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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교회 安 이야기] 빛과진리교회 바라보며 불편해진 이유

자유의새노래 2020. 5. 14. 00:43

입력 : 2020. 05. 14 | 디지털판

 

 

이제 막 고등학교 입학한 내게 아버지를 자처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은 늘 아버지 같은 존재로 생각되길 바랬는지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곤 했다. 물론 나 역시도 고맙게 생각했다. 누군가가 뒤에서 서포트 하듯, 정신적 지지자가 되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 일도 그 무렵 늘어났다. 방송실 언저리에 금요철야 찬양 인도자, 중고등부 팀장, 주일학교 교사, 목사님 설교도 CD로 구워 스티커도 자체 제작해 붙였고, 한 달에 두 차례는 학생 예배 설교자가 되었으며 아이들이 해치운 식탁을 정리하는 일도 도맡았다. 방송실 특성상 절기 행사 예배 전 날이면 밤을 샜다. 기존의 통합찬송가 폐기하고 새찬송가로 전환하던 20104월엔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토요일 밤은 1시간 반 이어지던 주보 인쇄와 주일예배 찬양 인도자에게 문자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자정을 넘겨서야 잠을 잤다.

 

언제 한 번은 주보 인쇄가 되지 않아 짜증이 났다. 잉크가 부족한 건지, 토너가 고장 난 건지. 아무리 인쇄하려 해도 절반만 인쇄되기에 급히 목양실 컴퓨터로 한 장을 인쇄해 복사하려 했다. 그마저도 복사가 되지 않았다. 원인은 뭘까 고민하고 실패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새벽 3시 되어 주보 한 장 제대로 뽑은 게 없어 분노하고 말았다. 나 자신이 무능해 보였다. 원인을 알아야 고치든가 할 텐데 얼굴이 시뻘게져 얼룩진 용지를 찢고 말았다. 그리고 지친 나머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토요일 밤, 교회 일을 마치고 교회에서 자고 주일 아침을 맞아야 했었다.

 

 

여러분! 자발적 노예가 되고 싶으세요? 교회를 다니세요!

새벽 3시 넘어 주보를 뽑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보직에

힘겨워서 그만두면 배신자가 될 수 있는 놀라운 교회로!

 

 

주체하지 못할 분노는 집에서도 이어졌으나 엎드려 타이머도 맞추지 않은 채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일어난 시각은 낮 1. 교회에선 몇 통의 전화가 왔지만 그 숫자는 열통에 달하지는 않았다. 대충 적당히 보낸 메시지에 아랑곳 않은 채 일주일을 지냈다. 다시금 철야예배 찬양을 인도 할 금요일이 찾아오자 불편한 마음안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듯 발자국을 떼었다. 당연히 목양실에 굳은 표정의 목사 한 사람이 앉아 있었고 온갖 죄송한 표정으로 들어와 사과했다.

 

놀랍게도 이 신문 본지 한 편엔 성령께서 조명하신 여덟 가지의 죄가 드러났다는 제목으로 나의 죄를 스스로 고()하듯 새겨 놨다(2015. 3. 2). “하나님을 전심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음 토요일 전도 및 거룩한 아침을 지키지 못함 청년예배 지각 성도와의 교제를 멸시하여 인간관계를 경시함 10. 19 사태 때의 무책임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분노를 표출함 담임 목회자와 사모의 권위, 사랑을 불신한 일.” 지금 보면 기겁할 죄목들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10.19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교회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교회 일은 많은데, 교회에서 함께 일을 분담할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만둘 순 없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기피할 일이기에. 미래에 교회를 계승할 청년이 사라지니 모두가 합심해서 교회 일을 거드는 이유다. 모두가 퇴근한 일요일 새벽 3시까지 혼자서 낑낑댄 6년 전의 나를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만. 그 때의 기억을 끄집어낸 빛과진리교회 사태를 보면 어처구니없는 건 마찬가지다. ? 자발적인 훈련이었다고?

 

아버지를 자처한 목사는 엄격한 척, 엄하게만 대했을 뿐 인격적으로 대한 기억은 조금도 없다. 따뜻한 아버지 이미지를 바란 건 아니다. 그 홀로 사무실에서 맡겨진 일을 꿋꿋이 견뎌야 했던 나를 비롯한 몇몇의 누나, 동료들을 생각하면 아버지란 이름을 거들먹거린 목사들이 내가 다녔던 그 교회뿐 아니란 점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하나 둘,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났다. 재밌는 건 떠난 이들 이름을 교회는 너무도 쉽게 잊어버린다는 모순. 한 영혼도 소중히 한다는 구호에도 떠날 사람은 떠나라, 다시는 기억치 않겠다며 교인을 헌신짝 버리듯 교회 판 이지메()에 담임목사 당신이 가담하던 천박함을 보노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