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인연의 친구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된지도 5년이 됐다. 허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조짐을 느꼈다. 친구는 전기 기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힘들게 말이다. 오래도록 고개를 숙이며 살아온 하세월을 탓했다. 물리치료를 병행하던 그에게 “내가 도와줄 테니 돈 걱정은 말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연락처를 바꾸고 돌연 잠적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메일을 보내도 그는 답이 없었다.
친구에 대한 첫 기억은 미래를 건실하게 준비하던 고등학생 남자아이였다. 공책 한 면에는 서울대학교에서부터 지방대학에 이르기까지 로고가 서열로 매겨져 있었다. 녀석은 제일 위에 있는 로고를 가리켰지만 눈길은 서성한 정도에 머물렀다. 허나 수업에는 늘 착실하고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시험기간, 도서관에 앉아 저녁이 될 때까지 공부하는 평범한 녀석이었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남자 아이들 특유의 너스레와 허세는 녀석을 ‘콜로세움’으로 몰아 붙였다.
콜로세움은 그들 말로는 일종의 놀이였다. 싫어도 싸워야 하는, 관중이 원하면 언제든 선수가 되어 주먹을 날려야 하는 철부지들의 그것이었다. 녀석은 반 아이들을 생각해 일부러 선수로 나서곤 했다. 부르면 불려가는 그런 삶을 산 것이다. 아이들은 녀석이 원해서 선수에 나섰고, 그저 즐겼을 뿐이라고 지껄였다. 나는 몰래 담임에게 연락했다. 콜로세움을 막아달라고 SOS를 보낸 것이다. 교무실에 찾아가기도 했고, 문자로 한 문장만 보내기도 했고, 어쩔 땐 전화만 하다가 뚝 끊기도 하며 신호를 보내었다. 말할 수 없는 폭력에 실장까지도 가담했으니,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구조적 폭력이었다.
친구가 연락을 끊기 전 콜로세움을 다시 거론했다. 어렵고 힘들게 말이다. 지금도 그 고백이 생생하다. ‘내가 그들의 개가 되는 기분.’ 녀석은 눈물을 흘렸다. 자발적이지 않은 자발적 폭력에 자신을 욱여넣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었다. 허리디스크라는 하세월의 무게까지 견뎌야 했으니, 그의 대침묵은 어쩌면 예정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사라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필 여자친구와 맥모닝을 먹던 토요일 아침, 가장 잘 지내던 어느 날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팬데믹과 함께 휩쓸린
보고픈 녀석의 얼굴이
잘 먹고 잘 사는 이때
그저 생각나 보고 잡다
16일 통계청은 지난달 15~29세 청년 중 실업자 26만9000명을 발표했다. ‘쉬었음’ 인구 50만명과 취업준비자 31만명 취업을 위한 학원 기관 통학자 11만명까지 포함하면 120만명의 청년 백수를 가늠할 수 있다.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도 네 명 중 한 명은 단기 근로자로 나타났다. 지난해 11월 한국은행 경제전망보고서는 쉬었음 인구가 “최근 나타난 쉬었음 증가는 취업 경험이 있는 청년층이 주도하고 있다”며 “60세 이상과 35~59세 핵심 연령층의 쉬었음 비중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청년층 쉬었음 비중은 팬데믹 이후 올해 초부터 다시 큰 폭으로 상승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행은 고용의 질이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했다.

구약성서 신명기(申命記)에는 신 야훼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 있다. 오경의 마지막 권인 신명기는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의 덤덤한 여정을 다룬다. 그 여정으로 향하는 길목에 신은 경고한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거기에서 속량하여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신명24,18) 이어 야훼 하느님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걸 가지러 되돌아가지 말라고 한다.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기 때문이다.(20)
연락이 끊기기 1년 전 우리는 머리를 맞대어야 했다. 전공을 살려야 할지, 당장 취업을 위해 전공을 버려야 할지를 두고 고민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5년 존버’를 기약했다. 어디에 가든 5년은 버티자고 말이다. 그때 이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언제까지나 철없이 근거 없는 이상과 가치 없는 이데올로기에 머물지 않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5년 존버’를 언급했다. ‘존나게 버틴다’는 속어임에도 지금의 청년들이 자조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했다. (……) ‘5년을 버티다보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리라 분명히 믿는다’고 독려했다.”
녀석의 허리는 다 나았을까. 녀석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내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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