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보낸 야한 사진에 여자애 가방셔틀 된 이야기:『열일곱, 최소한의 자존심』

2024년 10월 09일

열일곱, 최소한의 자존심
정연철 지음 | 푸른숲주니어 | 208쪽 | 9800원

야한 사진을 잘못 보낸 태용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다섯 명의 이야기를 묶은 단편소설집. 야자를 빼먹는 수호 이야기가 이 책 제목의 내용이다.

가장 마음에 든 에피소드는 ‘너에 대한 소문’이었다.

실수로 보낸 야짤에 태용이 식겁한다. 같은 반 몬스터에게 비키니 사진을 보낸 것도 모자라 야한 말까지 덧붙였기 때문이다. “어때? 맘에 들어?” “꼴리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본 카톡방엔 건희 대신 여자애 몬스터가 있었다.

몬스터가 황당해할 만했다.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보란 듯이 아버지를 데려온 몬스터 앞에서도 실감나지 않았다. 담임은 잘못했다고 석고대죄라도 하라지만 몸은 움직이질 않는다. 건희는 ‘김태용’을 ‘변태용’으로 바꿔 부르며 놀려댄다.

몬스터의 이름은 박에스더. 에스더 몬스더 몬스터로 부르다 보니 달라붙은 별명이다. 몬스터는 별명답게 굴었다. 하루 신문을 먹어 치우는 데서부터 드림타워로 여행 간 사회 선생한테 쪽방촌 시위한 건 봤느냐고 바락바락 대들지 않나. 학생회장 후보로 나와 인권 침해가 될만한 파파라치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핏대 세운 녀석이다. 다른 후보들보다도 선심성 공약이 아니란데서 몬스터의 정직한 품성이 느껴졌다. 법과 원칙, 공정한 사회에 깐깐하고 예민한 그 애한테 이상한 걸 보냈으니 후회가 밀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인권 변호사라는데.

몬스터에게 찾아가 사과했지만 돌아온 건 법의 처단뿐. 그러나 용서할 마음은 있는지 온종일 가방셔틀을 시킨다. 노예계약인 셈이다. 이틀 째 이어진 가방 셔틀에 아이들이 뭐라 씹고 다닐는지 자존심만 갈리는데. 약속한 시간 예정된 장소에 다다르자 담배 피우는 동생에게 훈계 중인 몬스터를 발견한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태용이 다가가지만 몬스터가 뺨 맞는 모습을 보기만 한다.

돌아오는 길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몬스터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다. 문뜩 태용의 눈에는 당찬 여자, 박에스더가 보였다. 구약성경 속 인물인 에스더는 페르시아어로 별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내놓은 자식에다 선생도 포기한 자신과 달리 살아가는 몬스터. 털털한 주인공 태용의 독백이 지루하지 않다.

자유의 새노래

자유의새노래

정론직필의 자유·시대성의 창달·주체자의 기록

답글 남기기

Previous Story

[마음 속 그 사람] 같은 반에 발달장애라니, 반장으로서 얼마나 부담 되겠니:『괴물, 한쪽 눈을 뜨다』

Next Story

가면 껴도 변함없이 우울하고 불안한 삶:『가면생활자』

Latest from 도서

신문이 ‘큐레이터’라고? 건방 떨지 마라:『세상을 편집하라』

세상을 편집하라이영훈 외 4명 지음 | 한국편집기자협회 | 179쪽 | 1만8000원 냉정히 말해 신문의 문법은 죽었다. 더는 신문의 문법으로 말하지 않는 시대에 도달했다. 슬로우뉴스나 미디어오늘 정도가 지면신문 파워를 말한다. 아직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라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종합편성채널과 지면신문 중심의 전달력이란 점에서 1990년대 권능과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할 뿐이다. 신문 열독률 지표를 내세우는 것도 지겹다. 결과적으로 신문은 매체로서의 힘을 잃었다. “반면, 인터넷뉴스의 레이아웃은 대부분이 정해진 화면 크기에 간추린 제목과 텍스트만을 나열하고 있다. 뉴스의 경중완급이 확실치 않다. 포털에서 가장 많이 보는 기사는 그날의 중요한 뉴스라기보다는 제목에 낚인 경우이거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소식이 대부분이다.” 과연 그럴까. 조선닷컴은 디지털 뉴스를 다룬다. 지면신문인 조선일보와 발걸음을 함께하는데 때론

“신학의 여정, 기꺼이 돕겠습니다”… 미망이가 드리는 길잡이:『구약, 타나크, 신약 ─ 마침내 성경』

구약, 타나크, 신약 ─ 마침내 성경염진호 지음 | 문장공방 | 164쪽 | 1만1000원 사람들은 성경을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경전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신이 모세에게 불러주는 대로 적었다든지, 급하게 기록물을 모아다가 ‘신의 말씀’으로 편집했다고 보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한순간에, 한곳에서 만들어진 기록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서는 단순히 역사적 타임라인이나 교리식 공부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주입식 암기 중심의 교리 공부만으로는 구원의 다층적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성서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교리로 이해되지 않는다.”(11쪽4단) 성서는 도서관처럼 다양한 장르와 층위의 해석이 공존하는 문헌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성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주목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진화된 성서 성서의 편집 과정을 역사적으로 훑어보면 꽤 유연한 문헌이다. 이슬람의 코란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코란은 성서와 달리 중앙집권적 체계를 통해 편찬되고 유통되어왔다. 따라서 하나의 조직이 단일한 결정으로 경전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성서는 수 세기에 걸쳐 구전과 기록, 편집, 번역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구약은 기원전 5세기인 에스라 시대 이후 유대교 공동체 속에서 정립되었고 율법과 예언서, 성문서인 타나크로 확립됐다. 신약은 바울 서신과 복음서가 점차 권위를 얻으며 마르키온 논쟁 등 이단 대응 속에서 4세기 교회 공의회를 통해 27권이 확정됐다. 따라서 지은이는 성서가 코란처럼 ‘창조’되기보다 천천히 ‘진화’됐다는 점에서 공동의 산물로 보고 있다. ◇자유로운 첨삭과 편집의 전통 속에서 태어난 성서 신명기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모세 사후의 기록과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더디오의 첨언을 보면 성서의 후대 수정이 자연스러웠다. 지은이는 오히려 ‘후대의 자유로운 편집’에 주목한다. “성서 시대의 문서 전승은 단순히 학생들이 공부한 내용을 빼곡히 적어 낸 깜지처럼 ‘있는 그대로 글을 옮겨 쓰는 작업’이 아니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 시기의 글쓰기에는 후대의 첨삭과 편집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다.”(21,3) 사해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70인역(LXX) 등 다양한 버전이 병존했으며 각 공동체의 신학과 상황이 반영됐다. 바로 이 ‘성서의 변형’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방해물이 된다. 성서 곳곳에도 다양한 성서의 문헌이 가져온 “분열된 시대의 현실”(47,5)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성서의 변형은 오히려 성서 시대의 정황을 보여줌으로써 다층적인 전승 구조를 가늠하게 한다. ◇역사적·신학적 논쟁의 산물 ‘정경화 과정’과 성서 복원의 역사

제목에 심어놓은 ‘조선일보의 의도’ 편집자의 윤리를 묻는다:『이런 제목 어때요?』

이런 제목 어때요?최은경 지음 | 루아크 | 232쪽 | 1만7000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만천하에 알려지고 다음 날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단 네 글자였다. ‘부끄럽다’ 조선일보와 박근혜를 분리하고 국민과 조선일보를 이입시키는 유체이탈 화법도 놀라웠지만, 내가 정말 놀란 건 단문이었다. 조선일보는 단 네 글자로 부끄러움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2012년 3월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현장 조사 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공정위 조사관들이 신분을 밝히고 건물에 들어가려 했으나 출입을 50분 동안 가로막았다. 그새 삼성은 관련 자료를 통째로 폐기했고 책상과 서랍장을 바꿔 조사 대상 직원의 컴퓨터를 새것으로 바꿔치기한 게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다음 날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이랬다. ‘삼성 눈에는 이 나라 법은 법같이 보이지 않는가’ 가끔 조선일보 기사와 사설 제목을 보면 ‘심판자 조선일보’의 우스운 태도가 느껴진다. 조선일보의 제목은 언제나 강렬하지만 그 의도를 들여다보면 권력에 대한 적나라한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 날 신문은 제각각 1면 제목을 다채롭게 달았다. ‘”어찌 됐든 사과” 140분 맹탕 회견’ ‘고개만 숙였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맹탕, 고개만 숙였다고 비판했다. ‘’김건희 의혹’ 부인한 윤, 특검 거부’ 동아일보는 고집부리는 윤석열을 강조했다. ‘아내 처신 머리 숙이고 의혹 앞엔 고개 숙였다’ ‘윤 고개 숙였지만, 의혹엔 고개 저었다’ 국민일보와 한국일보는 대통령의 사과와 의혹에는 고개를 저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만 달랐다. ‘“저와 아내 처신 올바르지 못해 사과드린다”’ 마치 윤석열이 정중하게 국민 앞에 사과하는 내용으로 제목을 단 것이다. 도대체 의도가 무엇인가.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