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 ‘큐레이터’라고? 건방 떨지 마라:『세상을 편집하라』

2025년 11월 19일

세상을 편집하라
이영훈 외 4명 지음 | 한국편집기자협회 | 179쪽 | 1만8000원

 

냉정히 말해 신문의 문법은 죽었다. 더는 신문의 문법으로 말하지 않는 시대에 도달했다. 슬로우뉴스나 미디어오늘 정도가 지면신문 파워를 말한다. 아직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라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종합편성채널과 지면신문 중심의 전달력이란 점에서 1990년대 권능과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할 뿐이다. 신문 열독률 지표를 내세우는 것도 지겹다. 결과적으로 신문은 매체로서의 힘을 잃었다.

“반면, 인터넷뉴스의 레이아웃은 대부분이 정해진 화면 크기에 간추린 제목과 텍스트만을 나열하고 있다. 뉴스의 경중완급이 확실치 않다. 포털에서 가장 많이 보는 기사는 그날의 중요한 뉴스라기보다는 제목에 낚인 경우이거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소식이 대부분이다.”

과연 그럴까.

조선닷컴은 디지털 뉴스를 다룬다. 지면신문인 조선일보와 발걸음을 함께하는데 때론 조선일보보다 더욱 발 빠르게 판갈이 한다. 사진 상단에 있는 한동훈 기사가 언제 다른 기사로 바뀔지 모른다. 제목과 부제목도 지면신문 못지않게 글자 수에 유념해 집필한다. 인터넷도 지면신문처럼 제목 글자 수에 한계가 있지만 본문에선 사실상 무제한에 가까운 공간의 특성을 가진다. 너무 길면 독자들이 읽지 않기 때문에 짧게 쓰기도 하는 것처럼 선택이 가능하기에 지면신문보다 낫다.

본격, 지면신문 패기: 온라인에 쳐 발리는 인쇄 매체의 한계

①읽기 귀찮음: 피곤한 몸 침대에 뉘어서 스마트폰 켜는 게 편할까, 대판 신문 펼칠 커다란 책상 앞에 꼿꼿하게 앉아 지면신문을 여는 게 더 편할까. 방송국 뉴스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주는 것과 달리 신문은 직접 글을 읽고 해독해야 한다. 가뜩이나 청소년 문해력이 사회 공론화가 되는 마당에 어른들까지도 문해력 테스트하게 만드는 게 지면신문이다. 피곤한 상태에서 글을 읽으면 오독할 가능성이 높다. 다 떠나서 피곤할 때 보는 건 인쇄물이 아니라 영상물이다.

②어려운 문법: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스트레이트 기사가 무엇이고 퓨처 기사가 무엇인지 모른다. 문패나 제목, 부제목도 익숙하지 않다. 그저 제목은 화끈하게 다는 기사의 얼굴일 뿐이고 부제는 기사 내용을 요약한 것쯤으로 생각한다. 아나운서가 동어반복, 군더더기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지면신문에도 같은 단어를 제목과 부제목에서 두 번 사용하지 않는다. 위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때론 톱기사여도 중톱이 톱만큼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때도 있다는 문법을 이해하면 편집 의도를 알 수 있다. 허나 사람들은 모른다. 신문의 문법이 마이너 해졌다는 증거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읽다 보면 몸에 익기 마련이다. 익숙해질 때까지 꾸역꾸역 읽어야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대가 제목 짓는 이의 설움을 아는가. 한 어린이신문사에서 일했을 당시 손으로 쓴 제목이 종이에 쓰여 있다.

③커도 너무 커: 보통의 신문은 대판 크기로 발행한다. 작은 책상이나 들고서는 신문을 읽기 어렵다. 기차나 버스에서도 다음 면을 펼치려 할 때 꼭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같다. 소리는 또 얼마나 촤르륵 펼쳐지는지. 사람들은 용지 크기를 줄이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한겨레 토요판 타블로이드, 중앙일보 베를리너판은 작아서 휴대성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지의 크기는 곧 레이아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다. 대판만이 가능한 레이아웃이 있고, 타블로이드만이 가능한 레이아웃이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시각에선 대판 레이아웃이 더 신문만의 매력을 느끼게 해 준다. 본지도 대판에서 베를리너판으로 줄여보려고 해 봤다. 풍성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단점을 깨닫고 지금까지도 대판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④공짜가 아니라서 미안: 방송국 뉴스는 유튜브에서 무료로 풀리는 것과 달리 지면신문 보려면 돈을 내야 한다. 디지털 뉴스로 보면 되잖으냐고 물을지 모른다. 흩뿌려진 디지털의 바다에서 꼭 읽어야 할 기사를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처럼 100년 전 자료를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어디까지나 옛날 신문일 뿐 지금의 신문을 보려면 예외 없이 결제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저널리즘이 무료여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지금 손쉽게 정보를 취득하는 무료 저널리즘이 내용의 질을 저하하게 만든 원인은 아닐지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다.

⑤경영진을 눈치 보는 신문사: 저널리즘 전문가 정준희 교수는 편집권과 사주(社主)가 분리되지 않은 한국 언론 생태계를 지적했다. 사주가 일탈을 저질러도 신문사가 사주를 감싸는 구조다. 편집권은 그 자체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대한민국 헌법 제21조제2항) 법제처는 “검열은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사상이나 의견 등이 발표되기 이전에 예방적 조치로서 그 내용을 심사, 선별하여 발표를 사전에 억제하는, 즉 허가받지 않은 것의 발표를 금지하는 제도를 말한다”고 지적한다.

⑥정파성과 큐레이팅의 실패: 방송국도 경영진 입김을 무시할 수 없지 않으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신문은 유독 정도가 심하다는 게 문제다. 흔히 신문은 정파성이 강해 하나의 매체만을 보아선 안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조선일보를 보면 경향신문도 본다”고 말하는 식이다.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신문은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보도하기 때문이다. 이익 앞에서는 이념은 가볍게 허물어진다. 방송국 영업이익보다 현저히 낮은 신문사에서 정의란 언제나 돈의 논리에 따라가기 쉽다.

⑦신문이 아니어도 가능한 저널리즘: “신문은 정보 전달과 동시에 ‘분석, 해석, 방향 제시’를 해야 한다. 이때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바로 ‘편집능력’이다.”(17) 방송국이나 디지털 뉴스라고 ‘분석, 해석, 방향 제시’ 못하는 줄 아는가. 굳이 지면신문이 아니어도 시리얼이나 뉴스포터 등 뉴스 큐레이터가 든든하게 답답한 세상과 현실에 맞서고 있다.

⑧결국 남는 건 배달, 배달, 배달: 지면신문 한 부 제작에 달려드는 기자가 한 둘이 아니다. 취재기자에 편집기자, 그래픽기자, 논설위원 등이 필요하다. 방송국도 똑같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배달 체계를 들이민다. 그래서 판갈이 개념이 중요하다. 신문은 한 번에 완성해 발행하지 않는다. 최종 발행 전까지 지면신문을 갈아엎는다. 조선일보의 가판(架板) 마감 시간은 오후 6시다. 밤 10시 51판부터 인쇄에 돌입하면 마지막 54판 인쇄가 새벽 2시 어간이다. 배달까지 감안하면 최소 자정 전까지는 지면신문이 완성되어야 한다.

⑨무시할 수 없는 물리적 한계: 따라서 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은 새벽 4시부터 7시 사이다. 아침 일찍 신문을 집어도 어제 다 보도된 내용뿐이다. 퇴근 후 씻고 속 편하게 MBC, SBS 뉴스를 접하는 게 더 빠르다. 시간으로는 결코 지면신문이 방송국이나 디지털 뉴스를 이길 수 없다. 적어도 스트레이트 기사로는 말이다. 탐사보도가 아닌 이상 지면신문의 시간은 언제나 방송국과 디지털 뉴스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극복할 수 없는 물리적 한계 때문이다.

신문 편집술이 한 번에 기울어버린 결정적 이유

지면신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바로 편집기자다. 취재기자가 기사를 쓰면 편집부에서 지면신문을 제작한다. 신문의 레이아웃, 쉽게 말해 어떻게 하면 기사를 보기 좋게 정리할지 고민하고 만들어내는 기자다. 이들 없이는 신문을 만들 수 없다.

“편집기자는 여전히 종합적인 균형감각과 예리한 판단력으로 기사의 대소경중을 신속히 파악해 완벽한 지면을 완성하는 ‘최후의 기자’임에 틀림없다.”(22)

최후의 기자라는 말에 울컥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번뜩였다.

‘그 최후의 기자들, 다 어디로 간 걸까’

이를 추론하기 위해선 지면신문의 세로쓰기 체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출판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가로쓰기를 지향했다. 그렇다면 신문은 언제부터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전환한 걸까. 놀랍게도 1990년대 후반이다. 책은 이렇게 말한다. “가로쓰기에 익숙한 한글세대가 독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기에 시대의 요청” “비주얼이 강조되고 여백의 미학이 등장해 디자인 마인드가 매우 중요하게 대두되었다.”(52)

본지가 제작한 노션판 ‘지면신문 편집 가이드’. 한국의 지면신문은 세로쓰기 관행이 광고에 남아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신문 산업 쇠락은 정해진 수순이란 걸 깨달았다. 신문 산업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변화에 매우 보수적이었다. 디자인은 결코 화려하게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활자에도 디자인이 존재하며 기사를 배치하는 레이아웃은 디자인의 기초다. 신문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낯선 감정을 느낀다. 마치 디자인과 편집이 무 자르듯 분리되는 기분 말이다.

“신문의 맹목적인 비주얼화가 오히려 신문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설자리를 좁히고 있다는 자각이 생겨난 건 최근의 일이다.”(52)

과연 그럴까.

편집의 3대 혁명으로 CTS 제작 시스템 도입과 가로쓰기 체제, 신문 비주얼화를 꼽는다. 컴퓨터로 조판하는 CTS 도입 전까진 활판 인쇄 체제로 지면신문을 만들었다. 활판은 컴퓨터 조판보다 까다롭다. 컴퓨터로 조판할 땐 제목 한 글자가 넘치면 장평과 자간을 줄여 끼워 맞추듯 하면 그만이지만 활판은 장평과 자간을 줄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한 글자를 지우거나 다시 제목을 지어야 한다.

세로쓰기와 가로쓰기 제작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세로쓰기 지면신문엔 여백이 없지만, 가로쓰기 지면신문엔 여백이 많다. 다시 말해 글자와 사진으로 꽉꽉 채워야 할 장인이 필요 없어졌다는 의미다.

1999년 2월, 조선일보의 마지막 세로쓰기 신문과 2011년 조선일보 지면의 비교.

제목 달기 장인들이 필요 없어지게 된 순간이 바로 컴퓨터 조판인 CTS 도입 시기가 아니었을까. 신문사가 얼마나 보수적이냐 하면 새 체계 도입도 늦었을뿐더러 선배를 하늘처럼 모셨다고들 한다. 한 글자 부족하면 제목을 다시 짓는 게 아니라 자간을 좀 줄이는 걸로 때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선배들이 매일 같이 “제목, 부제 짓는 게 신문에서 제일 중요해!”라고 가르쳤거늘, 디자인 좀 배웠다던 신입 후배들이 “에이, 장평 좀 줄이면 되죠.” “여백으로 메우면 되죠”라고 말하면 어깨에 힘 좀 빠지지 않았을까.

지면신문에 가로쓰기가 정착되고 나서는 신문 편집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①문장형 제목의 등장: “자수 제한에서 해방돼 기사 자체를 제목화하거나 말 하듯, 줄줄이 다는 형태가 특집에서 가끔 등장함.” ②통단 제목의 과감한 사용: “초대형 사건이 발생할 때만 사용하던 통단 제목이 간지나 특집에서 자주 쓰임” ③주제목+부제목형, 가지 제목 사용 자제: “일부 내용을 작은 글자로 뽑아내는 가지 제목 사용도 줄이고 되도록 같은 활자 크기의 제목 사용을 선호하는 편.” ④사라진 막대형 컷: “알록달록한 지문컷들이 깨끗하고 간절함을 추구하는 가로쓰기 정신과 맞지 않는 판단에 근거함.”

그러나 CTS 도입과 가로쓰기 도입만으로 신문사가 한 번에 기울었다는 건 근거도, 주장으로도 적합하지 않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현대에 발 바꿔 움직이려는 보수적인 신문사 그 자체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허나 지면신문을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 사랑하는 이유

그래도 나는 지면신문을 만든다. 그리고 지면신문을 사랑한다.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를 만드는 이유도 지면신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왜 영상이 아닌 신문이었을까. 동영상과는 다른 활자 매체의 매력을 지면신문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기억을 빠른 시간 안에 공적인 기록물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신문이란 체계가 필요했다. 오늘 하루를 있었던 일, 느낀 점 등으로 담아야 하는 일기와 달리 신문은 다채로운 장르의 글을 담을 수 있다.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가는 3시간 동안 노트북 하나면 지면을 만들 수 있다. 신문 편집 자체가 재미있다는 점도 한몫한다. 무궁무진하게 표현 가능한 신문의 빈 종이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보인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이 나처럼 변태는 아니다. 그런 변태는 극히 드물다.

죽은 신문이 살아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지면신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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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타나크, 신약 ─ 마침내 성경염진호 지음 | 문장공방 | 164쪽 | 1만1000원 사람들은 성경을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경전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신이 모세에게 불러주는 대로 적었다든지, 급하게 기록물을 모아다가 ‘신의 말씀’으로 편집했다고 보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한순간에, 한곳에서 만들어진 기록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서는 단순히 역사적 타임라인이나 교리식 공부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주입식 암기 중심의 교리 공부만으로는 구원의 다층적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성서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교리로 이해되지 않는다.”(11쪽4단) 성서는 도서관처럼 다양한 장르와 층위의 해석이 공존하는 문헌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성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주목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진화된 성서 성서의 편집 과정을 역사적으로 훑어보면 꽤 유연한 문헌이다. 이슬람의 코란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코란은 성서와 달리 중앙집권적 체계를 통해 편찬되고 유통되어왔다. 따라서 하나의 조직이 단일한 결정으로 경전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성서는 수 세기에 걸쳐 구전과 기록, 편집, 번역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구약은 기원전 5세기인 에스라 시대 이후 유대교 공동체 속에서 정립되었고 율법과 예언서, 성문서인 타나크로 확립됐다. 신약은 바울 서신과 복음서가 점차 권위를 얻으며 마르키온 논쟁 등 이단 대응 속에서 4세기 교회 공의회를 통해 27권이 확정됐다. 따라서 지은이는 성서가 코란처럼 ‘창조’되기보다 천천히 ‘진화’됐다는 점에서 공동의 산물로 보고 있다. ◇자유로운 첨삭과 편집의 전통 속에서 태어난 성서 신명기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모세 사후의 기록과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더디오의 첨언을 보면 성서의 후대 수정이 자연스러웠다. 지은이는 오히려 ‘후대의 자유로운 편집’에 주목한다. “성서 시대의 문서 전승은 단순히 학생들이 공부한 내용을 빼곡히 적어 낸 깜지처럼 ‘있는 그대로 글을 옮겨 쓰는 작업’이 아니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 시기의 글쓰기에는 후대의 첨삭과 편집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다.”(21,3) 사해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70인역(LXX) 등 다양한 버전이 병존했으며 각 공동체의 신학과 상황이 반영됐다. 바로 이 ‘성서의 변형’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방해물이 된다. 성서 곳곳에도 다양한 성서의 문헌이 가져온 “분열된 시대의 현실”(47,5)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성서의 변형은 오히려 성서 시대의 정황을 보여줌으로써 다층적인 전승 구조를 가늠하게 한다. ◇역사적·신학적 논쟁의 산물 ‘정경화 과정’과 성서 복원의 역사

제목에 심어놓은 ‘조선일보의 의도’ 편집자의 윤리를 묻는다:『이런 제목 어때요?』

이런 제목 어때요?최은경 지음 | 루아크 | 232쪽 | 1만7000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만천하에 알려지고 다음 날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단 네 글자였다. ‘부끄럽다’ 조선일보와 박근혜를 분리하고 국민과 조선일보를 이입시키는 유체이탈 화법도 놀라웠지만, 내가 정말 놀란 건 단문이었다. 조선일보는 단 네 글자로 부끄러움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2012년 3월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현장 조사 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공정위 조사관들이 신분을 밝히고 건물에 들어가려 했으나 출입을 50분 동안 가로막았다. 그새 삼성은 관련 자료를 통째로 폐기했고 책상과 서랍장을 바꿔 조사 대상 직원의 컴퓨터를 새것으로 바꿔치기한 게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다음 날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이랬다. ‘삼성 눈에는 이 나라 법은 법같이 보이지 않는가’ 가끔 조선일보 기사와 사설 제목을 보면 ‘심판자 조선일보’의 우스운 태도가 느껴진다. 조선일보의 제목은 언제나 강렬하지만 그 의도를 들여다보면 권력에 대한 적나라한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 날 신문은 제각각 1면 제목을 다채롭게 달았다. ‘”어찌 됐든 사과” 140분 맹탕 회견’ ‘고개만 숙였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맹탕, 고개만 숙였다고 비판했다. ‘’김건희 의혹’ 부인한 윤, 특검 거부’ 동아일보는 고집부리는 윤석열을 강조했다. ‘아내 처신 머리 숙이고 의혹 앞엔 고개 숙였다’ ‘윤 고개 숙였지만, 의혹엔 고개 저었다’ 국민일보와 한국일보는 대통령의 사과와 의혹에는 고개를 저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만 달랐다. ‘“저와 아내 처신 올바르지 못해 사과드린다”’ 마치 윤석열이 정중하게 국민 앞에 사과하는 내용으로 제목을 단 것이다. 도대체 의도가 무엇인가.

좁은 사고방식의 그런 지구, 정복할 이유라도?:『우리 미나리 좀 챙겨 주세요』

우리 미나리 좀 챙겨 주세요듀나 지음 | 창비 | 80쪽 | 1만원 한 번 읽고는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웹사이트 이곳저곳을 뒤져야 했다. 간단한 도식을 보고 나서야 또 하나의 편견이 깨지고 말았다. 인간과 비(非)인간의 구분 말이다. 메카 공룡인 당근이를 괴롭히는 십 대 중반의 남자아이들과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의 진짜 공룡과 가짜 공룡의 구분은 차별적인 지구별의 행태를 폭로한다. 차별의 문제는 지구에서 사는 인간의 오랜 문제다. 언제나 차별은 존재했고 어디에서나 차별은 작동했다. 작가가 SF 장르를 통해 차별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좀 더 상상력을 가동해 보았다. 바로 메가 공룡과 생물학적 공룡의 차이를 구분하는 게 어리석은 일인 만큼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또한 다르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손바닥만 한 지구에서 우열을 가리는 일이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인간의 공격성은 생존을 위해 진화했다. 차별이란 근거도 생존 본능의 한 증거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는 차별이란 칼날의 끝은 언제나 비극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작가는 공존을 택한 게 아닐까. 나는 이 지점에서 작은 별 퍼피레드가 생각났다. 끝내 공멸하고 만 또 하나의 세계, 그 세계를 돌이켜보면 멸망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향한 핀잔과 조롱, 절망이 뒤섞인 공간, ‘우리끼리’라는 차별과 남의 인생이나 어림잡는 편견이 난무하는. 끝끝내 돈이 없어 파괴되어 버린 마지막 자본주의적 결말까지도. 그런 사람들만 지구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현준 건축가의 말처럼 만일 인공지능이라면 이런 좁은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의 지구를 떠나 살지 않을까. 굳이 인간을 죽여가면서 지구를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그런 인간들과 마주하며 퍼피레드 할 이유는 무엇일까.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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