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누나는 언제나 활짝 웃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을 그런 강직한 사람. 그런 누나가 갑자기 사라졌다. 인사도 없이 교회를 나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누나의 행방이 궁금했다.
머지않은 시기였다. 나도 새능력교회를 탈퇴했다. 목사의 신앙과 나의 신앙은 대립각을 세웠다. 그리고 갈등했다. 교회를 나오면서도 인수인계를 철저히 했다. 방송실 근무자 민찬이에게도 여러 번 강조했다. “교회를 나오는 건 목사님하고 신앙이 달라서야.” 차마 내 입에서 목사의 신앙이 틀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예의였다.
훗날 새능력교회가 젊은이의 노동력을 갈취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달에 교통비 5만원만 주면서 생색내는 목사가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군 생활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교회가 얼마나 노동력을 낭비하는지 깨달았다. 제값 치르지도 못하면서 교회를 경영하는 심보가 고약했다. 그러다 생각난 가영이 누나. 10년이 지나도 누나는 여전했다. 왜 교회를 나왔는지 물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교회 일에만 묵묵히 충성하다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노동 착취로 나온 줄 알았지만
“전혀, 그땐 뭐든지 괜찮았어”
일요일 아침이었다.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도착했다. 모르는 누나가 예배당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일학교 학생들 모두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누나는 생글하게 웃으며 “안녕” 인사했다. 금세 모두가 마음의 문을 여는 건 당연했다. 초특급 핵인싸 성향을 가진 누구에게나 붙임성 좋은 누나였다. 사모의 첫 인상이 생생하다. “난 가영이가 신천지에서 온 줄 알았어.”
가영이 누나가 처음 교회 다니던 시절의 새능력교회는 좋은교회라는 이름으로 지하 예배당에서 월세 살이하고 있었다. 젊은 부서라고는 학생회와 주일학교밖에 없던 시절 청년부는 상상도 못할 만큼 규모가 작았다. 당시 가영이 누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친구 수정이 누나가 전도해서 교회에 놀러온 게 인연으로 닿은 것이다.
◇누나와 나의 관계
나는 고등학생 시절 무척 까다로운 아이였다. 참 예민했고, 거칠었다. 그래서 누나에게 미안한 에피소드가 많다. 예민한 날이면 방송실에서 말없이 조용히 일만 하곤 했다. 누나가 인사라도 하려고 문만 열면 바로 째려 봤으니. 누나 입장에선 ‘바쁜 거 안 보여? 닥치고 문 닫아’로 들렸을 것이다.
충분히 누나는 나를 피하면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나를 회피하지 않았다. 언제나 내 기분을 맞춰 줬고, 예민한 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누나는 내 우울증의 근원을 알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나를 불쌍한 고등학생 아이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나를 교회의 식구로 생각한 것 뿐이었다. 그래서 듣기 거북한 충고도 전해주었다.
◇착하고 성실한 가영이 누나
누나는 나보다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일요예배는 기본이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도 참석했다. 중고등부를 주축으로 모인 학생예배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새능력교회는 2010년 새해를 맞아 좋은교회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사도 갔다. 이 과정에서 교인들은 수많은 헌금과 헌신을 갖다 바쳐야 했다. 나와 가영이 누나라고 해서 헌신의 길을 피한 건 아니다. 누나는 주일학교 교사로 나는 방송실과 교사 일을 병행하며 학생 예배에도 시간을 쏟았다.
이사한 교회는 지하 예배당과 비교하면 스케일이 달랐다. 지상 3층 건물로 이사한 다음부터 청소 인력이 필요해졌다. 누나와 나는 찬송가를 크게 틀고서 예배당을 쓸고 닦았다. “이런 건 청년들이 해야지”라면서 말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행사도 도맡았다. 연기면 연기, 춤이면 춤, 가영이 누나는 언제든 교회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나의 착하기만 한 성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거니 생각했다.
고마운 존재 가영이 누나
까다로웠던 나의 학창시절
묵묵히 이해하고 품어주다
때론 따끔한 조언 날리기도
착하고 신실한 교회 생활
생글한 미소 누나의 첫인상
일요예배부터 학생예배까지
성탄절은 물론 ‘놀라운 헌신’
지금도 의지하는 신앙의 힘
내게도 등불 같은 누나라고
◇누나의 그림자
내가 신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누나는 취업에 목이 마른 상황이었다. 어느날은 누나가 목사에게 허락을 받는 장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님. 주일(일요일)에 자격증 시험보러 가야 하는데 그게 주일에만 열리 거든요.” 당연히 목사는 거절했고 누나가 자리를 뜨자 목사가 한 마디 지껄였다. “가영이 쟤가 말야, 돈을 좇고 돈을 따라가서 문제란 말이야.”
토요일 밤이었다. 교회 주보를 인쇄하러 방송실에서 1층으로 내려가던 길에서 누나를 만났다. 학생, 청년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누나를 보았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누나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피로한 모습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교회 사무실에서 시험 공부를 하던 누나가 아예 앉은 채로 자던 날도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싶었다.
누나가 갑자기 사라진 건 2013년 9월이었다. 나는 그 시절 대학교에서 강렬한 신앙 체험을 한 후 였다. 누나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 뒤 였다. 교인들에게 누나의 소식을 물었다. 모두가 “모른다”고 대답했다. 새능력교회에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다. ‘교회를 나간 신자의 행방은 추적하지 않을 것.’ 누나의 빈자리는 새로운 누군가가 채웠다.
◇소녀에서 어른으로
누나를 다시 만난 건 작년 6월이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다. 누나가 무척 반가웠다. 딸과 아들, 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누나의 변함없는 모습에 솔직히 말해 눈물이 났다. 나는 누나와 아이들에게 샤브샤브를 대접했다. 키즈카페까지 다녀왔으니 아마 대 여섯 시간은 대화에 몰두 했을 것이다.
대화가 무르익자 나는 궁금해졌다. 그리고 물었다. “누나, 그때 왜 교회를 나온 거야?”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교회의 노동착취, 목사의 신념, 교리의 모순이 아니었다. 바로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었다. 누나는 그 시절 교회에서의 노동이 힘겹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오히려 가정과 학업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고. 교회가 견딜 수 있는 마지막 등불이었다고. 누나는 고백했다.
누나는 지금도 그때의 신앙을 믿고 있다. 나는 누나의 신앙을 존중하고 싶었다. “누나, 세상 참 살만한 거 같아.” 당신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이 고백에 누나는 화답했다. “재현이 네 입에서 그런 고백도 나오고, 오래 살고 볼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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