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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흔전동 재개발 구역에서 들려오는 네 울음 소리:『구달』

구달
최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64쪽 | 1만1500원

 

달빛이 비치는 재개발 구역으로 묘사하기 위해 이름을 구달로 정한 게 아니었을까.(246,1) 노란색 구달의 달빛으로 물드는 표지를 쓸어내렸다. 듣고 싶지만 들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듣고 싶어 귀 기울이는 달이를 상상하며 한 페이지 넘겼다.

 

언제부턴가 달이는 알 수 없는 소릴 듣게 됐다. 365마트 할머니 손자 강문이의 흔들리는 치아 소리(39,2)에서 걸어가던 여자 구두 굽 또각 소리(42,2)까지. 재개발 앞둔 골목이라 들릴 만한 소리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방에서 훌쩍이는 재현이의 울음소리를 달이의 방안, 눕다 보면 견디지 못할 순간이 다가온다. “그러나 자고 일어난 아침은 모든 감정이 민낯 그대로다. 무방비 상태로 솟아오른 욕망과 생각들…… 그 속에서 흐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슬픈 거다. 가끔씩 재현이가 그랬다.”(12,1) 달이는 방안에서 흔전동 모든 소리를 들었다. 소리에 담긴 인간의 감정과 욕망까지 샅샅이 듣는다. 달이는 ‘소리풍경’으로 부른다.

 

흔전동 재개발 구역에서 벌어진 열일곱 구달의 이야기다.

 

◇돈 없는 여고생 구달에서 MS미스터리협회 요원 구달까지

달이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한 달 5만원 차비 낼 돈 없었다. 아빠 구종대까지 사라졌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이따금 사라질 때마다 얼마 정돈 놔두고 떠났건만 떨어진 생활비에 간헐적 단식이란 명목으로 굶어야 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엊그제 받은 명함이 생각났다. MS미스터리협회 마블힐지국 서울출장소 소장 공직구 아래에 쓰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 공직구는 달이에게 이상한 말을 전했다. 달이가 감염자라는 사실. 따라서 감염 사실과 관련한 정보를 전달하면, 다시 말해 MS미스터리협회 마블힐지국 요원으로 활동하면 보수를 주겠다고 속삭였다. 달이도 자기 몸이 이상해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정보인데 그걸 마블힐지국인지 뭔지 공직구라는 인간이 알고 있었다. 달이의 가청능력은 비정상적으로 뛰어났다.

 

처음엔 환청이라 생각했다. 병원은 스트레스 이명으로 진단했다. 3차 의료기관까지 갔으나 밝혀진 건 없었다. 더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신경정신적 문제로만 치부한 탓이다. 구두 굽 소리인 줄 알고 쫓아가 보면 정확히 구두 굽 소리였다. 가본 적 없는 흔전고시텔 1층 남자화장실 형광등 소리까지 맞히는 자신을 보면서 결코 환청이나 이명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런데 공직구는 감염된 증상이라고 설명했다.

 

 

고요한 재개발 구역 흔전동

보이는 것으로 뒤덮인 사회

도무지 들려오지 않는구나

네 목소리, 네 앓는 소리가

 

요원 구달이 듣는다

MS미스터리협회 요원 구달

생체 실험 파헤치며 구한다

달이와 연결된 모든 이들을

 

 

◇흔전동 누비며 생체 실험의 실체를 밝히려는 달

놀라운 건 이뿐이다. 달이가 어느 병원을 갔고 아버지가 언제 사라졌는지는 달이 중심으로 관찰만 하면 알기 쉬운 정보였다. 캇팅 철거 개업 축하 무지개떡 받아먹은 사실에서 바이러스 생체 실험 정황을 찾기란 어려웠다. 달이는 공직구가 미심쩍었다. 흔전동 생체 실험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고작 무지개떡 받아 먹은 사실에서 생체 실험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꼴이 어이없었다.

 

요원 활동을 중단할 수 없었다. 몸의 반응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데시벨을 초월해 저 먼 데까지도 소리풍경으로 보일 지경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오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생체 실험에는 그동안 아끼던 남사친 한승율도 엮여 있었다. 더는 돈벌이로 보이지 않았다. 감염자들은 숙주화 과정을 거친 후 기생체와 분리된다. 분리되는 과정에서 감염자는 큰 손상을 입는다. 죽을 수도 있기에 기생체를 안전하게 분리해야 했다. 때마침 두 번째 감염자 홍세라 할머니가 쓰러졌다.

 

의사가 필요했다. 그냥 의사가 아니라 흔전동 사람들을 잘 알며 연구된 바 없는 기생체를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 보름내과 정만기 씨 말이다. 요원으로서 관찰, 정보 수집, 보고까지 수행하려면 동료들이 필요했다. 이웃으로 함께 지낸 은혜점집 보살 아주머니와 온돌교회 박 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입 요원 구달을 서포트 하듯 공직구도 흔전동 바닥을 누비며 수사한다. MS미스터리협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방관자와 가해자는 한 끗 차(220,2)” 죽어가는 감염자를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막다른 흔전동, 또 다른 구달

이 소설은 보이는 가치로 뒤덮인 현대 사회의 앓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듣는 가치가 사라졌다. 만들어진 친절이 돈의 논리를 통해 가면으로 무장한다. 가려진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밤이 되면 짜릿한 돈과의 사랑 속에서 홀로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의 울음 소리가 가리워진다.

 

없어질, 가치 잃은 동네 흔전동 전역을 비추던 이름의 구달은 소외되고 낙후된 동네 사람들 이름을 입술에 담는다. 한 사람 한승율, 또 한 사람 이재현, 소리풍경 속에서 지워질 소음들 하나하나 관찰하듯 귀 기울인다. 먼저 듣고 후에 찾아가 두 눈으로 확인하는 달이의 소리풍경 방식이 낯설다. 좋아하는 아이에게 손편지 접으려던 부스럭거리는 설레는 소리가 사실은 아파서 움크리다 겨우 펴낸 할머니의 약봉지임을 알던 장면에서 작가의 문제의식을 느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학교 잃은 여고생 구달처럼 방황한다. 문제는 쌓였지만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풀어내지 못한다. 상처받은 현대인은 서로의 상처조차 쳐다보기 힘겨워 고른 숨을 뱉어낸다. 스스로 아픈 몸을 감추고 가면 쓰고서 외면하는 모습이 흔전동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 타자의 비명이 들리지 않으니 얼굴들이 보일 리 없다. 철저히 분리되어 홀로 남은 현대인처럼 흔전동 사람들도 하나 둘 흩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바이러스 생체 실험에 이용되어 버려진다. 철저히 외면하고 외면받는 흔전동 사회가 우리의 분위기와 무엇이 다른지를 묻는다.

 

◇달의 시선으로 발견한 틈

세 번째 감염자 여교사 최주아의 가슴팍 상처를 표의문자로 해독하던 달의 시선은 ‘틈’을 말한다. 달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집고 들어가 두 눈으로 보았다. 구달을 따라 다니며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다짐했다. 방관자가 되지 않는 방법은 단순하다. 소리를 듣는 일이다. 너의 속삭이는 소리. 너의 앓는 소리. 너의 우는 소리. 너의 사소한 모든 소리에 집중하는 일.

 

시간이 없다. 집중해야 한다. 이대로 사라질, 없어져도 무방한 흔전동 계단에서 헤맸다간 달이가 아끼던 승율이도 공직구가 좋아하던 주아 씨도, 모두 잃어버릴지 모른다. 아파하는 모든 이들에게 달이 비친다. 이제 내가 소리풍경에 집중할 차례다. 아파하는 모든 이들에게 비치는 구달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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