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논단] 기억은 슬픔과 기쁨만을 말하지 않는다

식민지기 바라보는 다층적 기억들 속에 戰後 세대의 갈등을 보며 할 말을 잃는다
2020년 06월 18일

사학자 임지현은 자신의 저술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주도한다. 2007년 어느 날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이상한 현상들 때문이다. 한반도 북부 나남 지역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담은 일본인 거주민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문제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관점에서 일본인 거주민이 겪었던 고통을 당시의 11살 소녀였던 작가가 술회한 내용이다.

일본이 침략해 강점했던 시대를 마주하면,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헤매곤 한다. 문자로 전시된 당시 조선인이 겪었던 아픔을 되짚어 보노라면 일본제국이 조선과 동아시아에 끼친 행각 앞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앞에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가 그렇다. 생각보다 협소한 의미의 강제연행보다 ‘유괴나 다름없는’ 인신매매와 사기로 동원된 ‘광의의 강제동원’의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시동원체제의 민낯을 가늠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학자 임지현은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발견한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를 통해 기억의 조각들에 주목한다. 요코 이야기에 내재한 단순화 된 내러티브와 탈역사화도 문제지만, 미국과 유럽 중심의 문화와 교육 체계 대신, 비판의 초점이 과거 청산의 문제로 옮겨지면서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대립하는 현실이 전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위안부 기억가들의 완전하지 않은 기억의 한계를 이용해 거짓으로 매도하거나, 희생자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논변으로 쓰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기억을 단지 슬픔과 기쁨. 두 감정만이 존재하듯 이해하게 만든다.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강남에 세우신 하느님의 자존심’이란 이름으로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대형교회 전도사의 글을 읽으며 앙천대소하고 말았는데. 문자 그대로 방역 일선에서 갈려나가는 의료진 앞에서 공무원들 밥 먹여주고 방역을 한들, 그게 어떻게 하느님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인가. 차라리 대형교회니 교인들 모이지 않게끔 하는 게 더 도와주는 일이잖은가 생각했다. 그런 기독교인이 또 있었다. 교회 창립 20주년 기념 영상으로 올라온 동영상엔 이미 4년 전에 교회를 나온 내 얼굴이 네 장에 걸쳐 사진으로 나오면서 교회 부흥과 성장에 재목(材木)으로 비유됐다.

두 사람 모두 한국 기독교인의 힘없는 사투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한 때 샐러리맨으로 생계를 영위했던 가부장적 남성이란 점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지만. 급여생활을 박차고 마치 대단한 사람이 낮은 자리에 임했다는 착각과 힘겨운 생활 속에서 교회 부흥을 일궈내기 위한 재목이 되었다는 구원 서사도 놀랄 만치 동일했다. 그러니 이들 눈에는 노동착취에 힘겨워 교회를 빠져 나온 가나안 신자들이 교회에서 도태되고, 신앙을 포기한 이들로 비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자신만의 해방사관에 가로 막혀 현실보다 신앙이란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바라보며 교회만이 방법이자 예수만이 대안이란 해괴한 프로파간다 속에서 강남에 세워진 하느님의 자존심 때문에 갈려 가는 의료진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보였더라면 그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4차위안단 기록 앞에서 징용과 징병, 정신대 같은 전시동원(41)이란 구조적 문제를 주목하다보면. 반생명적인 협의의 강제동원이 일상적이지 않았다 해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해도. 당시 일본제국이 정책으로 공창을 주도했고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과 가난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힘없는 여성들이 미끼처럼 가족의 부채를 변제하고 많은 수입과 고되지 않은 노동이란 신생활에 대한 전망으로 조선을 떠나야 했다는 구조적 국가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입에 담기 힘든 모욕 언사와 위안부 기억가들 증언을 하나의 소녀상 이미지로 보여준 이들, 그들을 조롱하는 보수언론, 여전히 성매매로 힘겨워하는 여성에게 기어이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오늘의 가부장적 인식을 보면서. 머리에만 맴도는 기억의 다층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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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논단] 최문정, 널 마감하고서

학부 4학년 때 일이다. 뒤늦게 확인한 페이스북 메시지엔 “학보사 문제로 뵐 수 있을까요?” 묻는 선배의 한 마디만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선배라 지인 선배에게 이미 전달 받고 확인한 부탁이었다.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보사는 생활관장과 정치적 싸움을 이어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신문은 정치적인 매체이자 일상과 동떨어진 종이일 뿐이었다. 정치적인 싸움은 165호에서 출발한다. 침신대학보는 지면신문 뿐 아니라 홈페이지 ‘학보사’ 카테고리 속 PDF를 통해서도 학교 안 소식을 전달한다. 유독 165호가 올라오지 않았다. 보통 한 학기에 한 두 호 정도는 발행해 왔거늘. 편집국장에게 물었다. 홈페이지에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한글 파일을 건네 받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영부영 완성된 느낌적 느낌이 싸했다. 학교에서 재정 지원은 없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지만 묻지 않았다. 복학하자 학보사를 둘러싼 소문을 접했다. 사람들은 ‘오탈자 하나 잡아 내지 못하는’ ‘예의없고 싸가지 없는’ ‘반성경적이면서 진보적인’ 집단으로 함축했다. 학보사에 들어가려던 내 결정도 접어야 했다. 사람들이 흘려 낸 정보들 때문이 아니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진학이 앞섰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네가 학보사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치적으로 이용 당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읽었다.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했지만서도 어떤 내용으로 만들었을지가 궁금했다. 종합 일간지는 정치적 의도와 목적으로 만든다. 학보도 그런 정치성이 보일지 궁금했다. 진보적인 신문은 아니었다. 당연히 박근혜는 탄핵되어야 했다. 기독교 인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예수의 가르침 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들도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과 무관하게 당연했다. 창조설에도 여러 이론이 있기 마련이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성서 구절로 창조설이 진리라던 문장을 보면 확실히 진보적인 신문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를 위시해 음모론을 말하던 박성업에 관해서는 비판했다. 대법원 앞 거대하게 탑 쌓아가던 사랑의교회를 지적했다. 공동체 정신을 잃어가던 와중에 아나벱티스트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상화가 요원한 이 학교 총장 직무대행을 꼭두각시로 보이도록 곰돌이 인형을 만평으로 풍자했다. 총학생회장은 정기총회에서 공개적으로 교수의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교수들 중 한 사람이 친인척을 학교 이사로 꽂은 상황이라 말을 꺼냈고 방학 기간 틈 타 징계 당할 뻔 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학교 문제에 말을 아꼈다. 대자보라도 내야 할 상황에도 침묵했다. 법원이 직무집행정지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자 비품을 아껴 쓰라는 말만 돌았다. 공론장 잃은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교수들 알력 다툼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누가 잘못했는지 물어볼 질문은 많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정치적 일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런 학보의 인쇄 자금을 끊은 건 학교 당국이었다. 아래아 한글판 165호도 배곯던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학보사에서 일할 학우 구하는 일이 상당히 어렵다고 들었다. 나를 영입하려던 부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사를 쓴다는 건 취재하는 일이고 취재 지시를 받은 다음 일이다. 누군가는 지면 신문을 기획해야 한다. 누군가는 백지 위에 기사를 배치해야 한다. 누군가는 오탈자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픽은 또 누가 만드나. 한 두 사람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공동체 의식은 나라는 존재가 사회라는, 학교라는 토대 위에서 살아간다는 인식 속에서 피어난다. 하지만 누구도 학교 문제에 나서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을지 모른다. 문제가 어떻게 얽혔는지 풀어낼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또래 정치 싸움 너머 어른들 다툼에 끼어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른들이 공론장을 박살 내는 동안 젊은 것들은 무시 당했다. 그런데도 대학원에 들어가려 하다니. 내 아둔한 지각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본지 문화섹션 나우에서 선보인 단편소설 ‘너에게 맞설 수 있는 치트키’에서 주인공 최문정은 아무도 없는 밤 기숙사에서 남자애와 키스한다. 문정은 잠 못 이루는 감정을 느꼈다. 키스를 그리는 장면에서 상상했다. 만일 선배의 부탁을 받아 들고 학보사에 들어갔다면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루라도 더 빨리 장신대 신학대학원 진학이란 허황된 꿈을 버리지 않았을까. 사람들과 부대끼며 현실의 벽을 조금 더 일찍 마주치지 않았을까. 지면신문 배치마저 인쇄소에 맡기던 “에휴, 자유의새노래 만도 못한 학보구나” 탄식 대신. 기획실장, 아니 편집국장과 싸우며 침신대학보라 쓰고 공론장으로 읽는 희망의 탑을 하나씩 쌓아가지 않았을까. 최문정을 이용해서라도 과거로 돌아가 세상을 바꾸고픈 열망이 샘솟는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20대 대선을 맞았다. 정치인을 아이돌로 추앙하던 20세기와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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