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순히 어둠을 받아들이지 마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2019년 03월 26일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임세원 지음 | 알키 | 252쪽 | 1만3800원

나는 통증으로 잠을 못 이뤘고, 신경 차단 주사도 안 먹혔다. 과거에 환자들이 선생님은 이 병을 잘 몰라요하면, 나는 속으로 내가 잘 아는데 무슨 소리냐며 발끈했다. 내가 겪으니 그런 게 다 후회됐다. 점점 불안과 우울감에 시달렸다. 거울 속에 비친 폐인(廢人) 같은 내 모습에 견딜 수 없었다.”1

임세원 전문의의 고백이다. 우울증을 향한 선입견은 우울증이 일반적 슬픔과 비슷하다는 오해에서 시작한다. 늘 그렇듯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의대 6, 인턴 1, 레지던트 4년을 공부하고 국가에서 공인한 전문의 자격까지 취득했지만 선생님은 이 병을 몰라요를 들으면 답답했다.

그런 저자에게 우울증을 다시 생각할 계기가 닥쳐온다.

갑자기 찾아온 통증, 죽음을 생각하게 하다

새벽 골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주차장에서 뜻밖에 고통을 마주했다. 허리 디스크였지만 통증은 오랜 시간 저자를 괴롭게 만들었다. 당장 미국으로 건너가 연수 받아야 할 상황에서 통증은 이어졌다. 다른 전문의를 찾아갔지만 절대 안정외에 해답을 주지 못했고 꼼짝없이 절대 안정하던 차에 죽고 싶은 감정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 상황에서 자신에게 처방을 내리지 못했다.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아무 때나 찾아오던 통증에 죽기로 결심한 저자가 사고사를 위장한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 우연일까, 눈에 비친 가족을 보자 찾으려던 차 열쇠를 포기했다. 살고 싶은 감정을 느낀 것이다. 저자는 여러 차례 우울증 환자들은 죽고 싶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피하고 싶어 생각한 지점이 죽음임을 강조한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에 몸을 바쳐선지, 고통은 철저한 유물론자를 한의원과 카이로프랙틱, 명상센터와 성당으로 향하게 했다. 과학과 거리가 먼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더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연수 받은 마음 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 완화 과정(MBSR)’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 다양한 교훈을 배울 좋은 기회였다.

질병과 재난이란 첫 번째 화살은 피하진 못해도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러나 이해는 동의가 아니다. 우울한 감정에서 죽고 싶은 생각으로 발전해도, 죽음이란 어둠을 받아들일 순 없다.

이유 없는 고통과 원인 모를 아픔에 왜 하필이란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아무리 왜(Why?)를 물어도 원인을 찾기 어렵고, 찾았다고 하더라도 해결하기 쉽지 않기에 새로운 질문으로 대체할 것을 권한다. “어떻게(How)”. 구체적으로 어떻게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어떻게 행동할지 답을 찾고 실천하는 과정이다(97). 따라서 우울한 상태에서 내리는 대책 없는 결정을 유보하라고 권고한다(87).

질병과 재난을 첫 번째 화살에 비유했다면, 고통을 직면하고 나서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과 걱정, 후회를 두 번째 화살로 비유했다. 첫 번째 화살은 피하지 못해도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다. 최악의 경우를 맞이할 가능성이 최고의 경우를 맞이할 가능성만큼 적기에 학습된 절망과 우울은 더욱 수렁에 빠뜨리듯, 우울 시뮬레이션을 행복 시뮬레이션으로 전환해 작동하면 어떨까.

현실에 가까운 해결책 다섯 가지

그렇다면 단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답일까. 정신과전문의로서 보다 현실에 가까운 해결책을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hdale Paradox)를 통해 제시한다.

근거 없는 낙관보다 희망의 근거 찾기 신념 가지라: 말하는 대로 이루되, 말한 것을 실천할 아주 작은 행동 현실 직시하라: 현실부정분노로 이어지듯, 현실과 마주할 용기가 필요. 인내심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참아내는 의미보다 절망적 상황에서 일상을 살아 갈 인내를 의미. 지금, 여기를 기억하라: 미래가 고통스러운 현재의 연장선이 되지 않도록 오늘에 충실해야.

현실 직시에서부터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자세가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강조한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고통 앞에 무릎 꿇는 포기함이 아니라고. 인내심으로 저자는 통증 상황에서도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늘려갔다. ‘한계선은 매일 새롭게 그려진다는 고백이 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절망과 어둠에서 보내는 시간이 마냥 길어져선 안 된다. ‘우울한 감정은 마치 서해와도 같지만 밀물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이다. 물은 빠진다’(178).

외부와 단절 된 상태에서 건넨 네 가지 해결 방법

트라우마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도 다시 경험 되는 현상이다(181). 이를 시간으로 해석해 트라우마를 끝낼 방법을 설명한다. 바로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181)”라는 마음가짐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러감을 경험한다. ‘정신운동활성증가(Psychomotor retardation)’ 현상이다. 실제 행동도 느려지기도 한다. 트라우마와 우울증 환자들이 겪는 현상은 사회와 동떨어지게 만든다. 또한 자기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시선을 외부에 두지 않고 내부에 두며 외부와의 연결이 단절되고 만다.

과거의 연장선이 되어버린 현재의 상황에선 결코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끝임 없는 과거를 향한 후회를 한다고 해서 지금의 우울함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저자가 네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미워하는 마음을 줄여보려는 노력. 가족을 웃게 만들기: 변하는 환경과 상황에서도 가족은 변하지 않음. 팬으로 살아가기: 시선이 내부에서 외부로 바뀌게 됨. 도음 줌으로써 도움 받기: 나아져야만 무엇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고통이 여전한 상황에서도 무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함.

고민하다보면 이 네 가지는 일상이란 연결고리와 맥을 함께한다고 깨닫게 된다.

마지막까지, 그는 의사였다. 사진은 1월 2일자 한겨레 신문 디지털 기사.

의학적 치료 못지않게 중요한 건, 고립되지 않게 해주는 일

저자는 지난 해 1231, 세상을 떠났다. 30대 조울증 환자에 의해서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사로서 책임을 다했다.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자 도망가라 외쳤고 끝내 넘어지고 말았다. 3년 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의학적 치료 못지않게 중요한 건 고립되지 않게 해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자살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이겨낼 힘은 누군가와 연결 될 때 생긴다고 말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신질환에 선입견이 강하다. 정신병원 단어조차 인신공격용 카드가 되곤 한다. 저자 유가족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정신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2019. 1. 2).

누가 의학적 정의를 제외하고 우울증 환자를 정의하고 논하겠는가.


1  이 발언은 임세원 교수가 지난 2016년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와 인터뷰한 기사에서 인용하였다: 기사 원문은 [최보식이 만난 사람] "육체적 苦痛(고통)은 방아쇠… 최악 상황으로 모는 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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