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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신앙칼럼] 철딱서니 없는 말

입력 : 2020. 12. 23  07:30 | A27

 

 

되게 예쁜 선생님과 근무한 일이 있었다. 정말 예뻐서 일하는 게 일하는 것 같지 않을 정도였다. 자고로 노동은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아야 정상이라던데.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수백 권의 책을 들고 나르고 한국십진분류표대로 정리해야 했던 여름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금욕이 일주일이나 가능했다. 완전 성령의 힘이었다.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신자가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선생님이 점심을 먹고서 커피 한 잔과 함께 신앙 이야기를 자연스레 꺼냈다. 전공이 신학이니까 처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아예 단어가 된 한 문장을 물음표로 꺼내자 다소 부담스러웠다. 이미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를 열정적으로 준비하고 있었고, 새벽 4시까지 찬양 연습하다가 출근했다는 말씀을 들은 때라 더욱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됐다.


마음에서는 화가 났다. 되게 착하고 예쁜 선생님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무급노동 시켰을 목사의 면상이 상상되었고. 어쩜 시간이 지나도 기독교는 변하지 않는 걸까 부아가 뒤집혔다. 그래서 선생님과 나와 둘이 있을 때 철딱서니 없는 말을 꺼냈다. 불편한 이야긴 줄 알지만 교회 활동에 몰입하면 안 되고 제 말씀을 잘 들어보시라는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서 이것들이 철딱서니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선생님께 질문을 받는다면. 내가 교회를 빠져 나오기까지의 장대한 신앙사(史)적 해방사관을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렇게 물을 거다. “교회에서 일하는 게 어떠세요?” 당연히 좋고, 행복하고, 여러 단어들로 구사한 긍정적 분위기와 감정 상태를 표현할 것이다. 하나님이 마치 세상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선생님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더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듣기만 할 거라고.


정혜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의를 듣다보면 의문이 생긴다. “얼마만큼 상대방의 말을 들어줘야 하지요?” 충분이 들어줬음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상처라고도 하는) 앞에 지쳐버린 내가 보인다. 그러나 정작 눈을 마주치고 상대의 심리에 관심도 없다는 사실도 보일 것이다. 마치 서두에서 밝힌 되게 예쁜 선생님의 미모에만 정신 팔렸지만 정작 선생님의 마음에는 귀 기울이지 못했던 것처럼. 그 때의 철딱서니 없는 말은 나의 패착이다.


코로나 파동에 신천지 신도가 등장한 건 순전한 운이었다. 신천지 신도가 도덕적으로 나빠서 받은 벌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천지에 손가락질한다. 나도 신천지 신도가 싫고, 그들의 거짓말이 역겹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밀려나 신천지 세계에 입교한 이유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걸 상처와 아픔이라고 쉽게도 정의한다. 상대의 겉모습에 취하지 않으며 온전히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일단 나는 아니다. 그래도 어제의 패착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선생님은 잘 지내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