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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앙/교회 安 이야기

[교회 安 이야기] 율법과 냉대

입력 : 2018. 10. 02 | 수정 : 2018. 10. 02 | 지면 : 2018. 12. 18 | A21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요한 8,1-11)를 접하며, 늘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했다. 첫째, 예수가 몸을 굽혀 땅에 쓴 것이 무엇인지. 둘째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하신 예수의 말에 ‘여인은 또 죄를 지었을까’하는 문제.


흔히 예수가 한 말,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를 가지고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너희 가운데서 하드디스크에 야동 없는 자가 이 자에게 돌을 던지라”며. 물론 나도 이런 농담을 즐겨 사용하곤 했다.


몇 년 전, 요한복음서를 읽다가 문뜩 간음한 여인은 또 죄를 지었을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 예수는 이 여인이 죄를 짓지 않을 것임을 알고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13절까지 읽고 매듭을 지었다면 그 후에 발화할 계시자, 구원자로서의 예수를 보지 못할 뻔 했다.


재미있게도 간음한 여인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서에 마치 예화식으로 등장한다(물론 성서신학에서, 이 본문이 요한복음서 저자가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건 생략). 율법을 가르치는 권위자, 병자를 고쳐주는 이적 행사자, 천국을 선포하는 예언자를 드러낸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서는 하느님께서 보낸 계시자로, 구원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언급한다.


따라서 간음한 여인 이야기 다음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보내준 아버지와 함께 심판한다는 예수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실제 이 여인이 존재했다면, 억울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성서 텍스트 자체가 예수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간음한 여인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를 남성중심 텍스트이기에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 두고 던진 두 질문

①예수가 쓴 글자는 무엇인가 ②여인은 또 죄 지었을까

여인은 나약함의 상징, 예수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 했다

율법을 개정한 기독교인은 성육신한 예수를 믿고 있나?



율법 학자와 바리새인에게 간음한 여인은 좋은 본보기였다. 집단에 의해 한 사람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나약함의 상징이었다. 손가락질 하며, 저렇게는 살지 말라고. 돌로 쳐 죽여도 마땅한 인간이 되지 말라고, 배제시켜버렸다. 현대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간음한 여인처럼 살지 않으면 된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율법에 매달리는 걸까.


여인에게 동정심도 가지지 않았던 바리새인과 유대인은 말없이 돌을 던져두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종교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예수도, 여인도. 서로 다를 것 없는 사회의 약자이지 않았을까.


사회적 약자가 되어,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성육신했다고 기독교인들은 믿는다. 창녀와 함께하고, 세리와 함께한 예수의 진리를 교회가 대신하겠다고 나섰다. 진리가 사두개인에게는 정치권력이었으며, 바리새인에게는 토라였다. 대신, 한국 교회는 성서를 해석해주고, 간음한 여인처럼 짓밟히지 않도록 카르텔을 형성했다.


지금도 쏟아지는 목회자 범죄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이유는, 그 카르텔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은혜로 해석한 율법을 지키면 된다고 가르친다. 십일조도 내고, 기도 생활도 하고. “하, 오늘도 1시간은 기도해야 하는데” 또 다른 율법을 만들어내고 그 율법을 개정한다.


있는 그대로의 성서, 국어사전에도 없는 ‘원래적’ 해석에 눈이 멀어, 간음한 여인이란 행간 속에 숨어 있는 집단적 폭력을 알아보지 못한 채 고민한다. ‘그 여인은 과연 돌아가서도 창녀 짓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