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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지금,여기] 전두환 따까리를 전구처럼:「시대유감展」②

오윤, 「낮도깨비」, 목판화, 53×37cm, 1984, 「춤」, 목판화, 32×27cm, 1985.
오윤, 「대지」, 목판화, 40×34cm, 1983.
황재형, 「군상」, 판 위에 종이부조, 122×244cm, 1986.

 

독재 정부라서 한 목소리만 내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자 통쾌한 민중미술 표현법

 

임옥상 작가의 「발 닦아주기」에 다다르자 빵 터졌다. 전두환 발 닦아주는 노태우 바깥 경계에 정치인들이 노랗고 붉은 색깔로 칠해져 전구처럼 전시 돼 있었다. 기발했다. 대통령 풍자가 가능해진 이후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지금 시대야 문재인과 지지자를 “문재앙” “대깨문으로 부르는 시대지만. 서슬 퍼런 5공 시절 겪고서 대통령에 대한 언급이 가능해진 시대의 풍자라면 느낌이 어땠을까. 아쉽게도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촬영 불가였다.

 

1983년 7월 31일 자 경향신문 여적(餘滴). 이렇게 적혔다. “어떤 사람은 한국 한국사회를 3S 시대라고 규정한 일이 있다. 3S는 스포츠(Sports)·스피드(Speed) 그리고 세미나(Seminar)다.” ©경향신문
그리고 1년이 지난 1983년 5월 25일 여적은 바꾸어 말한다. “흔히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의 두문자를 따라서 현대를 3S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경향신문
텔레비전 방송사를 겨냥한 듯 TV를 섹스와 폭력의 상자라고 묻는 1989년 7월 4일 자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



민중미술이 닿은 시선
민중미술은 독재라 이름 짓는 권위주의 정부만 타도하지 않았다. 80년대 한국 사회는 급변했다. 경제성장과 함께 올림픽으로 세계화를 맞이했다. 전두환이 부추긴 측면도 강하다. 컬러 방송 시대를 열면서(1980) ‘국풍81’ 대규모 문화 행사를 개최(1981)했고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1982)했다. 프로야구와 축구, 씨름이 출범(1982-83)하자 여적(餘滴)은 이렇게 말한다. “흔히 스크린 스포츠 섹스 두 문자를 따라서 현대를 3S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한다.”(경향신문, 1983) 불과 전두환 시절 7년 간 대가족 중심에서 4인 가족으로 구성원 숫자가 변했고 민주화 운동이 가라앉던 냉전체제가 끝나간 90년대 중반 텔레비전 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어섰다.

대중적 환경이 변하며 전통적 시각에서 벗어난 개인은 유흥과 성에 빠지기 쉬웠다. 관계가 아닌 소비라는 측면에서 여성과 돈, 음식은 단지 소비할 대상에 불과했다. 신학철은 몽타주 방식으로 대중 우민화 정책을 비판했다. 단일한 여성은 그저 아름다운 존재일 뿐이고 값비싼 보석은 가지고픈 물건일 테지만. 현실 세계에서 마주하는 이들을 덧대고 오리면서 합쳐보니 끔찍한 이면이 드러난다. 소비로써 즐기는 사회 이면에는 소외되고 외로워하는 개인이 숨어 있다. 국가는 인간의 말초적 감성을 이용해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다. 단지 대통령이던 보이는 적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세대를 갈라치우며 이득을 얻고 있다. 전두환 따까리로 표현했던 전구만큼 기발했다.

실제 부대 자루와 종이 포장지로 표현한 극사실적 작품 ‘국토-고추 모종’은 다급하게 만든다. 개발이란 담론에 밀리어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의 터전이 사라진다. 이쯤에서 농촌을 회복하고 복구하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농촌은 상직적인 의미라고 생각했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구사하다 소수자로 전락한 개인은 언제나 터전을 빼앗긴다. 모두가 존중 받으며 다양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회란 존재하기나 할까. 민중미술은 탄광촌, 길, 사람들, 민족처럼 한국만의 상황을 담는다.

 

 

이종구, 「국토-고추 모종」, 종이에 유채, 164×66.2cm, 1990.
신학철, 「밤길」, 캔버스에 유채, 45.5×38cm, 1973.
신학철, 「한국근대사-9」, 종이에 몽타주, 56×69.7cm, 1982.
신학철, 「한국근대사」, 종이에 몽타주, 77×49cm, 1986, 「한국근대사-서울탑」, 종이에 몽타주, 168×53cm, 1984.
이응노, 「인간군상」, 한지에 수묵담채, 77×29cm, 1983.
김정헌, 「모녀」, 캔버스에 유채, 133×196cm, 1984.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방법
어렵지 않아서 좋았다. 텍스트로만 접했던 민중미술, 직접 작품으로 대해보니 그 시절 어른이자 청년들은 쉬운 언어를 구사한다고 생각했다. 미술을 전공했으니 미술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작품뿐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참여할 만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이런 고민하지 않았을까? 새로운 언어는 늘 생각하게 한다. 그 생각은 사랑에 닿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새로운 언어를 고민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시회 중간에 쌍벽으로 자리한 미술인 단체 인포그래픽이 아쉬웠다. 멀리서 볼 수 있었으면 한 눈에 담겼을 텐데, 워낙 커서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독재자의 장기 집권과 세계화의 물결 속에 갈피 잃은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오버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 무렵 죽을 때까지 언더로 살아가는 기분은 어떨까.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남긴다. 그래서 글은 읽지 않는다. 아직도 시대착오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안세력과 특권계층 신봉하는 반대 진영을 지지하기도 어렵다. 맞다. 조국 스캔들에서 더러운 이권 챙기기를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고 선택적으로 보도해서 문제의식으로 먹고 사는 발전 가능성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 옳은 건 아니다. 그래서 드러난 어른들의 정치적 술어와 몸을 원하는 깡패 행각이 사라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시간은 흐르고 사회는 급변한다. 어느새 디지털 담론이 아날로그 담론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성전(聖戰)은 현실 사회가 아닌, 인터넷 공간에서 은밀하게 일어난다. 40년 후, 우리 세대는 무엇을 보여줄까. 갈라진 인터넷 공간에 글을 남긴다. 유리조각보다도 촘촘하게 깨지고 박살나서 흩어지고만 수많은 20대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신학철, 「불사조」, 종이에 채색, 123.5×184.5cm, 1985.
마음으로 울고 싶다/역설적 이름의 작품. 「불사조」(1985). 절망적 상태의 새를 통해 새 생명에 가닿기 바라는 어미 새의 의지를 그렸다. 오늘의 고통도 내일들의 일상을 잇기 위한 거름일까. 노나메기를 생각해본다. 안창홍 作.


***

어렸을 땐 몰랐다. 사회로 한 발자국, 몸을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고통과 상흔이 가슴을 잠식한다. 세상은 달라져야 하고, 바뀌어야 하는데 변혁은 요원하고. 늪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날 지켜보며 비웃기라도 하듯 프레임에 가두어 한마디씩 꺼낸다. 어른들의 정치적 언어를 유심히 지켜본다. 따라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익혀 놓을 뿐이다. 당신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유일한 몸부림일 뿐이라고. 채현국은 전두환의 이면에서 돈을 읽었다. 돈이 있으니 따르는 이들이 있는 거라고. 이면에 나 아닌 걸 내세워 사는 사람을 보면서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저렇게 살고 싶을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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