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그 편의점 아저씨입니다.”: 『매일 갑니다, 편의점』

2018년 10월 08일

매일 갑니다, 편의점
봉달호 지음 | 시공사 | 276쪽 | 1만4000원

하나 둘, 바뀌어 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슈퍼마켙’이던 가게가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파리채를 들고 슈퍼마켙을 지키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나면 옛날 사람 취급받는 이 시대에 젊은 알바생의 편의점은 일상이 되고 말았다. 편의점은 내게 토요일 밤 야식을 제공해 준 곳이고, 상근으로 군복무하는 동안 따뜻한 커피를 건넨 고마운 곳이기도 하며, 초등학교에서 알바하는 동안 초딩(?) 동지들에게 초코에몽을 선사해 하나 되게 만든 장소다.

주로 편의점 점주를 평가(?)하며 그들을 의식하던 입장에서, 거꾸로 점주가 손님을 의식한다는 신박한 이야기에 주목했다. 편의점 아저씨가 전해주는 편의점 이야기다.

달달한 왕만쥬와 오로나민 한 병이면 피곤함이 사라졌다(2015.10.24).
일상이 된 편의점(2016.2.9). 아들처럼 챙겨주는 어머니 같은 점주님에게 받은 커피.

◇편의점의 겨울 봄 여름 가을

이른 새벽, 편의점 근무복 조끼를 입고 출근해 상품을 진열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타입랩스가 흐르듯, 한 아저씨가 등장해 일어서고 앉았다를 반복하며 계산과 글쓰기를 지속한다. 그 뒷모습을 때론 오해하지만, 그는 오늘도 편의점에서 먹고 마시는 편의점 아저씨다.

편의점의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한다. 마냥 춥고, 따갑게 불어온 겨울바람을 한랭하다고만 움츠리진 않는다. 그렇기에 손님에게 별명을 붙인다는 건, 또 하나의 관심이다. 스쳐지나간 만남에도 기울인다는 건 무엇이든 가벼이 여기는 우리 사회에 보기 드문 광경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 편의점도 기지개를 편다. 마진율 높은 제품을 맘 편히 공개한 책은 본서가 처음이지 않을까? 행사상품 이윤 배분, 발주 시스템, 담배 마진율과 담배권, 폐기의 비밀 등 좀체 손님 입장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편의점 속살이 보인다.

매출이 가장 많은 계절은 여름이라고 한다. 매출이 오르니 행복도 덩달아 오를 테지만, 짜증과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사람을 상대하다보니 괜한 오해에도 상심하고 열불도 난다. 물론 저자는 손님을 흉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는다. 오해마저 풀어가는 내러티브에 불쾌감보다 ‘아,’하고 깨달음을 건넨다.

전쟁과도 같던 여름이 지나, 싸해진 가을바람에 모두가 생각이 깊어지듯 편의점도 여물어간다. 어쩌다 개인 편의점에서 메이저로 전향(?)하게 됐는지, 하나 둘 밝혀간다. 가을에서 끝맺은 다양한 이야기에 ‘벌써 가을이구나’를 실감하게 한다.

◇저자의 변화: 냉혹한 현실─알아가는 현실─현실과 화해

편의점 점주로서 공개한 자료들보다 눈에 간 건, 저자의 변화였다.

어른이 되어가며 현실에 눈을 뜨고, 암울한 사회에 절망해버린다. 언젠가 우리네 청년들이 거대 담론을 다루지 않는 이유를 고민해보았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도 있을 테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음에는 워낙 거대한 절망이 도사리기 때문이었다.

사회 문제이자 구조를 바꾸어야 함에도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환원하는 태도도 부인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냉혹한 현실에 좌절하고 만다(127).

그렇다고 ‘던져진’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 경직된 몸을 기지개로 풀어주며, 또 오늘을 살아내는 수밖에. 끝없는 자기 세계로, 내면으로 들어가 숨어버린다면 더욱 냉혹한 현실에 나 자신과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실수, 어리석은 잘못에도 또 나를 용납한다. 그리고 타자에게 사과한다. 또 실패하고, 좌절한대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는다. 현재를 알아가고 하루를 살아내며(202; 213,2), 실패와 좌절, 작은 성공과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면서 또 오늘을, 지금을 이어가던 저자는 고백한다.

“오늘도 쓴다.
이것을 위해 나는 태어났구나.
지난날을 견뎌왔구나(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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