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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현실논단

[현실논단] 태평로1가 61-28번지 조선일보에서

한 시민이 광화문 광장에서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진행했다. 그 앞에 보이는 조선일보사.

 

어느 날 토요일이었다. 조선일보 1면을 정독하다 하단의 기사를 보고 놀랐다. 1면 상단에나 어울릴 크기의 커다란 세 줄 제목에 띄었기 때문이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겨냥한 기사 이후 4년 만에 정정보도문을 대문만한 크기로 게재했다. 박근혜와 조선일보 싸움은 송희영 주필을 몰아내고, 최순실이 터져서야 막을 내렸다. 둘 중 하나가 이긴 것이 아니다. JTBC 보도로 부랴부랴 토해낸 TV조선 기사에 국민들 시선이 잠시간 이동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다 할 특종을 보지 못했다. 저널리즘의 승리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비효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까지 이렇다 할 특종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국의 호(號)가 단독이 되었을 무렵 사람들은 조선일보에 주목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단독 기사에 조국 사태 네 글자만 뇌리에 남았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이 나라에 프레임을 섬세히 짜던 조선일보 손길보다 위선적인 조국의 엘리베이터 속 웃음을 기억한다. 대중 매체라곤 텔레비전과 신문, 라디오가 전부였던 시대가 지나갔다. 사회 담론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 다양하게 소비된다. 하나의 담론이 편중된 여론을 만드는 시대에 도달했다. 섬세한 손길이라 말했다. 신문의 예술적인 섬세한 손길이 이제는 헛발도 짚는 걸 보면서 ‘조선일보도 늙었구나’ 생각했다.


늙은 건 조선일보 그 신문뿐이 아니다. 원고지로 쓰는 맛을 느껴가던 고문(顧問) 자리에서 내려온 김대중 전(前) 주필에게서도 느꼈다. 조선닷컴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글에만 댓글 창을 막아버린 언론인. 할 말은 반드시 하기에 기자가 천직(天職)이라 자랑하던 조선일보 어른. 그가 쓴 칼럼을 읽으며 ‘당신도 늙었구나’ 생각했다. 안기부를 가리키며 남산에서 설렁탕 먹던 시절 험한 세상 살았다고 여겨오던 당신이 이젠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고 인정해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섬세한 손길로 지면신문 판짜듯 프레임 짜던 당신의 판단이 오늘의 조선일보를 만들었기에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언론중재법을
언론징벌법으로
바꿔서 불러도
부끄러움은 여전

 


인간을 전통적인 기독교의 의인(義人)과 죄인(罪人)을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김대중 전 주필 말마따나 사실이 반드시 진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건 사실이 아니다. 매일 조선일보 A2면에 실리는 ‘바로잡습니다’가 그렇다. 사실이 아닌 건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까지 조선일보가 눈 가리고 아웅이던 기사가 얼마나 될까. 디테일하게 예술적으로 교묘히 사실을 가려버린 수없는 바로잡지 않은 오보들을 조선일보가 더 잘 알 것이다. 단지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전시(展示)로써 끝나버려 죽어버린 오보 앞에 바로잡는다고 될 일인가. 선배 주필들 사진조차 쳐다볼 수 없어 글로써 사과한 지금의 주필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조선일보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졌느냐고 묻는다면. 김대중 본인은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수많은 기자들 땀방울 서린 기사들이 늙은이 손가락에 의해 잘려나간 슬픔으로 세워진 신문이라면 무어라 대답할까. 책임지는 자리에서 사과 한 마디 없이 편집 기자 손길로 만들어진 [바로잡습니다] 한 꼭지면 충분하다 진심으로 믿는 건가. 노무현 시대에 이은 대통령 때리기 놀이가 오늘의 사랑제일교회를 만들었고 대한민국 담론장의 질(質)을 저하시킨 원인 앞에 김대중은 일말의 책임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나. 지난 해 신문 열독률은 10.2%다. 지면신문 영향력은 앞으로도 사라져 갈 것이다. 허나 신문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 방식으로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화려했던 80년대, 지면신문에다 촘촘하게 수놓던 프레임 장인 조선일보를 보기는 힘들 것이다.


조선일보 구독을 해지한지 1년이 가까워진다. 신문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도 앞섰다. 걱정도 바보 같다. 신문이 없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안다. 덕분에 한 달 읽어 내려가는 단행본이 늘었다. 짧은 기사와 달리 긴 본문 덕분에 생각할 시간도 깊어졌다. 며칠 전 독자 아닌 신분으로 조선일보를 보았다. 디테일한 디자인에서조차 헛발 디딘 조선일보를 느꼈다. 어른들 말씀을 빌려 기강이 해이해진 걸까 물었다. 어렵게 기사를 채우는 고통 속 편집 기자라 부르는 노동자를 생각했다. 그러나 오십 년 세월의 기자, 김대중 칼럼은 믿고 걸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