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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겨울의서원 지키려 숨 죽여 기다려 온 산바:『멧돼지가 살던 별』

멧돼지가 살던 별
김선정 지음 | 문학동네 | 184쪽 | 1만1500원

 

 

한순간 져버린 열여덟 生

국가적 폭력이 빚어 만든

비참히 남은 마음의 상흔

그리고 말없이 떠난 악인

 

 폭력성 주의   잔인한 아버지의 폭력에 눈을 감고 싶었다. 도무지 읽기 어려웠다. 이빨이 딱딱 거리는(33,5) 소녀 유림에게 가감 없이 주먹질 해대는 인간에게 그보다 더한 멍자국을 내주고 싶었다. 힘을 가진 아버지는 힘없는 딸을 내치고 이용해 먹으며 내쳐버린다. 용서하기 힘들었다. 죽이고 싶었다. 불편한 감정은 충동에서 그쳐야 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기에 몸은 상흔 자체를 외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같은 방식으로 오래도록 외면했던 10년 전 열여덟 살 소년이 떠올랐다.

 

 스포일러 주의   이 소설은 아버지에게 정신 신체적 폭력을 당하는 열다섯 소녀 홍유림이 전철역에서 멧돼지와 마주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선로에 선 멧돼지를 향해 “그러다 죽어.” “죽는다니까.”(8-9) 속삭인다. 열다섯 소녀는 피멍 든 채 가냘프게 역사(驛舍)에 서 있었을 뿐이다. 나지막한 말들이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학교로 가 물건만 챙겨서 돌아오라 명령했다. 유림은 왜, 무슨 이유로 갑자기 사라진 아이가 되어야 했을까.

 

◇그 남자, 홍기수

열다섯 소녀 홍유림을 무참히 때린 홍기수도 어렸을 적 자기 아버지에게 폭행 당해왔다. 단 한 번. 유리병으로 가격하자 아버지는 시신이 되었다. 10년 동안 맞으면서도 단 한 번 죽지 않은 어머니와 홍기수였지만. 아버지는 홍기수의 깨진 유리병으로 단번에 죽고 만 것이다. 어머니는 벙어리가 되어 아들을 변호할 증언조차 하지 못했고 홍기수는 쓸쓸히 감옥에서 썩어갔다.

 

누군가 홍기수에게 다가왔다. “비록 한순간의 실수로 잘못된 인생을 접어들었지만 너희는 이제 국가의 부름을 받은 몸이다…… 너희가 가게 될 곳에는 우리나라를 무너뜨리고 적을 이롭게 하려고 했던 폭도들이 있다. 그놈들을 단단히 정신 개조해서 새 나라의 일꾼으로 만드는 것이 국가의 목표다.”(95,2) 홍기수는 완장 차고 새 사람이 되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한다. 그 일이란 폭도들을 향한 정신개조를 의미했다.

 

◇열여덟, 류화신

불온한 책 한 권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류화신과 화신의 아버지는 정신개조를 명목으로 끌려가 맞고 또 맞았다. 명심보감을 쓰게 하고 검사 받게 하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가격했다. 화신은 아버지와 조 배정 받는 상황에서 눈인사와 함께 헤어지곤 다시는 보지 못했다. 화신을 괴롭힌 남자는 젊은 시절의 홍기수였다.

 

어른이 된 이후 화신은 잊고 살았다. 어느 날 작은 공간 ‘겨울의서원’에 발 디딘 건조한 얼굴의 유림을(38,1) 만나기 전까지. 유림이 보여준 명심보감 문구에서 믿을 수 없는, 믿기 싫은 사실과 마주쳐야 했다. 열다섯 유림에게 피멍 내던 그 남자 홍기수와 열여덟살 류화신을 발견한 것이다. 충격 속에 화신은 “겉옷도 걸치지 않고 급하게 나가버렸다.”(43,1) 화신의 시간은 여전히 열여덟에 멈춰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홍기수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홍기수는 나이를 먹었고 아이까지 데리고 있었다.(79,4)

 

◇참혹한 아픔을 뒤로하고 악착같이 밥을 먹는다

한 시대가 끝나고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시대의 끝에 선 인간이 죽었다. ‘끝나지 않은 참혹한 아픔 끝까지 사죄 없이’(2021.11.24 한겨레) 떠난 것이다. 자기 딸 홍유림을 무참히 폭행한 아버지 홍기수는 그 시대를 살아갔고 나이가 들어 어엿한 사회 일원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도 나쁜 버릇은 바뀌지 않았다. 명심보감 따라 쓰게 만들었고 가사노동을 명령한다. 자기 딸 열다섯 소녀에게 시켰다고 보기에 믿기 힘든 일들을 던져 놓고 이행하지 않으면 마구잡이로 때린다. 이빨이 딱딱 거렸다고 말했다. 고통 속에 떨어보지 않은 자라면 모를 것이다. 그래서 한 장 읽어 내려가기가 힘겨웠다.

 

아버지 잃은 화신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남았다. 살아남아도 지옥인 화신과 남겨진 이들은 악착같이 밥을 먹는다. 마흔이 넘은 화신이 주호를 만났다. 주호는 ‘피폐’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았다. 친구들은 섬을 벗어나 중학교에 가지만, 주호 자신 만큼은 할머니를 돌보느라 피폐해져 간 중학생 남자아이를 떠올리며 열다섯 유림을 생각했다. “‘피폐’가 사람이라면 아마 그 여자애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29,4)

 

악착같이 밥을 먹었다(177,2)는 말의 의미는 온몸에 강타하던 폭력의 파고에도 견디며 폭력이란 핏물에도 물들지 않은 삶을 의미했다. 폭력의 시대가 끝이 나고, 나이를 먹었음에도 화신은 국가의 폭력에 물들지 않았고 사회에서 버려진 소년 주호를 건져낸다. 오롯이 개인의 아픔, 개인의 짐으로 남은 사회적 산물을 감내하며 악착같이 밥을 먹는다.

 

◇멧돼지 산바의 단죄

마지막 한 장 넘기는 순간까지 멧돼지 산바는 누구였을까를 물었다. 멧돼지를 소설 세계 안에다 배치한 의도가 무엇이었을지도. 작가 김선정이 설명한다. “다른 세계의 존재를 끌어들여서라도 뭔가 다른 결말을 내 보고 싶었다.”(182,2) 지금도 정치는 현대인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 시대의 산물은 파편화 된 폭력으로 나타나 상흔으로 남는다. 노동을 천시하고 과거를 집착하게 만들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얼굴들, 짙게 내린 음지의 그림자로 약한 이들을 덮친다. 따라서 멧돼지 산바가 홍기수를 물어뜯던 이미지만으로는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숲 속을 내달리기 전, 산바의 속삭임만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오늘이 기다렸던 그날인가. 어젯밤 그렇게 속이 시원했던 것이 다 오늘 때문이었나.’(162,2)

 

산바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일까. 고통의 시대를 단죄하지 못한 그간의 답답함이 풀렸다. 어젯밤 주호는 말했다. 기지개 펴고서 그놈 오기만을 기다리던 산바에게. 겨울의서원을 지켜내기 위해 긴 밤 지새우던 산바에게. 주호는 모든 말들을 토설한다.(174,1) 무슨 말을 했을까. 원한이었을까. 분노였을까. 기쁨이었을까. 보고싶다는 애틋함이었을까. 산바는 슬픔과 고통, 원한과 분노를 안은 채 홍기수에게 돌진한다. 모든 시간을 뒤집어쓰고서 육고기를 씹고 뜯은 멧돼지가 폭력의 시대를 온몸으로 단죄한다.

 

◇가슴 한 편 북받치는 자유의새노래 부르며

겨울의서원은 이듬해 따뜻한 바람과 함께 이름을 바꾼다. ‘봄의 서원’으로. 다시금 새로운 계절이 불어온다. 화신은 유림을 보면서 생각한다. “너희들은 어땠을까. 너희들은 지금 어떤 열여섯, 열아홉이 되었을까.”(178,7) 무엇이 되었든, 어떻게 되었든 화신은 절망조차 끌어안는다. “그래도 너희는 살 거야. 살아야 하고.”(178,11)

 

주호는 여행을 떠나서도 산바와 함께한 마지막 밤을 기억했다. 화신은 어머니가 차려주듯 유림에게도 냉잇국과 계란말이를 준비했다. 노래조차 부를 수 없었던 그 시대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이들이 보여준 오늘의 일상을 읽어 내려가며 눈물을 참아야 했다.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쳇바퀴 돌 듯 쉼없이 반복될 테지만. 화신과 유림, 주호는 온전히, 온몸으로 지금을 살아낸다.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고 지도원이 한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한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왜 아름다운 멜로디가 넘실거리는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까?’(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평단, 24-25; 본문 169-170) 화신을 망가뜨린 이 책은 불온했다. 이유를 물어보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화신과 유림은 콧노래를 부른다. 연속되는 노래, 자유의 새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노래를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에 담는다. 10년 전 열여덟 소년에게 발송하는 편지와 함께.

 

‘아름다운 멜로디가 넘실대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