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물음. 용서는 가능한가: 『용서에 대하여』

2018년 10월 08일

용서에 대하여
강남순 지음 | 동녘 | 264쪽 | 1만2600원

분노를 버려야만 용서가 가능하다며 진정성을 논하곤 한다. 하지만 막 달아오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편해져야 한다며, 귀찮다는 이유를 포장해 용서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너만 조용히 하면, 입 다문다면 아무 문제없다고 감정 상태를 터부시한다. 팔짱 낀 용서자를 통해서도 말이다. 용서 받는답시고, 무릎 꿇은 사람 앞에서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 선언하듯 서 있는 모습에서 의문이 들었다.

‘저게 용서라고?’

물론 이 책은, 명쾌한 용서 방법을 다루진 않았다. ‘별 거 없네’하며 이 책을 덮어버린다면, 이제껏 생각해보지 못한 용서를 앞으로도 고민할 일은 없을지 모른다. ‘왜 용서를 해야 하는 걸까’ ‘용서는 왜 필요한 거지’ ‘용서란 무엇일까’, 이 자리에 선 현대인에게 저자는 용서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전한다. 그리고 질문을 건넨다.

“용서는 분노와 양립할 수 있는가?”

◇분노라는 다양한 감정과 덕목으로서 용서

인간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분노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으며, 모든 분노를 우리는 “나, 화 났어!”로 읽진 않는다. 연인 간 분노, 이웃 간 분노, 가족 간 분노. 분노만 해도 한 두 감정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용서에도 양립 가능한 분노가 존재한다. ‘본능적 분노’ ‘성찰적 분노’ ‘파괴적 분노’.

문자 그대로 느껴지듯, 양립 가능한 분노는 성찰적 분노다. 성찰적 분노는 부당한 행동을 한 ‘행위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감정이 아니라 ‘부당한 행동’ 자체에 맞춘다. 성찰적 분노도 등한시 한다면, 영영 잘못에서 교훈을 얻기란 불가능할지 모른다.

성찰적 분노에서 용서의 두 모델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단념 모델’과 도덕적 의무인 ‘덕목 모델’이다. 분노를 단념해야만 용서 가능한 단념 모델은 분노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분노를 넘어 도덕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덕목 모델’은 가해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란 특징을 낳는다. 손만 붙잡고, 어색한 미소가 용서의 전부라면. 뭣하러 용서와 화해라는 대화가 필요하겠나.

◇성숙과 용서를 위한 다섯 가지

용서를 위해 저자는 몇 가지를 지적한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 인간이 사회 구조 속에서 함께─살아가며, 미래를 향한다는 존재라는 점을 말이다. 용서가 필요 없다면 가해자와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악마 같은 인간을 평생 욕지거리하며 살면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잘 안다.

가해자를 단일한 이미지로 보지 않으려 함에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숱한 실패에도 성숙할 오늘과 내일을 노래한다. 이 같은 ‘성숙’에 인간을 악마화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 설령 지금은 용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훗날 용서하게 될 자신에게 희망을 지시한다. 성숙이 가진 강점이다.

‘나는 성숙하는 인간이다’는 ‘너도 성숙하는 인간이다’를 받아들이게 해 본능적이고 파괴적인 분노에서 성찰적 분노로 성장해 가는 것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용서에서 판단해야 할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용서를 사유해야 할 이유다.

첫째는 대상이다. 단지 질투심에 의해 용서를 요구한다면, 그건 이기심에 불과하다. 용서하려는 대상이 누구인지 올바로 규명해야 한다. 둘째, 정도다. 여전히 남은 분노가 성찰적 분노인지를 구분하며 용서가 필요한 정황을 복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셋째, 시기다. 여전히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서 용서하는 건 적절하지 않듯, 적절한 시기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 동기다. 사회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가며 용서할 필요는 없다. 왜 용서하려는가. 다섯째, 방식이다. 성찰적 분노가 필요한 이유다. 가해자를 악마화하지 않으면서도 연민을 가지고 용서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제시된 다섯 가지를 살펴보면, 용서란 정해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저자는 용서를 “매 정황마다 유일하게 벌어지는 사건”이라고 밝힌다. 이 표현이 중요하다.

◇용서의 윤리와 용서의 정치 두 사이에서

왜 저자는 용서를 ‘정황마다 유일하게 벌어지는 사건’으로 표현한 것일까. 분노에도 여러 감정과 결이 존재하듯, 사람의 행위 역시 다양하기 때문이다. 뭉뚱그려 구조화하고, 표로 묶어버린다면 단일한 사건들로 눙치기 쉽다. 또, 일상에서 벌어지는 평범함으로 해석해버리면, 굳이 용서를 설명하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저자가 용서에 대해 어떤 제안을 건넨단 말인가.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알아서 잘─ 생각해보라는 말인가. 그래서 용서의 두 축, ‘용서의 윤리’와 ‘용서의 정치’ 개념이 등장한다. 윤리는 이상 세계(불가능성의 세계)를 가리키지만 정치는 현실세계에서 갖춰진 조건(가능성의 세계)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용서의 윤리’에선 누구든지 내 거처로 초대해 환대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불법체류자까지 넉넉히 받아 줄 순 없는 노릇이다. ‘용서의 정치’ 측면에선 불법체류자를 받아주는 건 범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크 데리다는 칸트와 달리 윤리를 정치 너머로 인식한다. 그에게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실행 가능할 용서만 있다면, 그게 어떻게 용서겠는가. 저자는 용서의 윤리와 정치라는 두 축을 세우고, 이를 나선형적 긴장 관계로 표현했다. 한 번에 윤리라는 이상 세계로 달려갈 순 없다. 그러나 차츰, 거리를 좁혀가며 걸어갈 순 있다.

◇용서는 완성된 상태일까: 가능성의 세계와 불가능성의 세계에서 건넨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

데리다에게 용서는 ‘밤’에 이뤄져야 할 작업이다. ‘밤’이란 메타포는 자기가 용서를 했다는 것조차 모르게 용서함을 말한다. ‘용서를 한 행위(또는 그 행위에 심취한다거나)’를 끊임없이 기억해, 가해자를 또 다른 피해자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 용서가 유일한 사건인 이유다. 용서한 행위조차 용서자의 우월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자세.

속 시원한 해답대신 물음을 던진 말미에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용서’라는 담론을 대화서로 물음을 던진 저자가 끊임없이 지시하는 건, ‘현재성’이었다. 용서의 정치와 용서의 윤리가 이분화 된 현실에서 느껴진 것은 ‘자폐’였기 때문이다. 가능성의 세계와, 인식이란 세계에 갇혀 서로가 자폐적인 존재로 ‘정신승리’하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반성.

누구든 용서할 때, 진정성을 논한다. 내 감정이 진짜라고 완성된 상태로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용서의 ‘현재성’을 인식한다면, 그 용서마저 완전한 하나의 완성품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끊임없이 물음을 건네며 이상과 현실의 나선형적 관계를 ‘함께─살아간다’면 저자가 밝히듯, ‘책 너머’ 타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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