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 11. 30 23:30 | 디지털판
우리 사회에 바이러스처럼 퍼지고만 ‘유지하기’ 논리는 집단으로 등장한 녹림청월에서 도드라졌다. 자신들이 지켜야 했던 신념을 만들어진 캐릭터에 투영해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유지하기 방식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이들의 공격점은 자신들과 생각이 달랐던 파편화된 개별자로, 뭉치기도 어려운 개인에게 향했다.
백여 개가 넘는 가계정으로 구성한 녹림청월의 일관적인 주장은 유지하기라는 논리에서 비롯했다. 아홉 단계에 달하는 자작극을 공모해 ‘우리의 목소리가 옳다’ ‘집단이 맞는다’고 설파했으며 지금의 한국교회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비겁하고 한심한 철없는 것들의 유지하기 방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15년이 흐르고 이들의 실체는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무엇이 녹림청월을 증오하게 만들었나.
서사에서 캐릭터는 다양한 인격을 묘사하는 존재다. 다층적인 사회인 오늘날 선과 악이란 이분법 시각에서는 캐릭터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여성과 남성, 어린이와 젊은이,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지문이 같은 모양일 수 없듯 각각의 성향과 성격, 사고방식, 살아가는 삶이 존재함에도 녹림청월은 같은 것들로 묶어대고 폭력으로 대했다. 그 폭력의 방법은 아홉 단계에 달하는 갈등 자작극으로 특정 캐릭터를 좋아하는 이들을 사람들 사이에서 무리지어 인식하게 만들고 차별하도록 공모(共謀)·공작(工作)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양식, 삶의 정황을 무시하고 차별하게 만든 녹림청월은 피해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과 않는 건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를 끌고 와서 극단적인 양태를 보여주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며 죄인으로 복속하도록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모두가 교리를 지켜내려는 유지하기 방식에서 어긋난 행동을 하고도 옳다고 믿는 것이다. 다수를 이용해 호소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도 성서가 옳다며 문자주의 해석을 신봉하고 있으니 예수를 믿는 건지 문자를 믿는 건지 모르겠다.
녹림청월과 한국교회의 공통점은 자기가 지키려는 대상을 앞세워 극단적 논리로 대항하는 자세다. 신봉하던 캐릭터가 지닌 극단적 양태(樣態)를 내세워 인격과 존엄성을 변호하면서도 정작 공모·공작에는 눈을 감는 논리에 할 말이 없다. 성소수자를 축복한 감리교회 목사를 앞세워 거룩하고 경건한 척 돌을 던지고 있으니. 이름을 거론하면 알만한 목사들의 성범죄엔 눈을 감는 행태가 녹림청월과 뭐가 그리 다른 건지 모르겠다. 그런 예수가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한다(요한8,7).
15년 지나 흔적조차 사라진 녹림청월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한국교회엔 막간(幕間)의 돌이킬 시간이 있다. 고상한 코이네 그리스어 읊으며 메타노이아(Metanoia)만 남용하지 말고 직접 몸을 돌려 성소수자들을 바라보라. 입이 있으면 입을 벌리고서 “미안하다” “사과한다”고 말하라. 예수는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자와 함께 했다. 무너지는 교회에 감(感)조차 오질 않는지 코로나가 끝나면 교인들이 돌아올 거라 믿는 이런 사람들이 예수가 한 말도 지키지 못하면서 신앙만 운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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