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등] 너에게만큼은 찐따로 보이지 않길 바랬는데

2024년 10월 22일

“진성아, 나 좋아하지 말아줘.”

이게 무슨 말이지. 싶어 쭉 읽어 내려간 글은 320자 분량. 꺼림칙한 기분으로 속독했다. 대충 내용은 이랬다. “네가쓰는ㅋㅋㅋㅋㅎㅎㅎㅎ과도한자음들말야날남들보다좋아하는느낌이란생각이들어나는너한테관심없고좋아하는것도아니야난너와친하다고생각했지좋아하는그런사이로생각해본적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호감. 호감 정돈 가진 건 맞다. 하지만 좋아했다는 건 억울한 오해다. 고백한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디펜스하는 게 어딨나. 불쾌한 답장에 기분이 꽁했다.

의자에 기대에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그 애랑 둘이서 채플에 빠지던 날이 떠올랐다.

교통사고는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치기에 교통사고겠지

우리 학교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점심이면 채플에 참석해야 한다. 채플은 기독교 학교라는 구색에 맞춘 과목에 불과하다. 한 시간뿐이라곤 하지만 다들 출석률만 채우려고들 난리다. 지루한 교수들 강연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대충 시간만 때우려 뒷자리에 앉으려 했다. 대강당에서 학식까지 좀 걸어야 한다. 대강당과 학식 사이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히고 싶었다. 어느 자리가 빠져나가기 좋을까 둘러보다가 그 애와 눈이 맞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 마디 내뱉었다.

“소담아. 그냥 점심 먹으러 안 갈래?”

무심결에 한 말이었다. 강하게 끄덕이는 고개에 살짝 놀랐다. 티티동산 지나쳐 학식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때까진 별생각 없었다. 그냥 평범한 이야기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채플 생까고 점심 먹은 건 처음이다, 채플 재미없지 않으냐, 나랑 색채가 안 맞는 거 같다, 학교가 재미없다, 공부는 어렵다 같은 그저 그런 이야기나 주고받았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그 앨 도와주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어제였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그 애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힘든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빈 강의실을 찾았다. 그애와 둘이 들어갔다. 저녁 내내 같이 있었다. 그 애는 방황하고 있었다. 뭐 하며 먹고살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의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데다가 어렵기만 했다고. 처음 생각했던 이상적인 학과가 아니었다고 한다. 물밀듯 밀려든 현타에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버리는 시간이란 없어. 소담이 네겐 지금이 힘겨울 거야. 잘 이겨내면 분명히 남는 게 있을 거야.”

그렇지? 그렇겠지? 그럴 거야. 마음에 간직하는 모습에 안도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이 즈음 물러나야 했다. 선배 만나러 간다고 이 자리를 떠났어야 했다.

“그래서 진성아. 나랑 더 있어 줄 수 있어?”

“어? 어….”

얼떨결에 오후 남은 수업을 빠지고 말았다. 보기 드문 나의 일탈에 내가 놀랐다. 뭔가 빠져들게 만드는 무언가에 홀리고 만 것이다.

끊김없는 대화에 새벽 카톡에도

그날 밤까지 우리는 3시간을 같이 있었다. 별의별 얘기를 했다. 어제는 취업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면 오늘은 일상에 대해 말했다. 좋아하는 취미는 뭔지, 주말에는 뭐 하면서 노는지…. 나도 그 애 삶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아 흐뭇했다. 끊김 없는 3시간의 대화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애의 궁금증이 한몫했다. 거기에 내 마음 다한 공감까지 더했으니 말 다 했다. 대화 도중 진규 형한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끊고 다시 그 애와 얘기하려다, 그 애가 웃기 시작했다. 이유 모를 웃음에 의아했다. 알고 보니 통화하던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줄무늬 재킷에 넥타이를 매고 딴 데를 쳐다보며 통화하는 내 모습이 화면에 담겨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애를 바라다 주었다.

압권은 새벽까지도 카톡을 주고받은 일이다. 대화 내용은 여기서 밝히기엔 조금, 조금…. 농밀했다. 이쯤이면 걔도 나한테 조금은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확실한 게 아니었다. 괜히 먼저 나섰다간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

“이 정도면 관심 있는 거 맞네. 쫌만 간 보다가 사귀자고 고백해 버려!”

나보다 한 살 많은 진규 형이 조언이랍시고 때린 말에 속이 얼얼했다. 

“혀엉, 그래도 확실하지 않잖아요.”

“좋아하면 좋아한다, 싫으면 싫다. 이게 어려워?”

머리가 복잡해졌다. 새벽 한동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마음이 무거웠다. 혹시나 그 애가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좋았던 그 애와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 애가 또 나타났다.

“진성아, 안녕?”

대충 인사를 받았다. 첨벙첨벙 걸었다. 그 애랑 같이. 그러다 물 길을 밟으려 할 때면 그 애한테 “여기 웅덩이 조심해”라고 일러줬다. 수업은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갑자기 희망이 샘솟았다. 생각해 보니, 날 무시하고 먼저 수업 들으러 뛰어갈 수도 있었다. 날 지나치지 않고 인사까지 했단 말이지.

나흘째 저녁, 진규 형을 괴롭혔다. “형ㅜㅜ 그 애가 오늘 저를 보고 웃어줬어요” “형ㅜㅜ 그 애랑 같이 빗속을 뚫고 수업 들으러 갔어요” “형ㅜㅜ 그 애랑 밤에 카톡 할 정도로 가까워졌어요.”

그러다 답장이 왔다. 진규 형이 아니라 그 애였다.

“진성아.”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나 좋아하지 말아 줘” 제하의 320자 분량의 장문의 카톡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모든 사실을 다 불어버린 진규 형이 원망스러웠다. 무척 슬펐다.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고향에 내려가지 말까 싶었다. 망할 놈의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 애와 틀어지자
비는 쏟아지고
선배와의 귀향길
감정에 북받쳐서
힘든 것 토로하니
속이 후련하더라

새 옷, 새 신발
바꿔 입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진호 선배는
“진정한 변화란
새로운 판짜듯”

언제나 큰 힘에는 그 대가가 뒤따르는 법

다음날. 굼벵이 같던 나를 움직이게 만든 건 3학년 진호 선배였다. 선배도 차표를 예매하지 못해 터미널까지 가야 할 운명이었다. 우리는 험한 빗속을 뚫고 유성에서 대전복합터미널까지 갔다. 웬걸, 강릉으로 가는 차편이 모두 매진된 것이다.

선배는 무척 아쉬워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같이 강릉으로 올라가도록 해요.” 그러나 내 마음은 엉망진창이 되어 이미 무너져내려버린 다음이었다. 그 애를 알게 된 다음부터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여우 같은 년이네.”

선배의 속 시원한 말 한마디에 속이 후련했다. 그날 저녁까지 진호 형과 성심당에서 빵을 먹으며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병에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진호 형은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사실 형님이 한 일은 그게 전부였다. 지금에서야 바라본 비는 시원한 단비 같았다. 진호 형과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새벽 4시 30분. 진호 형과 강릉행 첫 차를 타고 대전을 훌훌 떠났다. 강릉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9시. 배꼽시계에서 라면 한 사발 때렸다. 시원한 국물을 마시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다가 하늘을 바라봤다. 맑은 가을 하늘이 눈에 밟혔다. 더는 그 애가 생각나지 않았다.

며칠 뒤 후배 대희와 대전 은행동을 들렀다. 날 스타일링 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촌스러운 줄무늬 셔츠는 펑퍼짐한 옥스퍼드 셔츠에 짙푸른 니트로 낡은 운동화는 탄탄한 스니커즈로 바뀌었다. 넙데데한 뿔테안경만 바꿔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형, 좋아요. 어울리는데요?”

대희가 빌려온 교회 차를 타고 은행동에서 유성구로 향했다. 고마웠다. 기름값이라도 하라고 몇 만원 찔러 줬다.

기숙사로 돌아와 조용히 커피 한 잔 마시며 쉬었다. 새 니트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모든 걸 갈아치우고 싶었다. 내 모든 기억을 지워서라도 바꾸고 싶었다.

변화의 바람은 오래지 않았다. 깊은 현타를 느낀 건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 아닌 나’를 발견한 지점에서였다. 새로운 스타일링을 경험해도 껍데기일 뿐이었다. 기억과 생각까지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을까.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생각한 걸 진호 형과 나누었다.

“변화라는 건 옷 하나 바꾼다고 될 일은 아니죠. 무엇을, 어떻게 바꿀 건지 새로운 판을 짜는 것처럼 처음부터 생각해 보세요.”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학교 벤치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툭툭 치는 걸 느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큭큭 대고 웃는 웃음소리만 들렸다. 아무래도 신애 같았다. 벤치에 기대 숨는 척했다. 고개를 빼꼼 들자 신애와 눈이 마주쳤다.

“진성 오빠!”

신애에게 반갑게 손 흔들어 인사했다.

아무래도 산다는 건, 조금씩. 서서히 어른으로 변해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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