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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앙/교회 安 이야기

[교회 安 이야기]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

입력 : 2020. 12. 23  07:30 | A26

 

차갑게 흐르던 빗물에 목양실도 냉랭했다. 추웠던 분위기와 달리 담임목사는 따뜻했다.

 

한 교회 전도사가 한 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빚에 허덕이던 교회 청년을 돕고 싶은데 도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교회가 만일 헌금을 저축해 두고 힘든 일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물었다. 코로나 파동 한참 전의 일이다.


전역하고 신학교로 돌아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던 마지막 시간, 마지막 질문은 하나였다. ‘과연 한국 교회에는 대안이 있는가.’ 현대신학이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현대인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던 질문에 구약학 교수가 “고민하지 말라”고 일축한 순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문제엔 답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적당히 생각을 매듭지라”는 요지 때문이다.


교회는 모든 문제에 답을 주겠다고 말한다. 이제는 모르는 문제에 모른다고 답하기에 이르렀다. 교인들은 박수치며 “모를 수 있다고 고백한 용기도 가상한 용기”라고 말한다. 게토화된 교회 한 구석 돈 없어서 빈궁한 교인들은 교회 점심만 든든하게 먹고 돌아간다. 기독교 섬김은 으뜸이라며 ‘전국 종합사회복지관 종교별 운영주체 현황’이라는 무려 10년 전 자료를 보이면서 개신교의 대사회적 섬김을 운운할 테지만 한국인은 종교인 중에서 기독교인을 가장 신뢰하지 않는다.

 

 

전도사의 한 숨
기독교인의 마지막 질문
“교회에는 대안이 있나”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안을 주지 않아도
문제가 돈 때문이 아니듯
교회도 이념 때문 아니야
교회만이 할 일을 물어야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들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예배와 성례(聖禮)가 대표적이다. 한 신학자의 지적처럼 신과의 교감 사이에 낀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이 성공주의에 가려져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가 만연해졌다. 굳이 한 청년이 짊어진 빚의 무게를 교회 식구들이 함께 지어줄 필요는 없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청년과 함께 신앙하는 것, ‘함께 살아가기’가 전부다. 따라서 교회는 엉뚱한데 죄책감을 느껴서는 곤란하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


과연 우리들 문제가 돈이 없어서 벌어진 것일까. 사랑이 깨진 아픔도 돈이 없어서 벌어진 일인 걸까. 노숙자들 교회에 데리고서 점심이라도 먹여주면 교회 밥이라도 주었으니 다행으로 생각하려나. 교인들이 모이고 모여서 모아놓은 돈들을 적절히 사용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만연한데에는 애먼 성소수자를 비하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함을 굳건하게 믿는 인간들 때문이다. 이들은 자유 대한민국을 운운하면서 헌금을 모금하듯 한다. 그런 예수가 욕설한다. “독사의 새끼들아!”(마태 23,33)


신학교를 나올 무렵, 4학년 학부생 신분으로 인터뷰한 가까운 모 교회 분란 사태에 마지막 희망마저 꺼지고 말았다. 역시나 돈 문제다. 교회의 전도사는 교회의 전권을 쥔 장로가 담임목사를 사임시키려 온갖 짓을 벌인다고 귀띔했다. 막상 누추한 5층, 반갑게 맞이해준 목사는 낯선 이의 방문에도 어려운 사정 다 알고 왔는데도 책과 수건을 선물로 건넸다. 그가 한 말은 의외였다. “실패도 하나님의 은혜다.” 지금도 담임목사일지 싶어 검색해보았다. 여전했다.


교회는 대안을 주지 못한다. 예수는 진리가 아닐 수 있다. 교회가 아니어도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이 사회가 빼앗듯이 가져갔다. 그래도 교회는 궁핍해질 미래에도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을까. 대안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