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 02. 28 22:20 | A21
밤을 들려줘
김혜진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68쪽 | 9500원
아이돌 그룹 세타나인 바라보는 네 명의 엇갈린 시선들
저서 ‘밤을 들려줘’는 아름답고 멋있게만 포장해온 아이돌 세계의 층위를 다양한 시각으로 그려낸다. 저자는 몇 년 지나면 그 의미가 완전히 바뀌거나 사라질 소재를 피해왔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핑클과 SES. 이름과 배경은 사람들 기억에서 낡아버려 사라졌지만 이들 바라보는 팬들의 동경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팬덤 기저에 있는 현상을 포착하는데 주력했다.
아이돌 세계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아이돌이 살아가는 세계와, 그 살아가는 아이돌 세계를 동경하는 사람들의 세계. 두 세계가 다양한 층위를 만들어 팬덤의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이를 테면 뙤약볕 내리쬐는 여름 아래 장충체육관 바깥에서 “~님” “~님” 부르는 괴이함, 하루 약 안 먹어도 버텼다며 좋아하는 익숙한 문법, 특정 멤버 부모님을 부르며 정겨움에 취하던 낯선 인사, 몇 십 장 앨범을 구매해 손깍지를 끼냐 마냐로 논쟁하는 열띤 토론.
이 저서 등장인물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아이돌 세계를 벗어나거나 아이돌 세계로 달려가는 사람.
◇의찬과 소원: 경향성 가진 아이돌
스포일러 주의 3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 세타나인 소속사 연습생인 박의찬은 중학생이다. 뼈를 깎는 연습생 생활에도 돌아갈 길이 없는 건지, 아이돌이 전부인 건지 모든 걸 다해서 아이돌에 투신한다. 기회를 기회로 생각하지 못할 만큼 선배 눈치 보며 순진하게 살던 중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한여름에 있을 세타나인 콘서트가 의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연습생 1팀 리더 시리(김신욱)를 대신해 무대에 서는 일. 자정 너머 연습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별이 되기 위해 한밤중 연습하며 자기 몸을 투신하고 또 내던지는 광경을 열정으로 해석해야 할지. 자기 착취로 봐야 할지.
세타나인 음원을 찾아 듣고, 가사를 해석하며 한여름 밤 빛나는 별로 떠오른 이들을 좋아하던 장소원도 학생이다. 겉으로 볼 땐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딸로 보일 테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인터넷 어느 공간으로 들어가면 ‘위시트리(wishtree)’ 별명이 앞선다. 세타나인과 연결된 장소원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위시트리 소원에게 갑자기 연결을 시도한 건 정희나였다. 일면식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희나가 먼저 찾아와 묻는다. “세타나인 좋아해?”(141,5) 공방도 가고, 굿즈도 사고, 콘서트 티켓도 구하며 친해지자 소원은 친해져 본 적도, 친구라고 생각도 하기 전에 챙겨주는 희나를 보며 의문을 가진다. ‘왜 내게 잘해주는 걸까’하고.
의찬과 소원을 통해서 한 가지가 보인다. 아이돌은 하나의 경향성이란 사실. 우연히 뜨고서 곧 사라지고 잊어버릴 수명 짧은 존재라지만 아이돌은 말 한 마디 섞어볼 운명도 아닐 사람들과 연결하게 만드는 경향성을 가진다. 너무도 쉽사리 사라질 운명의 경향성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세타나인 보기 위해 투신한 시간들, 만지기 위해서 지출한 금액들, 다시금 돌아오지 않을 감정들은 한여름 밤 콘서트와 시리의 탈퇴처럼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성질을 말해준다. 따라서 아이돌은 내일이면 사라질 운명이지만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들의 기억과 시간은 무겁지 않은 양가적 특징을 가진다.
이 경향성은 어른인 척하는 사람들을 구별하게 만든다. 정답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들 말이다. 소원은 궁금했다. 무슨 이유로 희나가 세타나인을 좋아하는지. 의찬도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노래할 때 소리가 보여요?”(34,2) 우연히 대박 난 세타나인 성공은 공식조차 모른다. 세타나인 이전과 이후를 생각해보지 못한 소속사 입장에선 전략이고 뭐고 아무 말 대잔치 할 게 뻔하다. 소속사도 모르는 걸 누군가는 안다고 설치는 모습을 보면 경향성은 사람 보게 만드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정작 연습생 1팀 리더로 예찬 받던 시리는 의찬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뭐? 나도 몰라, 그런 거.”(34,3) 무엇이 희나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소원과 친밀한 관계로 연결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아이돌이 가진 경향성이 하나로 묶었을 뿐이다. 모를 땐 되도 않는 분석보다 모른다고 말하는 게 정직한 법이다.
아이돌은 경향성이다
덕질 통해서 연결된 관계
나도 모르게 이어졌지만
마음 모아 별을 응원한다
팬덤을 바라보다 발견하다
아이돌 통해서 엇갈렸고
아이돌 따라서 찾아가자
발견하는 다층적 공간
무엇이든 뜨겁게 사랑해 볼 것
한여름처럼 사랑해도
그 끝은 나를 돌보는 일
◇동욱과 가예: 별 찾으며 좇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이들
아이돌 세계 바깥에서 아이돌 현상을 바라보던 동욱과 가예는 사정이 다르다. 김신욱의 다른 이름 연습생 시리의 동생 김동욱은 대중에게 사랑받던 자기 형과 연결되지 않기를 바랬다. 유명 아이돌 그룹 소속사라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장점보다 단점이 큰 탓이다. 아이들과 치고받은 이유도 형 신욱과 연결되었다는 불쾌감. 하지만 아이돌의 경향성은 나쁘지만 않았다. 마음속에 그리던 김지유와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습생인 형 때문에 말 걸어왔을 줄 알았지만 지유의 능숙한 기타 연주와 주하의 즉석 공연은 다른 사실을 가리켰다. 자기 시간표에서 벗어나 지유를 생각하며 오디션 분석한 자료를 주었지만 동욱의 좋아하는 마음을 몰라주는 지유와 엇갈리고 만다. 실은 형과 엇갈리기 시작한 지점도 아이돌이었다는 점에서 다층적 공간을 발견하는 동욱이 용기 내어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는데…….”(134,3)
천체(天體)부터 애니메이션, 인형, 만화책, 그러다 세타나인에까지 도달한 윤지 언니를 좋아하던 이가예도 동욱과 엇갈린 공간을 발견한다. 아이돌과 좋아하는 것들이 가지는 경향성을 통해 윤지 언니와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가예보다 세타나인을 더 좋아하는 진드기 정희나와 더 친한 모습에 질투한다. ‘그 어떤 사랑도 일방적이지 않다. 받는 게 있으니까, 주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다’(255,2) 문구 앞에서 아이돌도 환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가예의 솔직한 질문에 윤지도 정직한 답변을 구사한다. “그치. 그런데 중요한 건 우리가 그 환상을 믿는다는 거야.”(255-256,1) 윤지는 알면서도 환상 속에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했는지 세타나인에게 집중하던 눈빛은 가예에게로 향한다. 세타나인에게 집중하고 있어도 가예 자신의 작은 말 한 마디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엇갈림의 터널 끝에 도달하자 다층적 공간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현상을 가리키며 “좋아하는 마음과 열정이 이미 존재하니까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우정과 희노애락까지도 긍정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착취를 당하면서도 착취당할 때의 행복을 긍정한다고 착취를 통해서 발생하는 범죄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아이돌 좋아하는 일을 사이비 종교처럼 저급하거나 잘못된 활동으로 보아서도 곤란하다. 따라서 “이미 존재하므로 소중하다”는 말은 비틀어서 “좋아하는 ‘내가’ 이미 존재하므로 소중하다”는 말로 이해하면 어떨까.
이 해답을 책날개에서 찾았다. ‘연예인 팬덤이 한심하다고? 천만에! 거기에는 각각의 아이들이 지닌 삶이 있고, 사랑과 결핍이 있고, 희망과 좌절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니 아이돌도 마음껏 사랑해 볼 것. 끝까지 가볼 것. 끝까지 가보고 그 사랑이 결핍이었는지, 좌절이었는지, 아니면 희망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를 스스로 찾아볼 것. 끝까지 사랑하는 과정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하고, 미친 듯이 웃기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아, 그래서 시제가 한여름 밤이었을까. 한여름 밤의 사라질 사랑이 하찮은 게 아니듯. 어느날 갑자기 추워질 가을의 경계선에 다다를 때까지 뜨겁게 사랑하라는 의미? 그 바깥을 나서던 새벽 1시29분 박의찬, 버스 같던 계획을 놓치고서 밤하늘 아래 정류장을 방황하는 동욱과 신욱, 바깥 어두워 두려워진 마음을 뿌리치고 희나의 손을 잡은 소원, 어두운 밤 산책하며 윤지 언니와의 사랑을 다시 발견한 가예.
사랑하는 존재가 별처럼 다가와서야 러블리즈를 떠날 수 있었다. 그 별은 이달의소녀도 아니었고, 트라이비도 아니었다. 하여튼 여자 아이돌은 아니다. 준현의 고백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이가예처럼 심장이 뛴다.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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