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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건조한 기억모음①] [1] 교회가 감추고 싶었던 노동착취

입력 : 2020. 10. 03  07:27 | A26

 

 

자연스레 일해 왔던 다섯가지 교회 일 뒤로하고 내린 결정
가이드라인 세워가며 교회를 멀리했지만 누군가 졌던 짐
믹스 커피·예배 실황은 힘 주었지만 끝내 진해진 자격지심
나만의 문제라 생각했던 내 후임자도 겪고 만 교회의 갈등

 

본격적으로 교회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때는 야간 근무 중이던 소초(小哨) 상황실 복합감시체계 앞이었다. 키보드로 선명해지는 부유물을 한없이 바라보며 이제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느꼈던 순간이다. 파도는 유유히 대 방파제를 적셨고, 자연 그 자체인 바닷물은 이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쉼 없이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를 할 테지만. 자연이 아닌 그곳 세계에서 멸망할 때까지 일하며 살아남을 힘이 더는 내게 없다고 느꼈다.

 

교회를 피할 수 있었던 순간은 운 좋게도 군 복무라는 짐을 지워야 할 때였다. 여럿 성도들 후원금을 안으며 당당하게 머리를 깎고 장병으로 새 사람이 되려고 했지만. 교회의 힘겨운 일감들과 시간이 지나도 어색함을 떨치기 힘든, 그 곳 참여교회의 독특한 환경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녀왔다지만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힘들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곳 별명을 참여교회’(參與敎會)라고 지은 것이다. 나를 처음 신학생으로 파견한 교회기도 했고, 그래선지 더욱 나를 놓고 싶지 않은 목사의 마음도 이해는 했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을 내 앞 날은 캄캄하기만 했다.

 

 

따뜻한 풍경/히터 하나만 켜도 좁은 방송실이 금방 데워졌다. 별다른 간식 없이 커피 한 잔이면 언제든 일해도 즐거웠다.

 

 

기쁨으로 감당했던 참여교회 방송실에서의 믹스 커피는

교회에선 내 자리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만큼 맡았던 임직이 대단한 건 아니었다. 맡겨진 업무는 방송실 주일학교 교사 청년부 설교 주보 금요철야예배 인도가 전부다. 학업으로 교회를 비워야 했던 수요일은 제외하고, 금요일 오후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오가던 세 시간의 여행 끝에 도착해 철야예배 찬송을 인도하는 것에서부터 한 주를 시작한다. 불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50. 오후 8시까지 교회에 도착해 미가엘 반주기에 입력된 찬송 번호를 검사하고 박자가 느린지 빠른지 점검함으로써 선곡을 확인한 후 예배 전 30분 전부터 무릎을 꿇어 기도한다.

 

그렇게 850, 본격적인 찬송을 시작하면 나의 역할이 끝나는 시각이 930. 통성기도와 함께 마이크를 목사에게 넘겨주면 금요일 역할은 끝이 난다. 11시까지 이어지는 예배 끝에 집으로 돌아가 곧장 씻고 단잠을 이룬 후, 토요일 오후 다시 교회로 출근하듯 걸어가 전도 행사 준비를 했고. 한 주는 마을, 한 주는 시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전단지와 사탕을 나눠주기 바빴다. 그렇게 도착한 오후 3시 무렵, 청년학생예배 자막을 준비하기까지 30. 미리 만들어 놓은 자막들 덕분에 어떤 찬송이 흘러 나와도 바로 띄울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가 마련해야 했다. 적어도 이 교회 방송실 바닥만 9년 차에 다다랐으니까.

 

토요일 저녁에서야 끝이 나는 청년학생예배에 첫째 주부터 넷째 주는 청년학생 담당 전도사가 설교 했고, 마지막 다섯째 주는 나의 몫이었다.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얼마나 많았는지, 담임목사가 올라와 눈치를 주었을 만큼 설교는 짧은 메시지로 전달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었다. 부랴부랴 여전도회와 구역(목장, )에서 준비한 저녁을 먹으면 이제야 교회 일이 시작된다. 예배와 교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청년학생들과 달리, 그 다음 날 주일예배를 위해 pptx와 포토샵을 열어 정신없이 키보드로 입력하기 바빠지는 순간이다. 정신없던 순간에도 내 입을 달게 했던 음료는 교회에서도 200원을 내야지만 뱉어주던 믹스 커피였다.

 

 

참여교회 방송실/1평 남짓한 방송실로 출근하면 곧장 교컴을 켜고 방송 일에 돌입한다. 포털사이트보다 익숙한 FGTV 주일예배 실황 영상을 듀얼모니터로 켜두고 이제 막 뽑아 온 200원 믹스커피를 마실 때면 세상 부럽지 않다.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고마웠고 달달한 커피에 즐거웠다. 주어진 교회 일은 ▲방송 ▲주일학교 교사 ▲청년부 설교 ▲주보 인쇄 ▲금요철야예배 인도로 고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교회 일을 끝으로 먹고 살 현실적 대안이 필요했다. 교회 일은 어떠한 경력도 되지 않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교회도 내 후임을 채우기 바빴다. 후임자도 교회 방송실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야 했다. 교회를 떠난 후임자에게 전해 들었던 마지막 1년은 분노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작업이 된 방송 업무는 교회 생활에 균열을 일으켰다. 방송실은 누구도 챙겨주거나 기억하지 않는, 철저히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는 공간이다.

 

교회의 좌석과 카메라 워킹까지 외우고 말았던 시절

방송실 업무 강도는 어땠을까. ‘주일오전예배는 방송용으로 녹음됩니다화면에서 시작한 pptx 화면은 네 줄 찬송가, 복음성가 가사를 넘어 성가대 찬송, 광고, 성경봉독, 다시 복음성가, ‘할렐루야! 한 주간도 승리하세요!’ 인사로 마쳐지면 대략 100장에서 150장 사이 완성된 하나의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관건은 찬송가와 복음성가, 은혜성가 자막이 얼마나 만들어졌느냐다. 개신교회는 가끔 정해진 순서대로 찬송을 진행하지 않는다. 찬송만 하더라도 불렀던 곡 또 부르고, 마음의 감동이 주어지면(아니 기독교적 표현으로 성령의 감동) 순서지에 없던 곡을 갑작스레 부르기도 한다. 그걸 대비해야 했다. 찬송가 645, 복음성가 200여장, 은혜성가 300여장. 물론 다 만든 건 아니다. 자주 선곡하던 찬송 위주로 선별해 놓고 폴더 째 켜놓은 상태에서 예배에 돌입한다. 송출까지 맡았다면 완전한 생방송 체계였을 것이다.

 

불렀던 곡들을 선별해 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한 숨을 쉬면서 내리던 폭설 앞에 삽 하나 들고서 하나 둘, 언덕이 될 요량으로 해치울 따름이다. 그런 내게 믹스 커피는 달달한 친구였다. 아무런 노래도 없이 작업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첫 방송실 업무가 주어지던 중학교 2학년, 열다섯 소년의 시절에도 커피보다 더 일찍 접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주일 5부 예배 찬송을 인도하던 팀조슈아(당시엔 여호수아 찬양팀이라고 불렀다) 영상을 듀얼모니터에 끊임없이 재생시켰다. 교회 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30분에서 35분 사이에 끝이 나는 팀조슈아 영상은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거나 다음 영상으로 갈아치워졌다. 찬송가를 제작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스스로 부여한 순간에도 팀조슈아 찬양 실황은 늘 나와 함께했다. 가사를 복사하고 붙여놓고, 다음 찬송가 가사를 홀리넷(www.holybible.or.kr)에서 이따금 복붙 할 때면 지루함에 절여 뇌가 굳는 느낌이다. 포토샵과 pptx로 두 시간 가량 제작할 때면 뇌로부터 전달 받은 카페인을 더 보충해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에 몸은 즉각 순응해야 했다. 잠시 뇌를 식혀주던 사이, “소음과 함께 종이컵이 떨어지고 그 위로 달달한 커피가 나온다. 그렇게 나의 200원이 덜어졌다.

 

 

제작한 화면을 살피다/자막은 적당한지 멀리서 봐도 읽을 수 있는지를 따져 최종 확정했다. 처음 방송실 근무를 감당하던 때부터 조금씩 디자인 기술은 발전했다.

 

그래도 끊을 수 없는 건 믹스 커피의 맛뿐만이 아니었다. 통통 튀는 드럼, 오른손을 들고 찬양을 인도하던 부드러운 찬양 인도자 목소리. 한 사람, 한 사람 호흡을 맞추던 찬양팀 싱어, 적당히 들려오는 청년들 형, 누나의 손뼉 소리. 한 번의 실수 없이 다음 자막을 적당한 순간에 보여주던 FGTV 방송국의 찬송가 자막, 지금 봐도 감탄하는 크레인 카메라 워킹. 이 모든 게 주일예배 생방송으로 송출하던 여의도 순복음교회 풍경이다. 끝 좌석까지 골고루 퍼진 청년들이 지금에선 어디로 흩어졌는지 보이진 않지만 10년 전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레전드였다. 믹스 커피만큼 달달한 중독성에 지금도 팀조슈아 예배 실황으로 찬송을 즐겨 듣곤 한다. 하도 많이 봐서 봐오던 영상물의 카메라 워킹과 자막 실수, 인도자의 멘트까지 기억으로 각인 됐다. 고된 반복 작업에 이만한 노동요(勞動謠)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끊어야 할 건 끊어야 했다. 믹스 커피도 하루 네다섯 잔을 마셨던 순간. 이러다 뇌까지 커피로 절여지는 듯한 불편함을 몸소 느끼게 되었고. 어느새 믹스도 원두커피로 바뀌어 쓰디쓴 맛없는 커피를 보약처럼 바꿔 마셔야 했다. 좋아하던 찬양 인도자도 순복음교회를 떠났고, 새로운 찬송을 들을 수 없게 되자 과거의 예배 실황을 마르고 닳도록 듣고 말았다. 시대가 바뀌어간 것을 몰랐던 건 방송실 안의 나뿐이다. 특별 새벽예배(그렇다. 새벽예배도 방송실 업무는 이어졌다)교회 창립 기념일이 서 있는 봄, 청년학생연합 행사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OO의 밤으로 뜨겁던 여름들, 추수감사절과 사무처리회의 가을과 연이어 성탄절 너머 송구영신의 순간까지도 행사 때는 방송실에서 베가스를 건드리며 밤을 새야 했다.

 

차라리 한 가지 업무만 열중하고 프로그램 공부만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중간하게 배운 포토샵·프리젠테이션은 어디 가서 돈 주고 써먹을 만한 실력으로 자라나진 못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올 때 쯤 느꼈던 현자 타임은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진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해 왔느냐고. 10년 후를 내다볼 수 있었다면 중학교 2학년, 열다섯 소년은 이 따위 일에 치여 살아가겠다고 다짐하진 않았을 거라고. 이게 하나님의 일이었느냐고 물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