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 06. 13 | A33
고등학교 입학한 그 해 무렵 세상이 달라졌다. 하루아침에 야간자율학습이 정말 자율로 바뀌었고, 체벌 금지는 현실로 다가왔다. 교사들은 몽둥이 대신에 벌점 카드를 들고 다녔고 6시 20분, 마지막 7교시를 마치고 가방을 싸매어 도서관에 입성하던 시간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석식 대신 다이제·커피 인연이 시작된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에 남는 이유다.
선생님 말씀처럼 가장 천방지축 아이들의 소란들은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2학년, 3학년, 어렵게 수업을 진행하던 날들은 줄었고 혹여나 무질서한 소리가 들리거든 불편한 눈빛들로 상황은 쉽사리 정리되고 말았다. 어느 대학을 가야할지 고민하던 한숨들이 늘어났고 친구 등짝에 선생님의 등짝 스매싱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미래를 걱정해야 할 현실 앞에 힘으로 통제하던 시절은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다. 완전히 체벌이 없어진 학교의 아노미(anomie) 현상은 현실이란 각자도생 앞에서 어떠한 맥도 추리지 못했다. 오히려 대학을 가야만 사람 구실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선생님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남자끼리면 싸울 수도 있다면서 주먹이 오가던 풍경을 ‘정겹다’고 표현한 아이들 입가에 어느새 “3학년 때도 주먹질하면, 그건 안 되는 거지”라는 말이 맴돌았다. 나라면 ‘철없다’고 표현할 그 정겨운 풍경들을 아이들조차 한두 살 나이를 먹으며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다. 현실은 주먹보다 앞서는 무언가가 있으며, 나라면 무언가를 질서이자 생래(生來)라 표현할 그것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갔다. 그래서 철이 든다는 건 무거운 일이고 모두가 겪어야 할 사회화 과정이다. ‘어른이면 세상의 숱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살아야지 그걸 그대로 놔두고 산단 말이냐’ 착각하던 시절이 지나자. 비로소 ‘어른들도 못하는 일들이 있구나’를 깨달았다.
그래서 주먹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감정으로 어떻게 해보지 못하는 일들 속에 지끈한 머리를 싸매어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선생님 마음 속 고백이. 어째서 무질서 학교를 걱정하기보다 주체적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철없는 아이들에 시선이 머물렀는지를 지금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주먹으로 세상을 덤비려는 철없는 어른들이 어째서 자기보다 작고 나약한 존재들을 향해서 힘으로 제압하려는 건지. 지 딴에는 질서라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주먹으로 호통으로 권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생래가 있다는 현실을 깨닫는다면 체벌이란 가면으로 가려진 반(反) 생명적 훈육은 일찌감치 버렸을 것이다.
사회는 변해가고 발전해 가지 않겠냐고 말했건만,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하던 선배의 ‘역사는 순환한다’는 교훈 앞에 이상적 세계는 생래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테지만. 폭력성이 어쩔 수 없는 생래라면 힘없음을 지켜주고, 고귀한 것은 그 자체로 놔두려는 마음 또한 생래이기에. 소중함을 지키려는 강력한 힘이 하찮은 힘을 이긴다는 진리를 붙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학업을 그만둔 아이들이 초등생을 건드린 기사에 분통을 터뜨린 지점도 자신들 선배에게 불려가 고개를 숙이던 순간이다. 그렇다면 고귀함이 고귀함을 낳는다면, 어느새 악의 축이 되어버린 민주화 세대의 역설적 모습들을 조명하는 보수 언론의 ‘너희들은 저들처럼 되지 말라’는 식상한 교훈에서 벗어날 힘이 오늘의 고귀함을 지키려는 용기에서 비롯할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신경 끄는 게 각자도생에 좋을 거라고 망상을 늘여다 놓을 테지만.
줄곧 어른들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청년인 우리들이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들어주기보다 가르치길 좋아하고 기다리기보다 주먹부터 휘두르며 내 때보다 나 때를 강조하는 그런 철없는 어른, 그런 부모 자격 없는 아빠, 엄마의 손목을 잡아 “네 놈이 뭔 상관이냐!”는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알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뚫어져라 째려본 후. 이렇게 되받아치고 말 것이다. “그 아이가 당신의 물건이 아니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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