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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종교인 납세, “세금을 내던가, 관리를 잘 하던가”

입력 : 2018. 05. 21 | 수정 : 2018. 10. 09 | 지면 : 2018. 12. 18 | A25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5>


국가와 교회의 분리.


대한민국 헌법 제 20조 2항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되, 종교와 정치를 구분했다. 그렇지만 교회를 둘러보면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지 않은 광경을 본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일념(一念)으로 퍼진 서명 용지, 특정 후보를 간접 거론하며 지원하는 모습, 교회에 방문하면 예배 시간에 인사하는 광경.


◇아우구스티누스, ‘두 도성’ 이론

종교와 자본이 유착되면, 그 종교는 타락하기 십상이다.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국가와 교회가 분리 된 이론은 누가 주장한 것일까. 보편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구분한 틀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비롯한다. 로마가 알라릭 서 고트족으로부터 약탈당한 후 집필한 ‘신국론’에서다.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으로 구분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하는 사물들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공통성에 의해 결속된, 이성적 대중의 집합.’ 정치가 키케로가 정의한 ‘법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통성에 의해 결속된 대중의 집합’과 다르다. 키케로에게 법은 공동체에게 ‘정신’이자 ‘영혼’인 반면 대중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어떤 대중인지를 안다고 본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랑(욕망)은 일시적인 개념을 사랑하느냐(탐욕),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대하느냐(선한 욕망)으로 구분했다. 두 사랑을 통해 인류를 두 개의 사랑으로 구분했는데 그게 바로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다. 성서 시편(46:5-6, 48:2-3, 87:3)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도성(새번역)’에서 ‘두 도성’ 개념이 등장했다. 물론 구분할 수 있는 가시적 개념은 아니었다. 두 도성은 보이지 않게 혼합돼 있기 때문에 종말의 날, 온전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타자 위한 그리스도인을 외친 루터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세속권세(1523)’를 통해 자손을 둘로 구분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아담 자손’ ‘세상에 속한 아담 자손’.


‘세속권세’에서 루터는 세속법과 칼이 하나님의 뜻이자 정하심이라고 성서 구절(로마 13,1; 1베드로 2,13-14)로 해석했다. 침례 요한 앞에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질문한 군인에게 군인이기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은 점, 백부장 고넬료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인 사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은 세상에 칼을 두었다고 설명한다.


율법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범죄자를 위해 필요한 것(1디모데 1,9)처럼 세속 정부는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가정과 사회 안녕을 위해 필요했다. 세속의 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 않다. 본성에 따라 선한 열매를 맺기 때문(마태 7,8)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위해 섬기고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속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칼은… 죄를 벌하며 악을 방지하기 위해 매우 유익하고 필요한 것… 기꺼이 칼의 통치에 복종하며 세금을 내며… 정부를 촉진시키는 일을 돕고 정부가 존중과 두려움 속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마르틴 루터, 451-452)


ⓒLucas Cranach the Elder



◇칼빈에겐 하나님께 신적 권위 부여 받은 통치자

존 칼빈도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와 ‘국가의 통치 질서’를 구분한 칼빈은 갈라디아서 3:28과 골로새서 3:11의 다양한 신분에 주목했다. “어떤 처지에 있든 어떠한 국가의 법아래서 살든, 그리스도의 나라가 절대로 그런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상관 없다”(기독교강요-하, 584)고 말한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국가적 통치가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았다. 칼빈은 “돕는 장치”라고 표현하며 이 장치를 빼앗는다면, 인간성 자체를 빼앗는 행위로 비유했다. 세속 정부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영적 정부가 완전해지면 되지 않느냐고 묻지만, 칼빈에게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칼빈에게 통치자는 하나님께 신적 권위를 부여 받은 존재다(탈출 22,8; 시편 82,1-6).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표현한 통치자들은 신명기에 의해(1,16-17), 유다 왕 여호사밧이 재판관을 임명할 때도(1역대 19,6) 하나님을 위해 판결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세금 징수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군주들로서는 그들이 부과하는 각종 조세 등 곡물들은 공적인 필요를 충당하는 정도로 그쳐야 하며, 아무런 연유도 없이 일반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폭군적인 착취 행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기독교강요-하, 588)



‘두 도성’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서 ‘神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으로 구분해 일시적 탐욕보다 선한 욕망 추구


두 자손으로 나눈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이며 신이 세웠기에 세속 정부는 필요하다고 주장


신적 권위 부여 받았다 주장한 칼빈

“어떤 처지든 그리스도의 나라에 상관없다”며 오히려 국가적 통치를 ‘돕는 장치’ 言


현실 문제로 접근한 존 웨슬리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며 신자를 청지기로 부르셨다는 청지기 사상 설파


직업을 신과 협력으로 본 존 스토트

직업을 목적 위한 행위로 보는 자세를 비판하며 “중요한 건 통합된 인간이 되는 것”



◇소유공동체와 청지기 사상, 가난함을 강조한 웨슬리

목회자 개념으로 성찰을 요구한 웨슬리 시대에 해결책은 오순절 소유공동체와 청지기 사상이다. 교제와 기도하기를 힘쓴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공동 소유에 초점을 맞췄다. 이 오순절 소유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청지기 사상’으로 본 것이다. 웨슬리는 축적된 부를 지적했다. 1780년, ‘축적된 부의 위험(The Danger of Riches)’에서 삶의 평안함 이상의 필요를 “어리석고도 해로운 정욕”에 빠지게 한다고 지적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함이 우선이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신자를 청지기로 부르셨다는 소명론을 주장했다. 웨슬리 시대는 공동경작으로 지방 인구가 감소했다. 농업을 주로 삼았던 이들이 산업지역이나 도시외각 빈민가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익빈 부익부가 부상했다. 사람들은 가난을 하나님의 징계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웨슬리는 반대했다.


가난의 원인을 일자리 부족으로 본 웨슬리는 사치스러운 귀족들을 비판했다. 과대세금은 국가 부채를 갚기 위한 원인으로 등장했지만 정치적 술수였다. 식량과 땅값을 세금 명목으로 올리면서 호화생활 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경제적 정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의해 시작 될 것임을 희망했다. 청지기 사상이 필요한 이유였다. 목회자는 가난한 자들을 후원하는 것을 넘어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더 큰 가치 실현을 위해 고민하는 자세를 촉구했다.


◇스토트에게 ‘일’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행위

소명은 “무언가 하라”가 아니라 “무언가가 돼라”는 의미로 설명한 존 스토트는 직업과 소명을 ‘소명’ ‘섬김과 사역’ ‘일’로 구분했다.

‘천하를 얻고도 제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있나’(마태 16,26)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인생은 우리가 어떤 직업적 능력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인간이 되는 것, 온전하고 통합된 인간이 되는 것”(온전한 그리스도인, 40)으로 설명했다.

단순한 직업으로 보지 않은 스토트에게 직업은 ‘부르심(calling)’이다. 소명으로 그리스도께 속하며, 교제하고 자유를 즐김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노동은 하기 싫은 행위, 앞으로 휴가를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변질됐다. 스토트도 같은 시각이다. 직업을 불가피한 숙명이나 유감스러운 일로 여겨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적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직업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려는 섬김,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코이네 그리스어에 의하면 사도행전 6장에서 교회 회의에 역할 분담은 같은 단어인 ‘디아코니아’로 표현했다. 일곱 사람의 구제 사역은 ‘디아코네인(diakonein)’이며 말씀 사역은 ‘디아코니아(diakonia)’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일하는 존재로 계시했다. 인간에게 일을 맡겨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과 협력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게으름이란, 인간성 부인을 뜻하고 전도서를 인용하며 일하는 행위를 긍정한다.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2,24)”


◇종교인 과세 시행했으나, 반발하는 교회

정부는 2018년 1월 1일부터 종교인 과세를 시행했다. 종교인은 근로자가 아니라는 종교계 입장을 받아들여 근로소득과 기타소득을 구분해 설명해왔다. 종교인도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국민개세주의(國民皆稅主義)’에 따라 세금을 내야 하지만 한국 교회는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가톨릭교회가 1994년부터 원천징수로 소득세를 납세한 상황과 달리 개신교회는 교회회계 기준이 정리되지 못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1987년 9월, ‘교회회계기준’을 마련했지만 타 교단은 전무한 상황이다. 다만, 경동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나 명성교회, 충현교회, 높은뜻선교회 등 47개 교회는 세금을 납부해왔다. 종교 탄압과 국가와 교회 분리 원칙이라는 명목으로 면세를 유지하는 건 세금을 내 온 교회 입장에서도 궁색한 변명이다.


종교단체 회계를 다룬 이원주 연구자는 석사논문을 통해 회계전문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결산서와 계정종목체계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고, 종교단체 회계담당자들이 회계학 전문지식이 없어 제무재표를 신뢰하기 어렵고, 재정 관리자와 감사 사이에 친분으로 인해 감사가 잘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 내부통제제도 부재로 인해 오류와 부정이 발견돼도 예방되지 않은 점을 들었다.


지난 해, 판결에서 명성교회 이월금 800억 원이 드러났다. 뉴스앤조이는 14년 간 홀로 이월금을 관리한 박 재정장로와 이월금 의혹을 보도했다. 법원은 “매년 이월된 자금이 실제 어떤 기준으로 관리, 투자되는지, 투자 수익금, 정산 내역 등도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 이 같이 보도했다.


누군가는 세무조사가 종교인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뉴스앤조이 인터뷰에서 최호윤 회계사는 지적한다(2017. 7. 25). “세무조사가 뭐가 부담되나. 왜 무서워하나. 고액 헌금자 들여다보는 용도로 쓸 거라 우려하는데, 반대로 일반 비영리법인은 그 사람에 대한 기부금 정보를 세무서에 다 제출한다. 교회는 왜 못하겠다는 건가.”


루터는 ‘세속권세’에서 마태복음서 7장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속의 칼이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루터는 직업을 세속적으로 보지 않았고 소명 의식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은 사슴이 입을 외투를 만든 재봉사로, 한 사람의 목공으로 일한 그리스도, 구속자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는 우쭐대지 않고 양젖을 짜고, 주전자를 닦은 존재로 묘사했다.(베인턴, 마르틴 루터, 326)


아기 예수를 만난 목자들은 수도사 옷을 입지 않았고, 양들에게 “되돌아갔다.”(누가 2,20) 비참한 꼴을 당할 양들 앞에 목자는 일하는 존재였다. 목사들은 요한복음서 10장을 인용하며 자신을 목자로 칭하곤 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납세 앞에 질문을 받았다. 일하는 하나님 앞에 목회는 노동이 아닌가. 회계는 투명한가. ‘사회적 섬김에도’ 왜 교회는 사회로부터 지탄받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