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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인류의 마음 박물관] 라디오에서 들려온 ‘세상:소음’, 어른이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인걸

신은빈 작가 2024. 11. 20. 19:00

 

“밥은 챙겨 먹을 수 있겠어?”

“나 열여덟이야. 어른 면허증 취득해야지.”

정부는 ‘어른 면허증’을 도입했다. 사람마다 어른이 되는 속도는 다른데 모두 20살에 어른의 책임감을 갖는 건 불합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기점으로 사춘기 소녀가 어른이 되는 경우도 생겼고, 반대로 50살이 넘어서도 아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권력자들의 상당수는 아이가 되었다. 이제 이들은 권력은커녕 어른 면허증을 따기 급급한 처지가 되었다. 면허증의 요건이 수록된 어른 사전이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나는 여름비를 배경 삼아 어른 사전의 책장을 넘겼다. “어른에게 필수적인 자질은…. 하암.” 하루 종일 사전만 괴고 있자니 눈이 절로 감겨왔다. 수면제가 아주 따로 없었다. 그럴 때마다 탁상시계를 노려보며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무엇보다 내일 난 어른 면허증을 꼭 따야 했다. 동료의 모함으로 회사를 퇴사하게 됐기 때문이다. 낱장이 된 달력은 어느새 월세 기한을 선명히 가리켰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난 어른이 돼야 하니까. 어른은 삶을 책임져야 하니까.


“괜찮아. 이것도 스쳐 지나갈 소나기일 뿐이야. 어른 면허증만 따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연신 중얼거렸다. 간절한 주문처럼.


***


눈이 기어코 졸음에 승복했나 보다. 눈을 떠보니 시계는 어느새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그새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내일 시험인데도 불구하고 꾸벅꾸벅 조는 나를 책망하는 소리 같았다. 아니면 창틈으로 빗물이 새어 바지가 젖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나에게 내리는 벌일까. 저렴한 월세방이라 노후된 창문이 위태로워 보이긴 했지만 바닥까지 흠뻑 적실 줄은 몰랐다. 화들짝 놀라 창 틈새를 청 테이프로 간신히 막고 헌 옷으로 급히 바닥을 닦았다. 


“세상에, 집이 이 모양 이 꼴이 될 때까지 곤히 잔 내가 대단하다.”


헌 옷을 폐의류가 될 때까지 바닥을 박박 닦을 때쯤 집은 제 모양을 찾아갔다. 그래도 찝찝한 건 매한가지라 바닥에 침구를 깔고 누웠다. 그제야 한숨이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밤 11시 30분을 가리킨 시계는 날 원망 섞인 눈으로 다그쳤다. 


“그래, 넌 항상 이런 식이었어. 책임감부터 부족한테 어른 면허증을 딸 수 있겠어?”


“맞아, 네가 어른이 되는 건 한낱 백일몽일 뿐이야. 포기하는 게 빠를걸.”


절망은 그을린 잿더미의 가루로 피어올라 내 시야를 가렸다. 급히 못다 읽은 어른 사전을 집었다. 그러나 글씨는 가루비처럼 빗나가기만 했다. 큰일이다. 내 상태를 보니 내일 시험을 종칠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책과 씨름하길 1시간째. 난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라도 푹 자둬야 또렷한 정신으로 시험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지금까지 외워온 것만이라도 잘 쓰자.”


눈을 감자 어둠이 밀려왔다. 무수한 양들이 암흑 속에서 춤을 추었다. 자신을 다 헤아리기 전까진 잠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파도와 바다가 둘이 아니듯, 두려움은 날 붙들고 잠 못 들게 했다. 급한 마음에 양을 한 마리, 두 마리 세 보았지만, 셀수록 양이 더 불어나는 건 왜일까. 심장을 두른 얇은 실을 잡아당기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얇은 실이 심장을 더 지탱하기 힘들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귓가에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용 라디오 소리였다. 두려움에 손을 휘젓다 전원 버튼을 잘못 건드렸나 보다. 어둠 속에서 라디오를 끄려고 손을 뻗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서하의 라디오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다들 감정의 강둑이 메말라 버린 지 오래되셨죠? 눈물조차 날 틈이 없는 삶.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제가 노래 한 곡을 가져왔는데요. 바로 리도어의 ‘세상:소음’입니다. 노래를 듣고 마음껏 울어도 됩니다. 대신 아프지만 않으면 돼요.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따스함으로 가득찼으면 좋겠습니다.]


어렸을 적, 할머니와 즐겨 들었던 라디오였다. 인사도 없이 떠난 할머니. 타계하신 후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던 내게 한동안 그 빈자리를 채워준 서하의 라디오. 노래는 화음이 되어 추억 속을 함께 거닐었다. 부서질 추억을 걷듯 아주 조심스럽게. 눈물샘을 건드리면 쌓아둔 수많은 추억들이 일그러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걸음걸이였다. 


“울면 추억이 상할 텐데…. ”


그 순간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방은 회색빛 회한으로 가득 찼다. 처량한 눈물만이 선명한 색을 띠며 날 비웃었다. 사랑을 주면 불시에 떠나는 사람들, 저울 속에서 끊임없이 심판하는 사람들, 꿈에서도 이어지는 악몽, 그리고 동화되는 나. 그런 내게 내일을 기대하는 건 갈수록 멀어지는 꿈이 되었다. 베개를 양손으로 꼭 끌어안았다. 잃어버린 별을 찾듯.

 

 

갑작스러운 퇴사와
다가오는 월셋날⋯
‘꼭 어른이 되어야 해’


절망스러운 건
말없이 감기는 눈꺼풀
그저 초침은 째깍째깍


그러나 날 살린 ‘세상:소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잿빛 회한의 멜로디에
밤새 별을 찾아 거닐고


사실, 사회의 틀일 뿐
어른들의 거짓된 인생
떨리는 그들의 눈동자
비로소 깨진 나의 환상

 


***


아픔을 짊어져도 삶은 계속됐다.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어른의 매니저가 되었다. 기대와는 달리 어른들은 거짓된 삶을 살고 있었다. 넋을 놓고 있을 때마다 그들의 눈동자는 끔찍한 환상을 그려내고 있는 듯 두서없이 진동했다. 자신이 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걸까. 그때 깨달았다. 


‘진정한 어른’이란 사실 사회가 규격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그럼 난 어른이 되는 대신 내가 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