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 02. 08 | 수정 : 2020. 02. 12 | A31
지난 3일 한국교회언론회가 기막힌 논평을 공개했다(2019. 2. 3). 정확한 워딩은 이렇다. “이런 질병(코로나19) 현상들은 성경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인간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가 한다.”
글을 기획하며 ‘설마 코로나19를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할까’싶어 검색해봤지만 커뮤니티 외엔 쉽사리 나오지 않아 제목을 성경에 등장한 문둥병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다 확인한 기막힌 논평이 제목을 다시금 바꾸게 만들었다.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를 인용하며 죄를 두려워하라니.
한국교회는 하고 싶은 말을 성경에서 찾는다. 신이 전염병을 이용해 심판한다는 구절을 가져와 공포심을 유발하고 “회개하라”는 명제를 만든다. 정작 태풍에 날아간 교회 지붕과 화재로 타오른 예배당을 보고선 회개하라거나 심판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뻔히 성전이 무너져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역사서(2열왕25,9)와 예언서(예레25,10-11)를 외면한다.
성경도 피부병에 걸리면 격리하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위생학을 다룬 문헌이 아니다. 더욱이 역사의 위치에서 다루지도 않았다. 종교적 의미에서 거룩을 강조한 구절에 위생학을 가져와 해석하면 동성애는 죄이므로 동성연애를 금해야 한다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다. 에이즈(AIDS)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에 감염되면 발생하는 병이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발생한 질병도 아니고, 중국인이라 해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격리하라 말하는가.
◇유구한 분리의 역사 속에 모호한 정결과 부정의 기준
구약성서 레위기는 성막 축조와 제사장의 의복 디자인, 위임식 외에도 부정과 정결함을 말한다. 피부병에 걸릴 경우, 몸에서 나온 분비물, 부정한 음식은 무엇인지 제사장과 백성에게 정결 기준을 제시한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소와 양은 정결하지만 돼지는 부정하고, 집에서 기른 깨끗한 짐승은 정결하지만 야생짐승은 부정하다는데 왜 정결과 부정을 나눴을까?
메리 더글러스(M. Douglas)는 거룩을 하느님의 속성으로 봤다.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할 때 결정되고 거룩은 총체적으로 완전해야 한다. 대제사장이 몸에 흠이 없어야 하고(레위21,17-21), 공동체도 비윤리적 행위에서 멀어져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했다(레위18). ‘거룩’ ‘속(俗)됨’ ‘부정함’ 세 범주를 질서 상태로 보고 이 구분이 오염될 때 질서가 무너진다고 본 고든 웬함(G. J. Wenham)은 질서를 강조한다. 질서가 무너질 때 거룩은 속된 것으로 바뀌고, 속된 것은 부정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희생제사를 정화로 본 밀그롬(J. Milgrom)은 웬함처럼 창조질서 경계를 무너뜨린 오염된 상태에서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데 회복의 수단을 제사로 본다. 감미(J. G. Gammie)도 더글러스처럼 세계를 혼돈세계와 질서세계로 구분했다. 감미에게 안식일은 구별의 날이다. 창조주이자 구속의 하느님을 기억하며 창조질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걸 분리의 원칙이라 불렀다.
분리의 원칙은 이스라엘 역사 곳곳에 등장한다. 포로기 이후 이방인과 결혼을 부정으로 본 에스라(9-10)가 그렇고, 마카비 혁명 때에도 목숨 걸고 음식법을 사수한 엘리아잘(2마카6,18-31; 7,1-42), 문자 그대로 계명을 지켜낸 쿰란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을 상징하는 규정이다. 유대인은 오경 중에 레위기를 가장 먼저 가르치는 전통이 있을 만큼 분리의 원칙을 고수하지만 분리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 위생 때문인지, 과학적 이유 때문인지 구체적인 기준은 없고 단지 ‘하지 말라(taboo)’는 선언뿐이다.
한국교회 우물쭈물 공포팔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진노?
천재지변 때마다 주장해
천장 날아간 교회도 심판?
모호한 정결과 부정의 기준
분리의 원칙을 정결로 해석
분리된 삶 고수한 이스라엘
규정, 구체적이지 못한 선언
분리의 원칙을 고수한 이유
종교 유지 위해 분리는 필요
血 바라본 관습이 만든 분리
짜라아트 발병 분리도 같아
◇분리는 오로지 종교적 이유에서 필요
분리의 기준이 모호해도 분리는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종교학자 엘리아데(M. Eliade)는 정결과 부정으로 구분한 대립적 관계에서 거룩을 설명한다. 거룩은 속된 것 없이 자신을 나타낼 수 없다. 속된 것이 있기 때문에 거룩함도 있다는 원리다. 속과 성의 변증법인 셈이다. “너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여야 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여야 한다.”(레위10,10)
따라서 야훼 하느님은 모세에게 ①음식법 ②출산 규정 ③피부병 ④몸의 분비물 ⑤대속죄일 ⑥성결법전을 계시한다.
음식법 기준이 모호하다 쳐도 출산한 여인과 월경 중인 여인이 부정한 건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글러스는 생명의 유출(流出)로 설명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피를 생명으로 이해했다(창세9,4; 레위17,11; 17,14). 그 피가 땅에 닿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창세4,10-11). 피를 흘리는 월경과 출산은 죽음과 맞닿은 상태이므로 부정하다고 이해했다. 고대 서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월경과 출산을 모두 부정한 이집트, 월경은 자신 뿐 아니라 접촉과 근접만 해도 부정이 옳다고 믿은 바빌로니아, 월경 중인 여성을 진지 밖으로 격리시킨 초기 이슬람교, 일상에서 격리한 고대 페르시아, 출산 후 3일 간 집에 들어간 사람에게 부정을 옮긴다고 규정한 그리스 카타르틱 법, 출산 두 달 전부터 격리하고 태어난 남아는 3개월, 여아는 4개월 후 정결하게 된다고 규정한 힛타이트 규례는 레위기와 흡사하다. 피의 유출을 부정으로 본 관습은 칼빈 시대에도 이어졌다. 출산한 여인의 부정한 기간이 여인 스스로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탄식하게 하는 기간이라니….
개역개정 성경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짜라아트(תערצ)는 NIV에서도 ‘전염성 피부병(infectious skin disease)’으로 번역했다. 나병균에 의해 감염되는 전염병인 나병은 문둥병과 한센병으로 불리는데 정작 성경의 나병은 한센병과 증세가 다르다. 짜라아트에 걸린 사람을 부정하다고 선언할 뿐이지 죄인으로 보지 않았고, 하느님의 진노에 의해 발생하거나 두려운 병으로 기록하지도 않았다. 레위기를 통해 피부병 증세가 발생하면 격리하라고 덤덤하게 종교적 의식을 나열한다. 데이비스(Margaret L. Davies.)와 웬함이 문둥병과 나병, 한센병 같은 단어가 번역의 오류라고 지적한 이유다.
◇거룩은 하느님의 속성을 닮아가는 삶
분리의 원칙은 레위기 19장에서 정점을 이룬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19,3) 거룩은 분리의 원칙을 고수한들 이뤄지지 않는다. 이웃을 억누르지 않고(레위19,13), 재판 때 불의를 저지르지 않으며(15)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17) 앙갚음이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18).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할 때” 하느님의 성품 속에서 거룩을 유지할 수 있다. 부정의 상태는 위생상 더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제의에 참석할 수 없는 ‘자격 박탈 상태(disqualification)’ ‘하느님 없음(desacralization)’이다.
“이 목록(레위기 규정)은 거룩에 대한 사상의 혼란이 아니라 질서로 발전시키며 올바름과 올곧은 일처리를 거룩한 일로 드높이고 있으며 모순과 이중적인 일처리를 거룩에 반한 것으로 말한다. 도둑질, 거짓말, 거짓 증거, 저울 속임, (얼굴엔 미소를 띠면서) 귀먹은 자에게 욕을 하는 등의 본심을 숨기는 행동, (말은 친절하게 하면서)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 등은 분명히 보이는 것과 실제가 모순되는 행동들이다.” (고든 웬함, 『모세 오경』, 박대영(역), 성서유니온, 2007, 157쪽)
그러나 교회는 거룩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특정 행위를 하지 않으면 되거나, 특정 행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어른들을 상대로 십일조가 그렇고, 청소년에겐 성 엄숙주의나 게임 중단 같은 공포팔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레위기의 하지 말라는 규정엔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제사장이 부정을 선언하며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기록하지 않는다.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대답은 당시를 살아간 고대 이스라엘 백성만 알 수 있다. 언어의 소격화(distanciation)는 오로지 질문을 통해서 끊임없이 답을 찾아가야 함을 말해준다.
그 답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거나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기 위해 인간의 교만을 꺾는 하나님의 역사쯤으로 해석하면 교회만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를 유지하고 종교적 삶을 살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했지만 현대 교회에 율법이 더는 어떠한 효력도 발생하지 않듯이(마태5,17; 로마13,10). 왜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한8,32)이라 말했는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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