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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정의할 수 없는 사과… “미안해” 외마디에 담긴 의미:『완벽한 사과는 없다』

자유의새노래 2024. 3. 25. 11:52

 

"미안해" 한마디를 내뱉기까지 걸리는 물리적 시간은 가히 손바닥으로 새겨도 다 새기지 못할 것이다. 힘겹게 고백한 지민의 사과에 피해자 리하는 말한다. "용서할 게."

 

완벽한 사과는 없다
김혜진 지음 | 뜨인돌출판사 | 168쪽 | 1만1100원

 

리하에게 진실을 말하기엔 늦어버렸다. 리하의 인생을 박살낸 신지호가 내 친구라는 사실을 말하기엔 너무도 늦어버린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지호가 사라졌다. 이름 모를 고등학생이 죽었다고 한다. 지호의 이유 모를 강제 전학이 연이어 벌어졌다.

주인공 지민은 지호와 어려서부터 친했다.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를 보면서 마치 지민은 지미니 크리켓, 지호는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굴었다. 지미니 크리켓이 피노키오의 양심인 것처럼 지민이도 지호에게 그런 존재였다. “네가 내 양심이야.” 도대체 지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이스크림 하나, 맥스봉 만치 친절한 정다온
같은 학원을 다니는 다온이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맥스봉 정도만 한 친절. 거절하기엔 애매하고 받기에는 머쓱한 미소를 들이밀고 보는 녀석이다. 지민에게도 그랬다. 가깝지는 않은데 아주 모르는 건 아닌 녀석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처음엔 지민이는 퉁명스럽게 대했다. 이내 경계심은 풀렸다. 편의점 사건 때문이다.

편의점에서 모르는 여자애들이 지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발끈한 지민이가 한 마디 거들었다. “틀린 말을 하고 있잖아. 강요하고 그런 일은 없었어. 그건 사고였다고.”(21,16) 그러니까 지호가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다 착한 고등학생 선배 엿 먹이려고 보드 한 번 타라 독촉했다가 죽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거짓말이라는 해명이었다.

이후로 다온이는 지민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 정다온 본인이 하고픈 말을 대신 해줘서 고맙다는 얘길 꺼냈다. 다온이도 지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온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특히 재희가 그랬다. 다온과 사귄 적 있는 재희가 자존심 부리기 시작했다. 다온이가 어장쳤다는 이유로 못 살게 군 것이다. 지민의 마음에서 양심이 발동했다. 학원을 나오지 않기 시작한 다온에게 프린트를 챙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다온과 가까워졌다. 문득 다온이는 옹벽 위쪽 아파트 텃밭(53)을 가리켰다.

◇언덕 위의 세계 밖의 텃밭 안의 세계에 사는 우리하
다온이와 둘이서 도착한 텃밭엔 아무도 없었다. 밭주인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우리하. 지호가 가해자였던 그 사건에서, 피해자였던 그 아이.(57,8)

지민이는 혼란스러웠다. 편의점에서 변호를 한 건 지호였는데 다온이는 죽은 고등학교 선배를 말하고 있었다. 더구나 피해자로 알려진 우리하는 소문으로만 듣던 인물이었다. 리하 역시 소문에 못 이겨 전학을 갔고, 견디지 못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후문만이 무성했다.

리하는 아무렇지 않게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다온이도 텃밭에 토템을 세워 만들고 있었다. 언덕 위의 세계 바깥에는 텃밭 안의 세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지민은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기엔 피해자 리하는 아무렇지 않게 사는 듯했고 덮어 놓고 지내기엔 양심에 거리끼는 상황을 맞닥뜨렸다.

‘말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64,8)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기말고사 수행평가가 다가왔다. 지민의 마음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아른거렸다. 지민에게는 논리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따위의 말장난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행동의 문제’(65,6)였다. 사회 선생은 궤변이나 늘어놓는 것 같았다. “답이 없으니까 매번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걸 알기 위해서 배우는 거지. 사람의 일이란 게, 기계적으로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65,13)

세상은 수행평가 몇 장으로 늘여 놓을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도, 누군가의 세상도 그랬다. 리하가 텃밭을 가꾸는 동안 지민은 리하와 다온을 관찰했다.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은 다온도 나름의 고민과 아픔이 선명했다. 누가 봐도 엄친아 이미지를 풍겨도 엄한 부모 아래 산다는 건 쉬운 삶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해였다고, 리하를 괴롭힌 사람이 지호였다는 말을 차마 꺼내기엔 너무도 늦어버린 것 같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학교 폭력
그리고 사라진 절친 신지호


어느날 갑자기 친해진 소년들
지호 감싸다 가까워진 다온
텃밭에서 만난 피해자 리하
진실 앞에서 고민하는 지민


한여름 밀도 높은 관계
용서에 필요한 물리적 거리
아물 듯하면서 여전한 상처
기어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불완전한 인간 존재를 본
텃밭에서의 ‘응축된 시간’

 


◇용서하기까지의 밀도 높은 시간 속에서
작가 김혜진은 책을 통해 밀도 높은 관계와 응축된 시간을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표현한다. 지민이가 다온이와 리하에게 느꼈을 불편한 감정, 이를 테면 지호와의 관계를 솔직히 말했을 때 리하가 받을 상처와 다온이가 겪을 충격을 고려해 말 한 마디 조심하려는 모습과 태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지민은 거짓이란 장막을 거두고 리하에게 진실을 말한다. 머지 않아 다온이와 리하 역시 가면을 벗으면서 서로 숨기던 걸 드러낸다.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리하는 지민이를 피하지 않았다. 지민은 텃밭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오해와 억측으로 둘러 쌓여도 다온, 리하와 함께 지내며 충분히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밀도 높은 관계를 깨닫는다. 밀도 높은 관계는 결코 수행평가 몇 장으로 축약 가능한 가벼운 시간이 아니었다.


인간은 오감만으로는 또렷하게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다. 다온이가 그랬다. 겉으로 볼 땐 완벽한 소년으로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부모의 압박과 자괴감, 자책하는 태도는 자신을 신포도로 여기게 만들었다.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학교 폭력을 당해 자퇴한 리하도 다온과 지민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아픈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지민이가 리하에게 진실을 말하기까지 필요했던 시간과 리하가 지민이를 용서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축약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응축된 시간이다. 리하가 마음을 추스리고 텃밭이란 익숙한 공간을, 서울이란 낯선 세계를 벗어나기까지 기나긴 과정을 필요로 했다. 지민은 완벽한 사과, 깔끔한 용서란 있을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사과와 용서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이해하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불가능한 용서
이 책이 용서에 필요한 물리적 거리를 되짚으면서 의문이 들었다.

만일 그 거리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아픔이라면 용서란 가능할까.

자신의 자아를 실패작 토템에게 투영한 다온, 텃밭의 세계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은둔의 리하, 섬세하고 예민해서 신경증처럼 자신에게 눈치 보이는 지민. 이들은 아픔을 겪었지만 살아가는 이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무력하지 않다.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 가늘지만 질긴, 쉽게 구부러지지만 부서지지는 않을, 지팡이처럼 디딜 수 있는 문장이었다’(93,3)

용서하기까지 걸리는 응축된 시간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진 않을 테지만. 도망가지 않고 피하지 않으며 아픔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밀도 높은 관계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늘 자신을 받아들이며.

‘나는 귀뚜라미도, 양심도 아니다. 나는 그냥 사람이다.’(1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