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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교회는 요지경] 발레하던 누나들의 편지 받은 사건

입력 : 2021. 02. 28  22:35 | B2-3

 

교회에서 열린 큰 사건마다 뛰어가
촬영하고 기록물로 남기던 시간 속
소년에게 기운 내라 응원한 누나들

 

담임목사가 중요하다며 신신당부한다. 결혼식. 외삼촌 이후로 처음이다. 고등학교 1학년, 혼자 방송실에서 바쁘게 일하던 차에 “우리 교회에서 결혼할 테니 잘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하달 받았다. 전체실황 녹화해서 신랑·신부에게 전달해야 하나 싶었다. 방송 자막을 띄울 뿐만 아니라 사진에 동영상 촬영까지 해야 할 참이다. 누구에겐 하나 밖에 없을 결혼식일 테니까.

카메라는 두 대였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들고서 촬영하면 그만이지만 피처폰 사용하던 시절이라 80만 원 캠코더와 일본서 수입한 소니 카메라가 전부였다. 천장에 매달린 소니 카메라로 결혼 예배 전체를 녹화·녹음하되 화면전환용으로 80만 원 캠코더로 부분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촬영한 영상물을 합쳐 전체실황 영상으로 제작하려고 했다. 시디에 구워 가져다 드리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 만해도 설렜다.

토요일 학생회 예배를 마치고 카메라 들고서 앵글 연습에 돌입했다. 확대하면서 뒤로 몸을 이동하는 기법, 성경책을 보고 있다는 콘셉으로 축소하여 상반신이 나오도록 하는 기법, 예배당 끝에서 앞까지 천천히 삼각대로 이동하는 기법. 여의도 순복음교회 방송국으로 보았던 역량을 발휘해 서당 개 삼 년 카메라 잡을 줄 아는 폼 익히느라 고생했다. 열심히 일하는 게 좋았다. 몰입할 때만큼 즐거움이 없었다. 완성한 작품이 새 부부가 될 교인 분에게 닿을 생각만 하면 즐거워 미칠 것 같았다. 결혼식 전 날인 토요일부터 교회는 꽃과 풍선으로 가득했다.

 

 

평소에는 방송실 바깥 예배당에서 카메라 앵글을 연습했다.



분명 신부와 신랑은 따로 있었고, 누구보다 긴장했을 텐데. 왜 내 가슴이 뛰던지. 2010년 5월 16일 주일 아침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대망의 결혼 예배 당일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주일학교 예배를 드렸고, 주일학교 학생들과 공과를 마치고서 방송실로 돌아왔다. 아침 10시. 예배까지 1시간 남았다. 예배 안내문을 띄웠고 결혼 예배 순서지 받들어 찬찬히 읽으며 동선 체크에 나섰다. 전속 기사가 촬영한다지만 영상물로 남기는 건 오로지 방송실의 나뿐이다. 한 앵글 한 앵글 소중히 담았다. 신부의 눈물 한 방울도 놓치지 않았다. 목사의 주례와 집사님의 축가, 신랑의 큰 절에서 마지막 행진까지. 세세하게 담았다. 50개 클립, 19분 59초 분량. 긴 영상이 2분 54초, 짧은 영상은 4초.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여 담아냈다.



어김없이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직수입한 소니 카메라에 연결한 캡처보드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녹화 불능. 기가 막혔다. 힘이 빠졌다. 아오. 화가 난 나머지 피처폰을 던지고 말았다. 슬퍼서 눈물 날 뻔했다. 이 서러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교회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50개 영상 클립만 남은 상태다. 전체실황으로 제작했더라면 유튜브에 공개했을 텐데. 꽉 차봐야 200-300명 앉을 수 있었던 참여교회에는 방송실에 근무할 만한 인력이 전무했다.

교회 창립과 건물 이전 예배를 평일에 진행하자 하루 결석할 수 없어서 나보다 열 살 많은 아저씨뻘 남성 교인에게 방송일 맡겼다. 3㎡도 채 되지 않은 작은 공간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풍경도 우스꽝스러운데, 나보다 열 살 많은 형에게 일 가르쳐주는 일도 쑥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자동 재생한 PPTX 예배 전 알림 화면 개수를 계산해 “아, 이쯤 ‘알립니다’가 끝나고 예배 시작하는 거죠?”라고 말해 당황했다. 그걸 그새 계산하다니. “아니요, 그냥 대충 만들어 놓은 겁니다”하고 겸연쩍게 웃었다.

누워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닿을 만한 공간에서만 6년을 보냈다. 혼자 있을 땐 200원어치 믹스 커마시며 여의도 순복음교회, 사랑의교회 예배 실황이나 TV조선 생방송을 틀어놓고 찬송가 가사를 제작했다. 행사가 있을 무렵이면 순서와 동선을 체크해 실시간 예배 자막을 띄울 궁리에 나섰다. 몸은 하나라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내가 촬영 중이라면 누군가는 방송실 지키며 자막이나 음원을 재생해야 한다. 따라서 그 누군가를 찾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학생회나 청년회 일원 중 한 사람을 무작위로, 마치 “○○○ 예비군 아저씨! 병원에 신고해주시고! ○○○ 아저씨! AED 가져와 주십시오!” 외치던 짜증나고 불쾌한 기분이다.

녹화는 고질적 문제였다. 교회 창립 맞은 주일예배에서도 사건은 어김없이 터졌다. 발레단 누나들이 와서 공연하고 갈 예정이니 녹화 잘 하라는 당부에도 확인해 보니, 녹화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때의 분노는 방송실이 아니라 교회가 터질 뻔한 울분이다.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 질풍노도 시기라지 않은가. 그러려니 생각하던 어른들이 많았지만 담임목사는 철야예배에서 어둠의 딥다크한 설교를 왕왕 쏟아내며 “아이들이 무슨 사춘기느냐!”라고 지껄이던 시대였다. “나는 사춘기 모르고 살았어요. 성교육도 필요 없어요!” 외치는 양반이 울분과 슬픔에 찬 소년을 얼마나 이해해 주었으려나.

발레단 누나들의 공연엔 동영상도 포함됐다. 세상에 빠져 살던 청년 남성이 방황하다가 어렸을 적 힘들 때마다 찾아간 교회에서 생활하던 과거를 기억하는 내용의 영상이다. 밤하늘, 생각에 잠긴 아이 곁엔 부모도 어른도 없었다. 어른도, 목사도, 친구도 없었던 방송실에서 소년은 혼자 울분을 삭히며 고등학교 1학년이 풀 수 없는 문제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몇 달 지나 한 집사님이 두꺼운 편지 하나를 건넸다. 내 이름으로 온 편지였다. 그 안엔 하사딤선교발레단 이름으로 쓰인 누나들의 예쁜 손글씨가 담겨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