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 01. 17 | 수정 : 2020. 01. 18 | B4-5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 풍경은 진지해서 웃겼다.
명찰 따위 부착하고 다신 보지 않을 듯한 단호한 발걸음은 싱글벙글 미소 짓던 표정과 제법 어울렸다. ‘열광적인 찬송 소리’ 멘트가 들려오자 두 손들고 열창하던 교인들의 흰 소복이 교회 밖에 설치된 대형 TV에서 기괴한 풍경으로 연출됐다. 이들은 자정이 지나 “야 이 씨XX아!” 강대상 뒤엎는 광경을 상상이나 했을까? 열광적 기도 속에 겨우 잠입한 KBS 카메라엔 김이 서렸고 흡사 흰돌산 기도원 같았다. 곧 휴거(携擧)가 불발 됐고 희대의 종교 사기극은 그 날로 끝인 듯했다.
신천지도 그랬다. 교회 방송실에서 근무하던 2008년. 그 때만 교인 수 4만 명, 10년이 지나 20만 명까지 불어난 엄연한 종교단체였다. 이젠 10만 명이 모여 수료식을 치른다고 하니 교회 밖 사람들은 신천지의 존재를 물었다. 한국 개신교회는 신천지의 존재에 까무러쳤다. 교회 출입구에 떡 하니 붙은 ‘신천지 OUT’은 부적처럼 견제해 대니. ‘청춘 반환 소송’에서 신천지 변호인 측은 이렇게 변론했다. “신천지란 사실을 나중에 밝힌 뒤에는 그만둘 자유의지가 원고에게 있었다.”
나도 교회를 다닐 땐 이런 교회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다니지 않았다. 자유의지도 자라기 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자발적으로 10년이란 세월을 교회에서 지냈으니 더욱이. 신천지처럼 모략전도도 아니었고 다미선교회처럼 시한부 종말론도 없었지만 ‘천국과 지옥’ ‘앞자리에서 예배 드려야 은혜 받는다’ ‘영적인 세계’ ‘타락해가는 세상’ ‘주님 오실 날이 머지않았다’식의 메시지는 충분히 교회에 붙들어 놓을 장치가 되어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예배당 왼편에 마련한 컴퓨터 앞에 처음 앉는 순간 교인석에 앉았을 때완 차원이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70평 상가에서 건평 300 건물로 이사하고 방송실도 꾸려졌다. 그렇게 8년. 방송실은 교인들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처음 보는 뒤통수가 보일 때면 그런가 보다 싶지만. 익숙하던 뒤통수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증이 샘솟는다. 소문에 소문을 거쳐 방송실에까지 들려올 때면 이내 해소된다. 조용히 일하던 방송실까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도 교회는 자발적 착취를 이용해 교회라는 구조를 연명한다. 이 에세이가 편파적이라고? 교인석이라곤 다를 줄 아는가? 방송실 위치는 후미진 곳 구석이라 온갖 편파적 정보들이 난무한다. 사람은 자리가 만든다고 한다. 편파적 궁금증은 방송실에 앉았을 때부터 언제나 존재했다. 학창시절 교회에 날려 먹은 시절이 아까워 꿍쳐둔 원고를 끼적이려다 싣지 못했다. 근데 결정적 소문이 들려왔다.
‘청춘반환소송’
장난감처럼 요지경 같던 교회에서의 풍경이 보이노라 말하겠노라. 교회는 실명 대신 적당히 ‘참여교회’라 부르겠다. 교회 사무실, 예배당, 식당, 유아실. 이곳저곳 자리에 앉은 이들은 지금부터 방송실에서 송출하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시라. 여전히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과 힘겨운 나날로 지내는 이들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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