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2학년, 선생님이 쓰라던 날에만 꾸준히 쓰던 일기를 8년 전부터는 매일 컴퓨터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기를 달리 부르고 있습니다. 바로 ‘감회록’으로요. 일기의 확장판인데 감회가 새롭다는 의미에서의 그 감회가 맞습니다. 감회록은 사실을 나열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감정과 사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감회록을 읽다 보면, 단순하고 건조한 기억의 모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몸으로, 손가락을 통해 기록을 담는 이 일을 매일 해왔습니다. 물론 쓰지 않는 ‘기록 없음’의 날도 있습니다. 밀릴 때도 많았고요.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멈춘 건 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감회록 집필도 잠시 멈추었는데요. 여자친구와 사는 동안에는 잠시 감회록 쓰기를 멈추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의 집과 달리 여자친구네는 글을 쓰기 쉬운 공간이 아닙니다. 양반다리로 앉아 맥북으로 글을 집필해야 하는데, 그게 꽤 귀찮고 힘든 일이더군요. 게다가 저 혼자 사는 것도 아니라, 여자친구와 함께 지내는 삶이라 굳이 기록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여자친구와 무엇을 했는지, 어디를 갔는지 정도만 간략히 적기로 했죠.
오랜 시간 기록을 한 제 입장에서는 강박증처럼 남은 집필을 멈추니, 세상이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의도적으로 ‘행복하다’고 쓰던 감회록을 쓰질 않으니 행복해져야 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대신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보며 사진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되뇔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감회록을 집필할 때마다 저의 감정과 사건을 뒤쫓아 가기 바빴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는 데에서 짐을 놓는 기분이었습니다.
감회록 쓰기를 멈추자 저는 교훈 하나를 얻었습니다. 바로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기억보다 문자가 우선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온몸으로 여자친구와의 행복과 감성, 기억을 느끼며 지각하는 삶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문자로도 담아낼 수 없는 감성은 이미 기억을 통해 감각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들 쓰는 일에 긍정적인 요소를 부각하며 열심히 쓰기 활동을 강조하는 경우를 봅니다. 네, 그렇죠. 쓰는 일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쓰지 않고 온몸으로 삶을 지각하고 경험하며 기억하는 활동이 필요합니다. 길든 짧든 아픔으로, 상처로 가득한 상황에서는 그 무엇도 이야기가 될 수 없겠죠. 그런 쉼의 시간을 통해 상처가 아물어갈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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