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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돌아보는 사건

[돌아보는 사건] 내가 퀸덤을 안 보는 이유

입력 : 2019. 10. 05 | 수정 : 2019. 10. 06 | A33

 

그날도 저녁 늦은 밤, 내 방을 찾아와 학술 동아리 관계자가 작성한 글을 소개 받았다. 이런 글도 있다는 차원의 소갠 줄 알았는데 뭔가 여운이 길어 눈동자를 쳐다봤다. ‘좋아요’를 눌러달란 의미였다. 이 인간 앞에서 원치 않은 서명도 해준 적 있던 터라 두 번 속기 싫어 물었다. “근데요?” 안 누르겠다는 얘기다. 적어도 어떤 얘긴 줄은 읽어봐야 누르지 않겠나. 살짝 서운했는지 내 방을 나서던 풍경을 그 땐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든 ‘~하는 방법’으로 발견하는 특성이 여기저기 떠올랐다. 자영업 성공하는 비결, 유튜브 대박 나는 비법, 블로그로 돈 버는 일곱 가지 기술, 브런치 작가 합격하는 팁, 이젠 자신의 성공한 인생을 상품화한 브이로그까지. 소소한 일상도 상품으로 내보내 너도나도 “나는 이렇게 성장해”를 보여주는 진풍경이 줄이었다. 좋아요를 요구한 그 녀석도 틈만 나면 “나는 성장해”를 올려두곤 했다. 아이돌도 성장하는 시대에 채권자 팬덤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내 아들 내 딸에게 “~야 정신차려”로 운 띄워 연애할 시간에 연습하라고 구박한다.

머지않아 트와이스 사나를 만나기 위해서 앨범 백 장 구매했단 이야기를 접하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100장이면 얼마야.’ 마이너·메이저갤러리 이곳저곳 떠도는 영혼들은 무엇이 고맙고 감사한지 아이돌판 품앗이를 경쟁하듯 행사해 디시 서버가 버벅댔다. 내 아들 내 딸을 렌즈에 담아내기 위해 행사장 앞좌석에 벌떡 일어나 여기 찍고 앞 사람 어깨에 대고 저기 찍는 동안 엠넷이 야심차게 준비한 경쟁프로그램 조작 의혹이 사회 문제로 부각됐다. 의아했다. 경쟁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왜 경쟁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걸까. 열광하던 틈 사이에 ‘성숙 내러티브’를 발견했다.

 

ⓒ엠넷


혹자는 내가 하지 못한, 내가 이루지 못한 성공. 내 아들, 내 딸이 이뤄내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이런 글이 어떻게 포스트 박정희를 요구하던 신문에 실릴 수 있을까 경악했다. 이들 움직임은 조직적이고 치밀하다. 아이피(IP)를 바꿔 댓글을 달고, 추천·비추천을 누른 후. 투표하고 인증하면 상품까지 주겠다고 유세(遊說)했다. 현대판 막걸리 고무신 선거가 따로 없다. 여론은 연관검색어 정화부터 시작한다. 연관검색어가 정화되자 팬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혹여 내 아들 내 딸을 비판하면 학교는 어디니, 지방에 사니 묻는 댓글도 보았다.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성숙은 무엇일까?

무대에 내려온 류수정(21)이 “인생을 송두리 째 비난해 애 먹었다”고 속상한 감정을 드러내자 자칭 팬은 “다른 팀들은 이걸 기회 삼아 피터지게 연습해서 무대 올라가잖느냐” “눈치 빠른 애들은 바로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라고 한다”고 가르쳤다. 러블리즈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아이돌이 되어 인터넷 박제의 시대에 조리돌림 당한다. 키워드는 ‘노력’과 ‘절실함’이다. 내 아들 내 딸이 노력한 진짜 앞에 너의 조신하지 못한 가짜 노력이 나의 분노를 자극하는구나. 갓을 쓰고 “엣헴!” 나부낀 부채에 성공과 노력, 이것이 인생이란 배틀이 키보드로 이어진다. 근엄한 칼춤을 노력과 절실함으로 내보인 것이다. 노력과 절실함은 공정성을 담보한다. 그 공정의 집합체인 경쟁프로그램이 조작이었다니!

 

인생의 다양한 선택에 한 예로 수능을 들었는데. 피 터지게 준비하는 수험생들 마음을 아느냐고 훈계하는 광경. 러블리즈가 준비한 무대보다 수험생들이 더 힘들다는 댓글.



운에 맡겨 둔 팬사인회 조차 돈 많아야 갈 수 있단 사실에 놀랐고, 팬덤 활동하려거든 이제껏 구매한 굿즈와 앨범을 인증해야 한다는 현실에 이질감을 느꼈다. 아이돌은 결국 돈으로 만들어 낸 성장 아닌가. 돈 없으면 덕질도 아니란 시대에 ‘공정성’이란 공허한 이야기가 대한민국을 감돌아 너도 나도 힘들지 않느냐 묻는다. 그래, 너는 부모 잘 만나 그랬을 테고, 나는 부모 잘못 만나 헬조선을 살아가는 구나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청년들이 분노할 줄 알았다. 웬걸 광화문 네거리엔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부꼈다.

법무장관 딸이 인터뷰 중 “고졸이 돼도 시험은 다시 치면 되고, 서른에 의사가 못 되면 마흔에 되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자 아무 생각 없이 다음 면을 넘겨짚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고졸vs지잡대생’ 서로 물고 뜯던 어느 게시판 일상이 떠올랐다. 돈 많이 벌어 성공하면 장땡이란다. 성공도 자격이 있다나 뭐라나.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 관절도 쇠약해지는 마당에 “라떼는 말이야~”로 운 띄울 광경을 상상해보니 구역질이 난다.

 

아이돌 그룹 더보이즈 큐가 모모랜드 낸시와 합석해 이를 몰래 촬영한 팬이 폭로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아이돌에겐 사생활도 없는 철저히 공개 된 삶을 살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