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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돌아보는 사건

[돌아보는 사건] 지옥도 간다는 마음으로

입력 : 2020. 05. 30 | 디지털판

 

교회 밖에서 코로나를 맞다보니 교회 안 사정을 생각지 못했다. 마스크 풀어놓고 휘핑크림 올려놓은 초콜릿 한 잔에 온 몸이 녹아버리자 작지도 크지도 않은 중형 교회 전도사 입에서 나온 말들은 걱정뿐이었다. 지금만큼 교회 사역이 중단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이제 막 예배당에 몰려든 교인들에게 돌아가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 처음 신앙생활을 쉬어본 교인들 뒷모습을 보면서 걱정을 이어갔다.


전도사 선배가 걱정한 부분은 애매한 중형교회가 오래가지 못하리란 점에서 출발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교회들은 역사와 전통 뿐만 아니라 나름의 강점을 가진다. 예를 들면 오순절 교회라든지 콘서트형 예배라든지, 제자훈련에 강점이라든지, 목사님 설교가 뛰어난 교회라든지, 청년 중심이라든지. 교회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처럼 따라오면 누구든 교회에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집 옆의 작은 개척교회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던가. 하나의 풍경처럼 남아버린 낡은 상가의 ○○교회는 차라리 만화나 드라마 배경에서 더 친근하다.


그래서 콘셉트가 모호한 교회들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 살아남기 힘들다는 주장을 선배가 펼쳤다. 공감했다. 코로나가 터져 예배를 중단 할 시점에 교회들이 걱정한 건 헌금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욕망이 아니라, 당장 먹고살아야 할 목회자 수급(受給)이란 현실 말이다. 매년 증가하는 교회와 목사 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교인 수는 7만 명(통합·2018), 3만 명씩 떨어져 나간다. 이런 말도 지겹다. 청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교회 내 청년 정책은 전무하다.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도 없고, 청년을 위한 공간도, 예배도 사라져 간다. 주일학교 학생들도 줄어드는 마당에 이미 일꾼으로 활동해야 할 청년들은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다.

 

 

 

 


당장 선배네 교회도 청년부 예배를 폐지할 예정이라 한다. 청년 담당 교직자를 채용해야 하는데 교직자 임금 파이(pie)가 줄어드니 더는 뽑을 수 없다며 내린 결정이다. 문제는 교회 일이 여전해도 교회에 남은 청년, 장년 할 것 없이 교인들이 나눠서 분담해야 한다. 교회를 나오던 무렵인 5년 전, 내게 주어진 일은 6가지였다. 군복무와 함께 3개의 작업이 동료에게 넘어갔다. 그 힘겨운 교회 일을 끝으로 나처럼 교회를 나오고 말았다. 오랜만에 잘 지내냐 안부를 물었고, 여전히 교회를 다닌다기에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였다.


당연한 일이다. 노동엔 대가가 있으며, 교회 일도 일종의 노동이기 때문에 임금 지불은 당연하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 일을 신성시하는 바람에 ‘봉사’로 이름을 대체했고 노동으로 보지 않으며 ‘사역’이란 말장난을 이어간다. 그렇게 하나 둘, 노동 착취를 견디지 못한 청년들은 교회를 떠났고, 그나마 관람하던 청년들은 재미없는 교회에 실증을 느낀 끝에 탈(脫)교회한다. 그래도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잖느냐 물었다. 상담 말이다. 고개를 흔들던 전도사 선배는 “현실을 생각하면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안 그래도 교회 일에 바쁜 교직자들이 상담할 수 있겠냐면서. 두세 가지 직업을 가진 목사들이라고 가당키나 할까. 


그래서 선배는 애매한 콘셉트의 중형교회야 말로 가장 먼저 무너지고 사라질 거라 예단했다. 지금의 교회는 현대인에게 보여 줄 매력이 없다. 교회 내 드럼을 들여오기까지 이단 소리 들을 용기를 갖춰야 했다. 전자음악(EDM), 문학비평, 청년정책, 목회상담, 진리를 사회에 내보일 교회만의 방법은 무엇인지 용기를 갖춰야 할 때다. 지옥에 간다는 마음으로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년에게 무엇을 건네줄지, 고민하지 않고서는 제도권 교회는 종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십자가만 달고 성경만 읽어주면 되는 줄 아는 철없는 목사들이 밖에서 성경 공부 하지 말라고 호통만 칠 테지만. 어느새 그 곳 교회의 광고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외부인과의 성경공부를 금지한다’는 제목 아래엔 항상 ‘이단에 미혹될 수 있기 때문’이라 적혔거늘, 며칠 전에 보니 ‘지옥에 갈 수 있다’는 문구로 바뀌었다. 이제 그런 공포팔이 먹혀들지 않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