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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시대여행] 다방 의자, 형광등 아래 “전도사? 할 만해”④

입력 : 2020. 01. 08 | 수정 : 2020. 01. 08 | B9

 

시대여행 <4>

 

의인 이후를 물으며 기도원으로 향한 2人
오래된 기도원 구석, 색 바랜 예배시간표
“사역할만하다”기에 생각해본 ‘삶의 자리’

기도원으로 향하던 길목에 대풍이를 생각하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의로워지는데 그럼에도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겠네?”

끊임없이 회개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알다시피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는 입장에선 무의미한 질문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던가. 한 때 죄책감을 안고 살아도 봤고, 죄에 경도되어 강박증도 앓았지만 끝내 신앙의 건너편에 서자 비로소 인간이란 존재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인간은 원래 인간이다.’

기도원은 산중에 서 있었다. 시내버스를 타고도 자동차로 6분을 더 달려야 도착한다. 가을임에도 산이라 오들오들 떨렸다.

“저녁 먹으러 가자.”

토요일 저녁 몇몇 교인 분들이 식사를 마치려던 순간 들어온 모양이다. 대풍이 어머니께서 “아, 그 말 잘한다던 형제님이시구나! 부흥사하면 좋겠어요. 호호” “아이고~ 학교는? 졸업하고?” “아, 네…. 잠시 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윤대풍 이 녀석…. 도대체 날 어떻게 소개했길래!

어머님과 기도원 식구들, 대풍이를 담당하던 담임목사. 이렇게 예닐곱 구성원과 따로 식사했다. 자리에 앉자 식사에만 집중했다. 담임목사를 보니 향후에 대풍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훤히 보였다. 대풍이는 목회학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한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중이다. 교회 일이 꽤 힘들었는지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부터 들어왔다. 무슨 일로 그만두고 싶다는 건지, 소상히 들을 필요를 느꼈다.

 

대성전 옆 숙소   갈라진 틈 사이에 건물이 햇수를 말하고 있었다. 다방에서나 볼 법한 의자 위엔 코팅한 예배시간표가 덩그러니 놓였다. 대개 순복음 계열 기도원은 2-30년 전부터 ‘~부흥성회’를 개최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정기예배에 10명 안팎 모인다고 한다.

 


도착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외관은 모르겠지만 내부는 꽤 오래된 건물인 듯 했다. 다방에서나 볼 듯한 소파에 올려진 ‘예배시간표’는 얼마나 모일까 묻게 했다. 벽지 사이 갈라진 콘크리트 벽면은 냉기가 머물다 사라졌다. 소변기에 물이나 떨어질지 걱정될 만큼 추웠지만 다행히도 동파는 아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자 화들짝 놀랐다. 엄지 크기 거미가 지네처럼 왔다 갔다 했다. 거미를 죽이고 매트 아래 바닥에서 대화를 나눴다. 기도원 원장님께서 흔쾌히 허락한 방에서.

“전도사 생활 할 만해?”

“응. 힘든 때도 있긴 한데 그래도 할 만해.”

힘든 때를 물었다. 전도사도 교회 일이니 인간적이고 편하지 않을까 싶을 테지만. 환상에 불과하다. 최저임금 위반에 퇴근조차 눈치주고 성탄절 공연이란 미명아래 쓸모없는 자발적 착취에 작정기도라는 이름으로 결속하기 바쁘다. 그 사이 안식년조차 없는 전도사들은 바쁘게 구둣발만 흔든다. 큰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큰 교회에서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라는 자부심은 어디에 근거한 걸까.

장로가 닦달한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업무량에 치여 사는 건지 물었지만 둘 다 아니었다. 다행이다.

“성도님들이 전도사님이라 부르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주일마다 넥타이를 매고 가는데 성도님들이 ‘전도사님’ ‘전도사님’ 그러는데 나보다 대단하신 분들이 나한테 전도사님이라 부르는 게 편하지 않아.”

문제는 또 있었다.

“교회에서 방언도 크게 못하고 찬양도 잘 못 불러서 그게 아쉬워.”

한국교회를 살리고 성장시킨 원동력은 주여 삼창이다. 순복음중앙교회라는 커다란 돔에 1만 명이 모여 새벽 4시까지 철야예배 했으니. 예배당에 모인 수많은 기도소리를 빌 하이벨스가 ‘많은 물소리’로 들을 만도 했다. 드럼과 기타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대 속에서 여의도를 시작으로 복음성가 열풍이 불었다. 장로교회서만 손뼉 치며 찬송 부르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 오순절 예배 시스템이 대중적 예배 방식이 되고 말았다.

오순절 예배는 열정적이다. 드럼과 기타, 피아노 덕분에 한층 감정이 고조된 나머지 경건과 엄숙이란 분위기는 사라진다. 대풍이와 나도 그런 순복음의 영향을 받았다. 순복음 아닌 교회가 교회 아니겠냐마는.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는 장로교회다. 자유의새노래에 자주 게시 중단을 요청하는 그 교회 부목사가 개척한 교회라 분위기는 오순절과 거리를 두는 듯했다.

캐주얼 복장을 즐겨 입는 대풍이가 정장까지 입을 생각하니 갑갑해 보였다. 그리스도교란 서양의 옷이 어색했던 전후(前後) 문학가 엔도 슈사쿠처럼. 올해를 끝으로 전도사 직을 사임하겠다고 계획까지 말하는 모습에서 그 다음을 물었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아직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전도사 이전에 알바로 힘겹게 지내온 나날을 흩었다. 주변의 많은 도움이 아니었으면 이조차 힘들었을 거라고 말했다. 신앙을 벗어나야 성장할 것 아니냐고 호통 치던 부끄러운 나날들이 떠올랐다.

“대풍, 내가 뭐라고 너에게 기도원 밖을 나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니. 미안하다.”

당연히 대풍이는 괜찮다고 말했다. 둥글둥글한 저 성격. 다시금 기도하러 가야 한단다. 피곤했다. 4시간밖에 자질 못했으니. 전기장판을 펴두자 이내 따뜻해졌고. 푸근한 밤을 보냈다. 거미가 다시 등장하는 건 아닐까 걱정조차 잊은 채.

아침 6시 55분. 알람이 켜지자 눈이 뜨였다. 8시간 35분. 단잠 자기 적절했다. 간단히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한 후 짐을 꾸려 방을 나섰다. 빨간 벽돌은 여의도에 세워진 매머드를 생각나게 했다. 외관은 화려하지만 속은 관리할 이가 없어 금이 갈라진. 언덕 아래 건물에서 문이 열렸고 대풍이가 나왔다. 각지게 차린 정장을 보니, 대풍이가 아닌 줄 알았다.

 

기도원 외관은 생각보다 말끔했다. 나처럼 대성전이 아니라 숙소만 오간 사례는 흔치 않을지도. 원장님의 보필 덕분이다.

 

“어이~!”

두 손들고 인사하자 싱긋 웃었다. 정장이 제법 어울렸다. 껄껄. 대풍이의 주일예배 일정으로 바삐 움직여야 했다. 헤어져야 할 삼거리에 도착하자 갈 길이 보였다. 왼쪽은 교회, 오른쪽은 역사(驛舍). 우리는 갈림길 앞에 가야할 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