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신자 가나안신자 이제는… ‘주권신자’ 시대: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2021년 10월 08일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김진호 지음 | 오월의봄 | 268쪽 | 1만6000원

김진호 신학자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한국교회 성장이 멈췄음에도 연이어 대형교회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교회들은 새롭게 신자를 받아들여 성장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교회로 이동해 뭉친 이른바 ‘수평이동신자’로 성장했다. 교인들은 경제력을 갖추었다. 따라서 강남권에 포진한다. 목사는 카리스마로 권력을 행사하기보다 계몽적 리더십을 구사한다. 자기계발·활발한 인간 네트워크·결혼시장을 갖춘 대형교회에서 웰빙을 찾는다. 저자는 ‘후발(後發)대형교회’라 이름 짓는다.

7-80년대 전국적으로 등장했던 선발대형교회는 대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빈민층 새 신자로 이뤄진다. 담임목사의 독단적 리더십에서 보듯,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한국 경제와 함께 한국교회도 급성장했다. 문제는 성장이 멈춘 순간이다. 급성장을 이루다 성장을 멈춘 한국 경제처럼, 한국교회 교인 숫자도 더는 성장하지 않는 시대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대형교회는 등장한다. 신학자 김진호 시선은 사회가 급변하던 1995년으로 돌아간다.

◇“교회도 선택해서 다닌다” 주권신자의 탄생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급변한다. 경제만 급성장한 게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시작으로 87년 체제를 맞이한다. 헌법을 새롭게 바꾸고 지방자치시대를 열었다. 최저임금 도입도 이 무렵 이뤄졌다. 사회 경제도 정치와 발을 맞춘다. 김대중 정부의 일본 문화 도입은 청년 세대에게 충격을 안겼다. 가수 강산에도 기성세대에게 분노를 느낄 정도였다. 인터넷이 보편화 된다. PC통신은 삐삐를 넘어서 새로운 소통의 창구로 등장한다. 88올림픽 맞아서 한국도 신자유주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세계화의 도래.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누구든지 마음대로 해외를 여행할 수 있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처음 선보이며 사교육 시장이 활발해졌다. 서울은 과잉도시로 변모했다. 집값이 상승한다. 89년 3월 1억 2천만 원 삼풍아파트 가격이 1년도 안 되어 2억 9천으로 뛰었다.

저자는 여기에 교통의 발달이 후발대형교회가 성장하는데 요인임을 지적한다. 마음대로 교회를 옮길 수 있는 환경은 교회를 상품으로 탈바꿈했다. 주권신자의 탄생이다. 중복 교적도 주권신자로 파생한 통계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교회는 옮긴 신자의 정보를 삭제하지 않는다. 교인으로 집계한다. 수평이동신자가 늘면서 중복 교적이 개신교 인구를 뻥튀기 했을 가능성이다. 문제는 중복 교적이 아니다. 교회를 상품처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니는 현상이다. 더는 독단적 리더십이 먹히지 않는 시대 속에서 교인들은 자기계발과 신앙 네트워크를 찾아 후발대형교회를 만들었다.

◇불안한 주권신자를 안아준 후발대형교회
한국은 1990년을 희망찬 시대로 출발해,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희망을 실현하지 못한 현실의 벽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90년대 말 경제 위기 속에서 많은 시민들이 박탈감과 소외를 경험했다. 세계적으로 교회가 성장했다던 3회에 걸친 성령운동 역사 뒤에는 경제적 현실의 문제가 자리했다. 급격한 산업화를 경험했지만 자본주의의 야만적 폭력성에 노출되자 대중이 신앙에 의지한 것이다. 과잉 생산 체계에 돌입하자 욕망하는 대중으로 바뀐 사람들은 소비자가 되었다. 소비함으로써 남과 다른 나를 꾸미려 했지만 소외감과 박탈, 배제에 따른 불안함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신앙은 신자유주의 흐름에 맞추어 작동했다. 번아웃을 호소하는 주권신자에게 위안을 주었다. ‘경배와 찬양’이 전국화된 시기가 1997년 외환 위기와 맞닿는 게 우연이 아니다. “(경배 예배 중) 멘트들은 내러티브 없이 한두 단어, 단두 문장에 그친다. 하여 그 멘트는 전체 예배의 일부이면서도 예배에 견고히 묶여 있지 않고 따로 튀어나와 예배 대중의 개인 속으로 파고든다. 예배 대중 개인이 겪는 실존 상황과 맞부딪친다. 그런데 그 멘트의 내용은 대부분 축복과 윤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여 예배 대중은, 전통적 예배의 집단성과는 달리, 개개인을 호명하여 축복을 선사하며 삶의 신앙적 규범을 부여하는 예배와 만난다. 이것이 ‘경배와 찬양’이 만들어내는 예배 효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치유 작용이 시작된다.”(86-87)

대한민국, 시대가 바뀌다
경제성장·문화개방·직선제
지대상승·교통발전·자기계발
동시에 초대형교회 등장

교회로 몰려든 주권신자
신자유주의로 불안한 사회
교회서 치유와 자기계발로
만족감 경험하며 멈춘 성장

주권신자의 오류
소비자로 전락한 주권 신자
사회 문제에도 무감각해져
자기만족 종교가 필요할까

◇주권신자가 늘수록 희미해지는 ‘그 바깥’
후발대형교회 교인의 특징은 웰빙을 추구할 경제적 수준을 갖춘 시민이란 점이다. 지대(地代)상승은 후발대형교회가 큰 건물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다. 후발대형교회가 주로 강남권에 위치한 이유다. 그런 교회들이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성장을 멈추었다. 새로운 상품을 내걸어야 했다. 다니엘학습법과 해외선교·경품전도·아버지학교·대안학교운동·결혼학교는 웰빙이라는 주권신자의 욕망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지만 무언가는 하기 때문에 후발대형교회 아이템은 소비자인 주권신자에게 만족감을 주는데서 그쳤다.

대형교회로 성장한 후발대형교회는 정치적 권력을 갖추었다. 고려대·소망교회·영남 지역 같은 ‘고소영’이 단어로 만들어졌다. 한국교회는 자체 정화에 관심이 없었다. 2007년 사학법 반대, 교과서 진화론 삭제 사건과 이어진 2014년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 2017년 종교인 과세 반대 흐름과 교회 세습은 선발대형교회나 후발대형교회가 개혁에는 관심이 없다는 민낯을 보여준다. 교회는 오로지 교회가 존재해야 하므로 존재한다. 보론(補論)에서 설명하는 한경직과 조용기의 신앙은 후발대형교회 이전에 70년대 교회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드러낸다. 더는 공산주의라는 증오의 정치가 먹히지 않는 시대에 도달했다. 다양한 아이템을 내걸지만 교회 성장은 해가 지날수록 어려워진다.

안산 꿈의교회는 드림펫 서비스를 선보였다. 예배 때 강아지를 맡겨준다니. 다음은 어떤 아이템, 서비스를 구현해 낼까. 그런다고 교인들이 교회로 몰려들까.

문뜩 의문이 들었다. 기독교인 스스로가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왜 김진호 시선이 웰빙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주권신자에 머물렀을까. 손가락으로 지목한다. “주권신자의 영향력이 강화될수록 교회는 ‘그 바깥’에 대해 무감각해진다.”(213) 소비자로 전락한 시민들이 드라마에 심취하면서 드라마를 제작하던 노동자에 주목하지 못하듯. 후발대형교회가 내미는 아이템을 떠받는 노동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갖추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마지막 장 맺음글에서 주목하는 교회 ‘그 바깥’ 주목하는 시선이 반전 같다. 왜 저자가 웰빙 보수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분명해진다.

대형 LED 전광판도 들여놓고 멋들어진 디자인의 자막까지 깔아 놓았지만 매력적이지 않다. 목사의 설교는 따분하다. 전문가를 초청한 강좌에 참여하면 참여했지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중소교회들은 대형교회를 꿈꾸며 그 시스템을 따라한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구도 신에게 주목하지 않는 시대에 차가운 공기를 느낀다.

자유의 새노래

자유의새노래

정론직필의 자유·시대성의 창달·주체자의 기록

답글 남기기

Previous Story

[자유시] 견제도 비판도 없이 마지막 축제에까지 이르자 사임 外

Next Story

[에셀라 시론] 녹림청월 이후의 시대에서 보내는 편지

Latest from 도서

신문이 ‘큐레이터’라고? 건방 떨지 마라:『세상을 편집하라』

세상을 편집하라이영훈 외 4명 지음 | 한국편집기자협회 | 179쪽 | 1만8000원 냉정히 말해 신문의 문법은 죽었다. 더는 신문의 문법으로 말하지 않는 시대에 도달했다. 슬로우뉴스나 미디어오늘 정도가 지면신문 파워를 말한다. 아직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라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종합편성채널과 지면신문 중심의 전달력이란 점에서 1990년대 권능과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할 뿐이다. 신문 열독률 지표를 내세우는 것도 지겹다. 결과적으로 신문은 매체로서의 힘을 잃었다. “반면, 인터넷뉴스의 레이아웃은 대부분이 정해진 화면 크기에 간추린 제목과 텍스트만을 나열하고 있다. 뉴스의 경중완급이 확실치 않다. 포털에서 가장 많이 보는 기사는 그날의 중요한 뉴스라기보다는 제목에 낚인 경우이거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소식이 대부분이다.” 과연 그럴까. 조선닷컴은 디지털 뉴스를 다룬다. 지면신문인 조선일보와 발걸음을 함께하는데 때론

“신학의 여정, 기꺼이 돕겠습니다”… 미망이가 드리는 길잡이:『구약, 타나크, 신약 ─ 마침내 성경』

구약, 타나크, 신약 ─ 마침내 성경염진호 지음 | 문장공방 | 164쪽 | 1만1000원 사람들은 성경을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경전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신이 모세에게 불러주는 대로 적었다든지, 급하게 기록물을 모아다가 ‘신의 말씀’으로 편집했다고 보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한순간에, 한곳에서 만들어진 기록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서는 단순히 역사적 타임라인이나 교리식 공부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주입식 암기 중심의 교리 공부만으로는 구원의 다층적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성서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교리로 이해되지 않는다.”(11쪽4단) 성서는 도서관처럼 다양한 장르와 층위의 해석이 공존하는 문헌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성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주목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진화된 성서 성서의 편집 과정을 역사적으로 훑어보면 꽤 유연한 문헌이다. 이슬람의 코란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코란은 성서와 달리 중앙집권적 체계를 통해 편찬되고 유통되어왔다. 따라서 하나의 조직이 단일한 결정으로 경전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성서는 수 세기에 걸쳐 구전과 기록, 편집, 번역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구약은 기원전 5세기인 에스라 시대 이후 유대교 공동체 속에서 정립되었고 율법과 예언서, 성문서인 타나크로 확립됐다. 신약은 바울 서신과 복음서가 점차 권위를 얻으며 마르키온 논쟁 등 이단 대응 속에서 4세기 교회 공의회를 통해 27권이 확정됐다. 따라서 지은이는 성서가 코란처럼 ‘창조’되기보다 천천히 ‘진화’됐다는 점에서 공동의 산물로 보고 있다. ◇자유로운 첨삭과 편집의 전통 속에서 태어난 성서 신명기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모세 사후의 기록과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더디오의 첨언을 보면 성서의 후대 수정이 자연스러웠다. 지은이는 오히려 ‘후대의 자유로운 편집’에 주목한다. “성서 시대의 문서 전승은 단순히 학생들이 공부한 내용을 빼곡히 적어 낸 깜지처럼 ‘있는 그대로 글을 옮겨 쓰는 작업’이 아니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 시기의 글쓰기에는 후대의 첨삭과 편집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다.”(21,3) 사해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70인역(LXX) 등 다양한 버전이 병존했으며 각 공동체의 신학과 상황이 반영됐다. 바로 이 ‘성서의 변형’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방해물이 된다. 성서 곳곳에도 다양한 성서의 문헌이 가져온 “분열된 시대의 현실”(47,5)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성서의 변형은 오히려 성서 시대의 정황을 보여줌으로써 다층적인 전승 구조를 가늠하게 한다. ◇역사적·신학적 논쟁의 산물 ‘정경화 과정’과 성서 복원의 역사

제목에 심어놓은 ‘조선일보의 의도’ 편집자의 윤리를 묻는다:『이런 제목 어때요?』

이런 제목 어때요?최은경 지음 | 루아크 | 232쪽 | 1만7000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만천하에 알려지고 다음 날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단 네 글자였다. ‘부끄럽다’ 조선일보와 박근혜를 분리하고 국민과 조선일보를 이입시키는 유체이탈 화법도 놀라웠지만, 내가 정말 놀란 건 단문이었다. 조선일보는 단 네 글자로 부끄러움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2012년 3월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현장 조사 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공정위 조사관들이 신분을 밝히고 건물에 들어가려 했으나 출입을 50분 동안 가로막았다. 그새 삼성은 관련 자료를 통째로 폐기했고 책상과 서랍장을 바꿔 조사 대상 직원의 컴퓨터를 새것으로 바꿔치기한 게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다음 날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이랬다. ‘삼성 눈에는 이 나라 법은 법같이 보이지 않는가’ 가끔 조선일보 기사와 사설 제목을 보면 ‘심판자 조선일보’의 우스운 태도가 느껴진다. 조선일보의 제목은 언제나 강렬하지만 그 의도를 들여다보면 권력에 대한 적나라한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 날 신문은 제각각 1면 제목을 다채롭게 달았다. ‘”어찌 됐든 사과” 140분 맹탕 회견’ ‘고개만 숙였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맹탕, 고개만 숙였다고 비판했다. ‘’김건희 의혹’ 부인한 윤, 특검 거부’ 동아일보는 고집부리는 윤석열을 강조했다. ‘아내 처신 머리 숙이고 의혹 앞엔 고개 숙였다’ ‘윤 고개 숙였지만, 의혹엔 고개 저었다’ 국민일보와 한국일보는 대통령의 사과와 의혹에는 고개를 저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만 달랐다. ‘“저와 아내 처신 올바르지 못해 사과드린다”’ 마치 윤석열이 정중하게 국민 앞에 사과하는 내용으로 제목을 단 것이다. 도대체 의도가 무엇인가.
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