, 이곳에 흐르는 눈물들을 담으라는 손짓을 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건네받은 유리병을 몇 번 흔드시더니, 내 손에 든 사진을 가져가시곤 그 위에 눈물을 부었다. 그러자 눈앞이 뿌옇게 변하더니….

사라지는 너의 흔적
남은 건 ‘사진 한 장’

그립고 보고싶어서
마르지 않는 바다 외길
헤매고 헤매다 나타난
전설 속의 감정필름관

믿고 또 믿는 심정으로
부서지는 굳은 기억들
담으려 해도 흩어지고
사진 위에 눈물을 붓자
되살아난 그 때의 진우

그렇게 만난 넌, 나에게
“사람은 말야 사랑받은
흔적에 기대어 사나봐
심장 속이 100이라면
그곳의 80은 너였어”

“도연아, 뭐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야.”

사진 속 추억에 들어왔단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동시에 그에게 말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은 사랑받은 흔적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나 봐. 내 심장에 100이라는 공간이 있다면 실은 그곳의 80이 너로 채워져 있었던 거야. 넘칠 만큼 과분해서 존재마저 잊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그 공간에 먼지가 쌓였을 때 깨달았어. 고마워. 내게 사랑을 가르쳐 줘서.”

그는 활짝 웃었다. 언뜻 보면, 그의 입가에 붉은 장미가 핀 것처럼.

“사랑은 잊히지 않을 붉은 꽃잎을 연주할 것이고, 때론 가시에 찔려 아파도 결국엔 모든 걸 견딜 거야. 잊지 않을게 진우야. 내 가슴에 첫 장미를 피워주었던 널.”

그게 우리의 마지막 인사였다. 다시 눈앞이 흐려졌고, 눈앞엔 처량한 사진만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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