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완료/러블리즈덕질일기

[망원동으로] 센치함은 사라지고

입력 : 2019. 08. 08 | 수정 : 2019. 09. 01 | C12

 

자기 착취적 아이돌 文化
에로스와 필레오로 형성
더욱 자기 착취를 옹호
감정 자체는 잘못 아니나

서로 매이는 사랑이 自由?
자기 파괴로 전락한 팬덤
자기 모순적 아이돌 문화
우월 관계에서 벗어나야

 

아이돌 문화가 자기 착취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총공연합부터 문자 투표, 00시 나눔, 콘서트·음악프로그램 발(發) 총동원령, 팬미팅, 생일 컵 홀더·전광판 광고, 축하 화환, 후기 북, 생일총공, 찍덕, 편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자기 착취적이다.

이는 자발성에 기인한단 점에서 자기 모순적이기도 하다. 우스꽝스럽게도 아이돌은 팬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이란 말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동안 팬과 아이돌 사이는 더욱 촘촘하게 긴밀히 맺어진다. 끈끈하다 못해 끈적해지면 탈덕(脫-)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진다. 사랑한다 고백과 함께 자기 착취는 더욱 착실해진다. 다양한 굿즈(goods)가 쏟아지며 사랑하는 마음만큼 물품을 쓸어 담은 채 안도의 한 숨을 쉬는 것이다. 동시에 아이돌은 1:다(多), 팬덤은 1:1의 보이지 않는 계약을 형성하고 자발성에 몸을 담근다. 동시에 아이돌 입에선 ‘연애’가 터부시 된다. “3년에서 5년” 발언은 이 같은 배경에서 등장했다. 팬덤과 아이돌 관계는 에로스(Έρως)이기도 하며, 때론 필레오(φιλέω)이기도 해 서로가 끈끈히 얽혀 있어 구분이 곤란하다.

신(神)은 존재 증명이 어렵기 때문에 탈덕이 어렵다. 종교 단체에서 상처 받은 이들이 교회라는 건물을 나올지언정 신을 버리지 않듯이 말이다. 아이돌은 다르다. 그 리트머스시험지가 연애다.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에 하지 말라 할 순 없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팬심인지, 어디에서 어디까지 에로스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연애하다 걸리면 배신감 느끼는 것도 에로스로서 접근했기 때문이며 보이지 않는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느껴져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아이돌과 팬 사이 “사랑한다” 고백은 서로가 서로를 자유에서 멀어져 매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적이다. 자유 없는 사랑은 없다.

 


20년 전 여름에 벌어진 사건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사회가 과연 정상인가. 1999년 8월 20일 대구에서 벌어진 브로마이드 사건은 일반인 상식에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이 아님에도 남자 아이돌과 열애설이 난 걸그룹 멤버 앞에 브로마이드를 꺼내 들고 사인하라 윽박지른 행동이 지금 대 우리 사회에도 만연하다. 연예 매체 디스패치는 트와이스 지효(박지효·22)와 워너원(Wanna One) 강다니엘(22) 연애를 폭로했다(2019. 8. 5). 데이트 장소는 강 씨 자택이며 올해 초부터 만났다고 보도한 매체는 강 씨 자택에 들어가던 박 씨를 몰래 촬영했다. 연예인의 사생활보다 알 권리를 중시한 이들이 겨냥한 것은 아이돌 커플을 넘어서 자기 모순적 아이돌 현상이었다.

언제부터 아이돌 판에 센치(sentimental ·감정적인)함이 불어왔다. 특정 아이돌을 향해 응원보다 야유를 보냈고, 죽음을 암시하는 테러와 살해를 예고한 행동은 서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놀랍게도 나의 사랑하는 아이돌을 위한 자발적 자기 파괴 과정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지수는 아이돌이지 팬들과 연애하는 사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팬덤을 향해 “러블리너스를 평생 사랑하겠다”는 말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러블리너스를 유일하게 사랑하겠다고 선언한 게 아니듯, 엄마·아빠 사이, 더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는 말이 무의미하듯, 모든 이가 소중하며 러블리너스 역시 그 범주 안에 포함되는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지애의 고백처럼 7년의 마(魔)를 넘어서지 못한 그룹만 부지기수다. 어쩌면 오늘의 콘서트가 마지막일지 모를 이들은 최상의 공연에 영혼을 갈아 넣었다. 그런 영원하지 않을 허무히 스러질 소녀들 계정으로 팬들이 힘들다고 고백한건 이들이 만능이란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1위를 바랬지만 세상만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듯, 누구보다 망원동의 흩어진 사무실을 전전하며 이름 없는 연습생으로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지수는 우월감과 비교의식 속 ‘어처구니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팬덤을 끌어안았다. “(여러분은)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사람들이예요.”

칼바람 같은 센치함은 노래 소리와 함께 떠내려갔다: “약하고 어리석은 나 자신을 본다 해도/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으며/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가꿔가고/우리를 사랑하신 그 분을 믿으며” 자신을 사랑하며 확장된 외연은 타자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고, 더불어 살아가는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으로 확장됐다. 지수는 이 노랫말을 몰라도, 인류 보편 가치를 알고 있었다. 끝없는 피해의식과 집단화로 타자를 우월과 열등함으로 비교하며 악화일로를 걷던 녹림청월(綠林靑月)은 장막 속 어둠에서 파멸했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