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의 편의점 레시피
범유진 지음 | 탐 | 192쪽 | 1만1000원
존댓말하는 어른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반말이 아니라 존댓말로 어린 사람 대한다는 건 한 가지 전제를 담는다.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를 인간으로서 바라본다는 점. 그런 어른에게는 상하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월하고 열등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모자란 부분을 알기에 가르치지 않는다.
어른들은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한다. 꼭 주먹을 사용하지 않아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폭력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권위에 호소하면 사람들은 알아서 움직인다. 나약한 이들은 겁 먹고 주먹쥔 호통에 쉽게 따른다. 일일이 고민하지 않아서 편하다. 문제에는 해답이 있고 해답을 찾아가는 지루하고 어색한 갈림길의 연속이지만 쉬운 길을 찾다보니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에 길들일 구조를 만드는 방법도 편리함을 추구하는 어른들의 산물이다.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거라는 편견만 던져주면, 사람들은 알아서 기어 다닌다. 그 나이엔 그렇게 살아야 하고, 저 나이엔 저렇게 살아야 하고. 메이플스토리 스킬 트리가 따로 없다.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방법 터득하며 사는 것이거늘, 누가 대신 살아주기라도 하듯 인생 테크트리 벗어나면 ‘망한 인생’이라도 된 것처럼 후회한다. 편리함을 추구하던 어른들이 만들어낸 구조에 물든 아이들은 어른들의 폭력적 문법에 물든다. 똑같이 나이 먹고 게으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폭력적 문법 속에 열심히 살아가니 누구보다 자신은 공정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인간들은 이렇듯 자의식이 비대하다. ‘아 나는 멋있어!’ ‘아 나는 대단해!’ ‘아! 이 정도 인생이면 훌륭하지’ 그래서 반말 섞어가며 가르쳐댄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관심도 없는데 다가와 가르친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체 하는, 아는 듯한 얼굴을 가진 몸만 어른인 인간들도 얼마나 많은지. 끓여 온 라면을 자기 딸 앞에서 던져버리고 “집 나가”라 말하는 주인공 루다의 아버지나, 칸트의 발치도 못 따라가면서 규칙이나 지껄이는 학부 선생이나. 몸만 어른이고 생각은 아직도 사춘기 소년에 머문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루다였어도 그런 지랄 맞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재개발 구역의 아름편의점(31,7)은 폭력적인 일상과 거리가 멀다. 편견도 존재하지 않는다. 낯선 아름시장 골목 누비다 발견한 편의점엔 할아버지만이 있었다. 일할 데라도 찾아야 하는데, 아르바이트 자리를 권유했다. 어른들은 학생이 바코드 하나 찍는 걸 유난스레 생각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달랐다. “나는 포스기 작동하는 법을 통 외우지 못하겠어요.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게 포스기 작동법도 알려 주고 하면 좋겠는데.”(38,2) 아, 이 양반 뭘 좀 아는구나. 생각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레시피 대회를 연다. 할아버지가 기다리던 이서우라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다. 이서우를 찾기 위한 이루다의 달콤한 활약. 편의점 재료로만 만들어야 할 음식 레시피는 소설 특성상 어렵게 묘사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음식 레시피를 상상하는 일보다 애보다 더 애같은 학부 선생과 루다의 아버지를 읽는 데서 힘들었다. 오글거리는 과거 회상과 밝혀지는 할아버지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현실적인 편의점 레시피를 바랬거나 섬세한 감정 묘사를 기대했다면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를.
주인 할아버지가 맛 보고 싶었던 토마토 된장찌게 나도 한 번 먹어보고 싶다. 그 전에 출근하면 말 안 듣는 사춘기 소년들 입에다가 먼저 물려주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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