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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건조한 기억모음①] [2] 열다섯 소년이 묵묵히 해낸 교회 일들, 기억나세요?

입력 : 2020. 10. 03  07:27 | A26

 

턱없이 모자란 방송실 직원
그래서 차출한 학생부 동료
특정한 사람에 부여된 작업
임금도 관심도 아무도 없어

 

군복무란 현실 앞에 교회 일을 이어가지 못했다. 본지는 8호 1면 ‘참여교회 방송실 업무, 위기’ 제하 기사에서 인수인계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방송실은 분열의 역사다. 구축 당시 멤버는 나와 중년의 집사 두 명. 그마저 집사는 방송 시스템을 구축하고 교인과 갈등을 빚고 교회를 나왔다. 줄곧 혼자서 근무했고 첫 동료를 맞이하기까지 8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 명이 학생회에서 파견되어 총 네 명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혼자서 방송실 업무를 독점하고 있었느냐 묻는다면 수고비도 두둑하게 받지 않던 한 달에 10만원 겨우 받을까 말까한 이 일을 독점하겠느냐 되묻는다. 자그마치 8년을 쉬지 않고 일해 왔으니. 교회에서도 군복무라는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청년부도 아닌 학생부에서 차출한 배경은 강제로 떠밀려 방송실로 난파된 상황일 것이다.


한명의 남학생 빼고 두 명이 여학생인데 도무지 배울 의지도 없었고 이끌어줄 역량도 없었다. 이메일 보내는 방법도 모른다기에 목사님 딸 붙잡고 포토샵 가르치기엔 마음으로도 채우기 힘든 디자인이 벽 앞에 놓였다. 끝내 군복무 직전 방송실 인수인계는 ‘방송실 문건’으로 불리우는 문서로 남학생에게만 하나하나 가르쳤다.


휴가를 맞아 방문한 업무는 난장판이었다. 띄어쓰기부터 자막 위치까지 하나도 일관적이지 않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두 개는 알았던 하나 뿐인 동지여도 오랜 시간 축적된 디자인 일관성까지 갖추라는 건 내 생각에도 막연했다. 자막 띄우는 박자 따위의 단순한 영역만을 가르쳤고 교회 생활에 총체적 의문이 진해지던 소초 안에서의 여름, 예배 활동을 차차 끊고 후임자에게 완벽히 인수인계할 때까지 방송 일만 참여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밤을 새던 성탄 전야/주일학교 아이들이 찬양으로 춤을 추면 자막만 띄워주면 되었지만 일을 줄이기 위해 영상물로 제작했다.

 


나의 다짐과 함께 교회 노동 구조는 고요하게 철저히 순진한 사람에게 배분됐다. 순진한 사람이 내가 아끼고 고맙게 생각하던 다섯 살 아래 후임자 남학생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교회를 나오고 내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교인들 입에서도 오르내리지 못한 서슬이 퍼렇런 시절 후임자 동료도 나를 멀리하고 말았지만. 이내 가까운 시일에 다시 마주치며 비로소 교회 내 노동 착취를 인식했을 땐 이미 온갖 교회 임직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직접 경험하여 비극을 비극이라 말할 수 있는 지극히 한국교회 다운 풍경이다.


방송실 업무는 하고 싶던 일이었다. 디자인한 자막에 활자를 넣는 것도 즐겁지만 방송국처럼 실시간으로 보이며 예배 공동체에 도움 주는 일을 한다는 즐거움은 이루 말하기 힘든 감정이다. 신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무보수로 일 해왔다. 매주 교회를 오가는 교통비가 버거운 줄 알았던 목사도 한 달에 10만원 씩 챙겨줬고 그럴 때면 왠지 마음은 무거웠고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고작 하는 일이 뭐라고 급여까지 주느냐는 자격지심(自擊之心)이 원죄 의식으로 남아 있었다.


신학생이라면 10만원을 주고서라도 다섯 개 일거리를 부려 먹는 교회의 무책임한 노동착취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 노동착취를 후임자, 신학생도 아닌 가련한 내 동지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져야 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교회 임직을 맡은 학생과 청년들은 모두 부모까지 교회를 다닌다. 유일하게 홀몸으로 교회를 다니던 내가 교회를 나오자 중요한 업무엔 부모도 교회를 나오지 않는 학생에게 시키지 않는 건 우연일까?


교회를 나오고 내가 가르쳤던 지금의 청년학생 전도사를 카페에서 만나야 했다. 다른 일도 아닌 내 어렸을 적 사진을 교회 창립 20주년 행사 영상으로 사용한 혐의 때문이다. 나를 교회 성장의 재목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 동안 한 번도 만들지 못했던 영상물 만들면서 내 생각이 많이 났다고 한다. 방조자(幇助者) 사모도 내 생각에 서로가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눈물을 머금으며 꺼낸 이 말에도 마음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고, 다음의 말들이 내 입 밖으로 나올 뻔 했다.


“당연히 기억났겠지. 오래 전 당신들의 기억에서 열다섯 소년의 존재는 이미 소거됐을 테니까. 비로소 떠나버린 노예 한 명의 존재가 이제야 실감났을 뿐인데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