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까지 키스를 못하면 헐크로 변해버린다고?:『지구를 안아줘』

2024년 10월 09일

지구를 안아줘
김혜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76쪽 | 1만3000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소설집.

표지에서 눈치를 챘듯 무척 재미있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인간이면 누구든지 경험할 입시, 꿈, 인간관계, 갑자기 재난이 일어나는 상상 등 흥미로운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너무 가볍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다. 적당히 가벼우면서 무겁지도 않다. 애써 교훈을 담으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유쾌한 풍자에 어처구니없는 웃음도 났고, 씁쓸한 뒷맛도 진해졌다.

특히 키스 바이러스에 감염되고만 학생들이 작가 이상의 날개를 읽으며 헐크로 변해가는 장면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웃음 뒤 기억에 남은 내용은 없었다.

다음은 두 개의 에피소드를 정리한 내용.

#키스 바이러스: 윤아

‘키스 바이러스’를 피하려 입 맞춰야만 하는 윤아가 한숨을 쉰다.(11쪽1문단) 키스하지 않은 채로 만 17세를 넘기면 이상반응이 발생한다는데 절친 지희는 벌써 거쳐 간 남자애만 서너 명이란다. 믿었던 민서마저. 부러움의 한숨 또 한 번 내쉬고 마는데.

이상반응은 끔찍하기만 하다. 헐크로 돌변해 성인 남성들이 붙잡아도 잡히지 않을 괴력을 내보인다고 한다. 비가 내릴 때만 바깥으로 뛰어나가 그 지랄을 한다는데. 윤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키스 한번 하고 말지 헐크가 되고픈 생각을 집어 치운다. 문제는 키스할 만한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뽀뽀가 아니라 키스여야만 한다. 대뇌에서 내뿜는 엘라도파민이 바이러스를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바이러스에 한국도 비상이다. 정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무조건 교육 상담으로 학생들을 관리한다. 대행업체도 생겼단다. 만 17세가 넘으면 큰일이다. 대입시험 제대로 준비하기 어려워진다. “1년에 비가 오는 날은 50여 일 정도야. 그런데 그 중 6, 7, 8월 장마 때는 월 평균 9.3회 비가 오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날만큼은 완전히 공부를 할 수 없게 돼. 내년이면 고3이잖니? 안타깝게도 고3때까지 이 바이러스를 치유하지 못하면, 대학 입시는 다 치른 거라고 할 수 있단다.”(15,3)

윤아는 얼떨떨할 뿐이다. 부랴부랴 후보자 세 명을 추려냈다. 가장 키스할 가능성이 큰 한영운에게 연락한다. “그럼 우리 상부상조하자. 키스, 나랑 하자.”(29)

과연 윤아는 키스를 할 수 있을까. 헐크로 돌변할 괴기한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마지막 부분, 비 맞으며 외쳐댄 이상의 날개에 빵 터졌다. “누군가가 ‘날개야, 다시 돋아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주은이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라고 외쳤다. (……) 운동장에는 열두 마리의 새가 힘차게 날고 있다.”(35-36) 아, 첫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고등학생에게 위로를.

 

#화성에 갑니다: 선빈

추첨 운 비껴가던 선빈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화성인 이주 프로그램 ‘MARS-X’에 당첨된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지구 최초 50인인만큼 이주비용은 무료지만 죽을 때까지 타운하우스에서 살아야 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에 선빈의 부모님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법적인 근거는 없었다. “선빈 군은 만 18세가 넘었기 때문에 부모 동의가 없어도 여권 발급이 가능해요.”(42,2)

선빈은 생각했다. 만 18세와 19세 차이는 뭘까. 만 19세가 되어도 지금과 별 차이는 없을 텐데. 취재하러 온 방송국 PD형도 생각이 같았다. 결이 조금은 달랐지만 말이다. “서울대가 뭐라고. 서울대 나와도 다 똑같아. 이렇게 돈 벌어서 어디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45,13) PD형이 묵직한 한 마디를 던진다. “기회는 올 때 잡아야 해.”(46,1)
집에서는 가지 말라고 설득하기 바빴다. 아빠는 흔하디흔한 지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가치를 설파하지만 역부족이다. 우정도 사랑도 역경도 돈 앞에서는 한 순간 무너질 가지일 뿐이었다. 따라서 선빈이 선언한다. “나, 화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 거야. 그곳에서 개척자가 될 거야. 지구는 저무는 해라고.”(48,5)

가족 관계가 틀어질 때로 틀어지자 아빠가 마지막 송별 여행을 권한다. 선빈도 외면하진 않는다. 그리고 도착한 캠핑장에서 가족과 함께한 추억을 회상한다. “얼마나 좋냐. 우리 세 가족, 완벽하잖아. 선빈아, 이게 행복이야. 화성에 가면 앞으로 이런 거 못 해.”(55,7) 아빠도 막지 못한 선빈의 원대한 꿈을 단숨에 막아버린 사람이 등장한다.

“너처럼 귀엽고 착한 남자 만나고 싶어. 아쉽다. 너 왜 화성에 가는 거야? 가지 말고 나랑 연애나 하자.”(57,3) 갑자기 연락하게 된 서연이 누나의 고백에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나 화성 안 갈래.”(57,10) 이 어이없는 결정에 아빠는 호탕하게 웃는다. 엄마도 선빈에게 고마워하는데.

다음날 아침, 아빠가 선빈을 깨우며 기막힌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만 본다. 내 차례였을 텔레비전에 익숙한 엄마의 얼굴이 보이면서 소설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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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목 어때요?최은경 지음 | 루아크 | 232쪽 | 1만7000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만천하에 알려지고 다음 날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단 네 글자였다. ‘부끄럽다’ 조선일보와 박근혜를 분리하고 국민과 조선일보를 이입시키는 유체이탈 화법도 놀라웠지만, 내가 정말 놀란 건 단문이었다. 조선일보는 단 네 글자로 부끄러움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2012년 3월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현장 조사 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공정위 조사관들이 신분을 밝히고 건물에 들어가려 했으나 출입을 50분 동안 가로막았다. 그새 삼성은 관련 자료를 통째로 폐기했고 책상과 서랍장을 바꿔 조사 대상 직원의 컴퓨터를 새것으로 바꿔치기한 게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다음 날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이랬다. ‘삼성 눈에는 이 나라 법은 법같이 보이지 않는가’ 가끔 조선일보 기사와 사설 제목을 보면 ‘심판자 조선일보’의 우스운 태도가 느껴진다. 조선일보의 제목은 언제나 강렬하지만 그 의도를 들여다보면 권력에 대한 적나라한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 날 신문은 제각각 1면 제목을 다채롭게 달았다. ‘”어찌 됐든 사과” 140분 맹탕 회견’ ‘고개만 숙였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맹탕, 고개만 숙였다고 비판했다. ‘’김건희 의혹’ 부인한 윤, 특검 거부’ 동아일보는 고집부리는 윤석열을 강조했다. ‘아내 처신 머리 숙이고 의혹 앞엔 고개 숙였다’ ‘윤 고개 숙였지만, 의혹엔 고개 저었다’ 국민일보와 한국일보는 대통령의 사과와 의혹에는 고개를 저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만 달랐다. ‘“저와 아내 처신 올바르지 못해 사과드린다”’ 마치 윤석열이 정중하게 국민 앞에 사과하는 내용으로 제목을 단 것이다. 도대체 의도가 무엇인가.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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