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 10. 26 | 지면 : 2018. 10. 02 | A18
미망이의 평점
선물 받은 책이기 때문에 평가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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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이 감사하게도 학교 수업 필수 과목 교재를 선물해주셨다. 가격은 4만원, 모르는 이에게 선물해주기에 결코 싼 가격의 본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책들보다 더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감사와 훈훈함에도 본문은 대학원 4학기 동안 읽은 본문 중 최악이 아니었나 싶다. 본문 대해 평가할 때 기본적으로 가독성, 내용, 소장가치 측면으로 평가 하는데 이 세 부분 모두 최악이었다.
◇최악의 번역: 유럽식 표기보다 영어식 표기를 택한 학자명, 심각한 가독성 문제
최악의 번역으로써 가독성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본문을 읽어본 많은 이들이 “한글인데도 이해가 안 된다”는 평을 남겼을 정도다. 몇 번을 읽어가며 맥락을 잡았다.
물론 본문이 이렇게 어려운 건 번역자 잘못은 아니다. 이 본문의 원서를 읽어 본 결과 번역만이 잘못됐다고 평가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번역은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번역된 대부분의 문장은 매끄럽지 못하고, 유럽식으로 표기해야 할 학자들의 이름도 영어로 표기를 해놓았다.
“토대와 초-구조(Base and supers trure)라는 칼 막스 해석 카테고리들에 호소함으로써, 고트왈드는 혁명을 낳은 것은 농민들의 물질적 상태였으며, 야웨는 물질에 의해 촉발된 혁명적인 행위에 대한 뒤늦은 범적 추인자였다고 주장했다.”(98쪽)
“야웨의 명령은 시내산 전승(출19:1-민10:10)과 (신12-25장)를 주도하고 있는데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핵심적 문헌(토라)의 상당 부분이 야웨의 명령들에게 주어지고 있다.”(306쪽)
“첫째로, 도덕적인 면에서 균형을 천명하셨던 바였고 그런데 이 천명을 취소하신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신 야웨께서 이스라엘의 거친 축어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626쪽)
“우리는 이스라엘은 심지어 야웨의 바램이나 의도를 넘어서는 바램을 갖고 있었으며 반면 야웨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소망과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의 용기와 신랄함, 그리고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대담한 저항은 야웨를 야웨께서 이전에 즐겨하지 않았던 혹은 생각지 않으셨던 나아가 의도하지 않으셨던 그 무엇으로 향하도록 하셨다.”(703쪽)
“이런 점에서 ‘열방’이란 주제는, 우리가 뒤에서 보겠지만 비록 이 증언이 이 이데올로기적인 이해에 반하는 중요하고도 자기-의식적이며 비평적인 움직임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 이데올로기적 국면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787쪽)
“동시에 우리는 선지자들에 대한 우리의 신뢰할 만한 데이터는 컨세서스 가설(concesensus hypothesis)을 뛰어 넘어 대단히 열악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979쪽)
“야웨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의 상당부분은 규정화 되고 고양된 형태의 예배로부터 생겨나고 이 예배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20세기의 상당한 구약학자들이 주장했던 것과 달리, 이 이해는 역사(의미와 임시방편의 특정한 사건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1021쪽)
이와 같이 본문의 문장은 한글로 구성하고 있음에도 우리말을 사용하는 이들이 독해하기 어렵게 문장을 구성했다. 무엇보다 이 문장들은 따로 표시해놓은 게 아니라, 서평을 쓰다가 중간 중간 펼친 페이지에서 나온 문장들이다.
즉 1,200쪽에 달하는 이 본문은 위와 같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솔직히 말해 이 번역은 전문 번역가가 했다기보다 번역기를 돌려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외에도 독일학자 ‘라이너 알베르츠(Rainer Albertz)’를 ‘레이너 알버츠’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유르겐 몰트만’으로, ‘막스베버(Max weber)’를 ‘맥스 웨버’로, ‘한스 프라이(Hans Frie)’를 ‘한스 프리’로 프랑스 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를, ‘폴 리코’로 번역을 해놓았다. 물론 칼빈(J.Calvin)과 칼뱅은 차이가 없다.
최소한 이 본문이 학술적 본문이라면, 현대학자들만큼은 그 국가 발음 표기법대로 번역을 하는 게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학자의 이름도 번역가가 자신들 편하게 번역을 해 놨다.
최악의 번역
매끄럽지 못한 문장과 학자명 표기도 제멋대로…
“레이너 알버츠·유르겐 몰트만·맥스 웨버·한스 프리”
히브리어 표기·이해할 수 없는 개관
동사 ‘인도하다’를 ‘hlk’로
야훼에 대한 증언에서 주체가 되어야 할 증언자를 객체로 표현하며 ‘야훼는 …했다’로 얼버무려
원서 저자는 ‘증언’ 형식을 빌렸지만 정작 내용은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 있어
◇내용의 부실함: 히브리어 표기, 엉성한 내용 전개… 읽다가 지칠 만 해
이러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처음 700쪽까지 최선을 다해 읽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중간 중간 이해 못하는 내용이 많았다. 원서의 저자가 히브리어 표기를 원어로 해놓지 않고 영문 자음으로만 표기 해 놨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긍정형 동사인 ‘인도하다’는 여기서 hlk로 표현되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nhl(출 15:13)과 nhh(출 13:17, 21, 시77:20, 78:15,52-53)로 표현되고 있다.”(338쪽)
“우리는 이미 다른 상황에서 신명기 32장 8절에 나오는 동사 yld와 hll은 아버지의 출산과 어머니의 자녀 생산 모두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425쪽)
“시편 96장 10절의 제의적 선포는, 즉 2절에 따르면 ‘복음(bsr)’이라고 표현 된 이 선포는 창세기 9장 8절-11장 30절에서 보다 자세한 내러티브의 상의 규명이 주어지고 있다.”(787쪽)
이와 같이 본문은 구약 히브리어를 그 용법에 따라 설명한다고 하면서 히브리어 자음을 표기해 둔 게 아니라 영어 자음으로 단순 표기했다. 그렇기에 히브리어 단어를 모르는 이들은 저자의 의도나 해석을 알 수 없게 만들었으며, 원서에서도 이같이 표기 돼 있다.
이러한 표기법보다 심한 내용 오류가 있다. 그것은 저자의 본문 내용 전개가 너무 이상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야훼에 대한 증언을 긍정형과 부정형으로 설명을 한다.
문제는 이 설명 방식이 유효하려면 이스라엘이 주체가 되고 야훼가 객체가 되어야 하며, 술어나 목적어는 ‘증언 되었다.’ 혹은 ‘증언 되어진’의 형식으로 설명해야 하는데(예컨대, 이스라엘 증언에 의하면, 야훼는 …했다) 저자는 그저 단순히 ‘야훼는 …했다’, ‘야훼의 속성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는 형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저자는 ‘증언’ 형식을 빌려 구약신학 목록을 짰지만, 막상 저자는 ‘증언’ 형식을 통해 설명하는 게 아니라 에세이 형식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었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야훼의 증언에 대해 ‘동사형’, ‘형용사형’, ‘명사형’ 증언을 개관한 부분이다. 그 뒤에서 다시 ‘야웨의 영광’, ‘야웨의 거룩하심’, ‘야웨의 질투하심’, ‘야웨의 언약과 파토스’로 다시 개관한다. 근거를 모르겠다.
또한 이스라엘 증언에 뒷받침으로 토라를 개관하고 그 뒤에 다시 제사장을 개관하는 모습은 내용을 요약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론은, 브루그만과 출판사 CLC에 대한 실망
결론적으로 브루그만이라는 학자의 명성을 익히 들어오다 학교 수업으로 인하여 본문을 처음 봤는데 많은 부분 실망했다. 그의 글쓰기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글쓰기였으며, 그의 주장은 무언가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고 논리적 결함이 있어 보였다.
과연 앞으로 살면서 이 본문을 다시 펼쳐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의 명성은 충분히 신학을 공부하는 이에게 소장가치를 주는 본문이다. 다만 그의 명성을 제대로 뒷받침 해주지 못하는 거 같아 이래저래 많이 아쉽다.
실망감은 자연스레 책을 출간한 CLC에 이어진다. 신학대학원에 와서 CLC 출판사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본서를 비롯해 출간 된 몇 권의 책은 신학서적으로서 품질이 떨어지는 듯하다. 이러한 생각은 앞으로 읽을 CLC의 책과 그 출판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듯하다. 다음에 읽을 CLC 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부디 다음에 읽을 책은 이런 불신을 깨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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