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퇴근 후 여수

2023년 08월 27일

카톡이 왔다.

‘기자님 혹시 화나시는 일 있으세요?’

‘오늘 때려칠겁니다 진짜’

‘ㅠㅠ 무슨일입니까ㅠ’

오늘은 정치부다. 사진도 없이 달랑 원고만 들어온 것이다. 슬슬 화가 치밀었다.

“사진은 박 뭐시기 부장한테 있다고 하던데요?”

“아 박OO 기자요? 알겠습니다.”

한숨과 함께 돌아오는 길 일일지면발행계획을 찢어버렸다. 후. 욕이 절로 나왔다. 가판마감까지 30분도 채 안 남았는데 뭐 어쩌고 어째?

오늘만 버티면 휴간데 어림도 없었다. 마음대로 이뤄지는 것 하나 없었다. 부랴부랴 사진부에 요청해 파일을 넘겨받았다. 일단 마감이란 큰 불을 껐다. 어떡해서든 만들어낸 지면신문, 매번 이런 식이다.

당직자와 퇴근하려던 참, 열차 시간은 1시간 남짓. 어제 서울로 이사 온 10년 지기 시규에게 연락이 왔다.

“저녁 어때?”

“일단 용산으로 와라.”

끊자마자 대표가 부른다. 대표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10%’ 오랜만에 웃는 대표 얼굴을 보았다. 대표실을 나오기 직전 오른손을 맞잡았다.

“분발하겠습니다.”

갑작스레 터진 가판마감과 연봉협상, 동지까지 거북이 등딱지 같은 짐을 거머쥐고 회사를 훌훌 떠날 수 있었다. 내일이면 휴가 첫날. 가벼운 발걸음에 괜시리 미소가 터졌다. 오늘 밤 여수로 떠난다.

자정 넘은 시간 바다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KTX역에서 바다까지 가까운 탓이다. 여수엑스포역은 숙소로 이동하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긴 밤 새벽비가 내렸다.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침 10시였다. 날짜를 잘못 정했나 싶었다. 광활한 하늘을 담기엔 흐릿했다. 무채색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숙소를 나섰다. 첫 행선지는 돌산공원이다. 여수 봉산동에서 돌산공원까지는 걸어서 40분 걸린다.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걸을만했다.
 
#2박3일 #나홀로 #도보여행
전망대 오르며 나부끼는 옷자락
거친 숨소리에 여수시내가 활짝
 

돌산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여수 시내.

돌산공원: 여수시내 내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

돌산대교를 뒤로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전망좋은곳’ 표지판 앞에 서면 펼쳐질 고난의 행군 때문이다. 전망대 이름도 독특하다. 돌산공원 전망대가 아니라 전망좋은곳이라니. 평일 목요일에 방문해선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따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견학 차 방문하거나 가족 단위로 놀러온 사람들이 보였다.

3층 규모의 전망대에 올라서면 여수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수산물특화시장과 여객터미널, 선착장, 장군도가 펼쳐진다. 유리가 없으므로 맨눈으로 도시를 즐길 수 있다. 아쉬운 게 있다면 도보로 걸어야 할 번거로움이다. 허나 탁 트인 전망 앞에선 누구든지 근심 걱정 모두 날아가고 말 것 같다.

이온음료만 마셔댔다. 편의점과 카페 덕분에 자차만 끌고 오면 편한 여행이 될 듯하다. 해상케이블카는 타지 않았다. 흐린 하늘 탓이다.
 

돌산공원 데크에서 바라본 여수 시내.

고소동벽화마을: 고요한 골목길 다채로운 그림 풍경

시내버스 106번을 타면 도착하는 고소동벽화마을에 다다랐다. 고소동1004벽화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승리한 수군 중심기지인 진남관부터 고소동 언덕을 지나쳐 여수해양공원까지의 길이가 1004m라 지은 이름이다. 다양한 출입구 덕에 여러번 지나간 골목길이 있었다. 벽화는 무난했다.

정오를 알리던 포 오포대에 도착하면 또 한 번 여수시내 전경을 볼 수 있다. 전망좋은곳과 다른 점이라면 더욱 도심을 샅샅이 구경 가능한 쏠쏠함이다. 아침부터 걸어대선지 벽화를 구경할 체력적 여유가 따라주지 못했다.

편의점에서 이온음료 두 병을 구매했다. 마시고 또 마셨다. 오포대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쉬었다.

오동도: 걸어 갈만한 섬 물은 꼭 챙겨갈 것

여수경찰서에서 시내버스 2번을 타고 오동도로 이동했다. 흐렸던 하늘이 개면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동도를 다녀와서 보니 팔이 벌겋게 탔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곳보다 접근성이 좋아선지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오동도에 가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❶동백열차 ❷유람선 ❸자전거 ❹도보. 꼭 열차나 유람선을 타지 않아도 괜찮다. 걸어서 25분이면 전망대에 도착한다. 그러나 지도상일 뿐 용굴을 거쳐 지나가면 한 시간도 넘게 걸린다. 용이 살았던 동굴이라고 하는데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다. 용이 살던 데 한 번 보러 갔다가 온몸에 수분이 다 말라버릴 뻔했다. 오동도까지 걸어가는 것도 모자라 용굴에 등대까지 보고 왔으니 죽지 않은 게 다행. 용을 보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힘든 만큼 경치는 경이로웠다. 부럽다 용.

등대는 에어컨도 있어 시원했지만 유리창이 깨끗하지 않아 아쉬웠다. 에어컨이 있기에 오래 볼만한 곳이지만 맨눈만큼 선명하지 않아 오래 보지 못하는 역설적인 공간이다. 엘리베이터 벽면이 유리로 돼 있어 오르내리는 기이한 풍경도 볼만하다.
 
 
새벽비에 내내 흐린 하늘
햇볕 없어 오히려 걸을만

돌산공원
봉선동에서 도보로 40분
‘전망좋은곳’ 관광객 인기
도심 바라보며 근심도 뚝
해상케이블카는 다음에

고소동벽화마을 
7개 넘는 다양한 출입로
시가지 내다보인 오포대
느릿느릿 벽화 따라가다
적막한 골목 정취 ‘쏠쏠’

오동도
단순 도보로 30분이지만
용굴·등대까지 바쁜 걸음
여유 즐기려면 동백열차
자전거 바닷바람도 좋아

순천만습지
드넓은 대지 기운에 주목
홀로 오솔길 느긋한 걸음
이따금 쇠백로 보며 힐링
보고픈 가을 갈대밭 풍경
 

순천역 전경.

순천만습지: 적막한 오솔길에서 마주한 숨겨진 생명

순천역에서 순천만습지로 가려던 참이었다. 불길한 예보를 접했다. 습지에 도착하려는 시간이 오후 3시였는데 3시부터 4시까지 비 예보가 내린 것이다. 난감해졌다. 밑져야 본전. 강수확률 30%라 믿음을 가지고 밖을 나서는 순간 햇살을 보았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예정된 비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구름이 껴 중간 중간 햇살이 날을 후덥지근하게 만들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름철 촬영하기에 최적이었다.

무진교를 건너자 눈앞 습지에는 쇠백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떼로 다니는 참새를 렌즈에서 놓쳤지만 유유자적 거니는 쇠백로가 반가웠다. 쇠백로는 서울에서도 볼 수 있다. 다양한 종의 새들을 보고 싶었지만 자연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광활한 대지의 기운을 가득 느낄 수 있었다.

문학관으로 향하는 길목엔 오솔길이 펼쳐져 있다. 홀로 걸으며 거대한 자연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걸어 걸어도 도달하지 않을 것 같은 저 끝에서 열차가 다가 왔다. 걷지 않고 즐기려면 갈대열차를 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따금 배치된 벤치가 쉼을 허락했다. 그러나 앉지는 않았다. 이곳저곳 드넓은 공간을 렌즈에 담느라 정신없었다. 다 둘러보지 못했다. 아쉬울 정도다. 가을에 온다면 갈대밭 사이에 숨은 고귀한 생명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갈대밭 사이에 숨은 비유의 고등학생 수필을 집필한 일이 있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갈대 사이에 숨은 걸 묘사했다. 푸른 풀잎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하다. 순천역에서 시내버스만 타면 바로 올 수 있기에 가을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 외국인을 보았다. 내국인도 힘들게 오는 이곳 습지를 외국인이 걸어오다니 놀랐다. 고생 참 많구나 생각이 들었다.

대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순천만습지.

돌아가는 길 버스에서

하필이면 오후 5시 숙소로 돌아가는 바람에 핫한 버스를 경험했다. 시내로 향하는 길목 무수한 학생들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보통은 뒷좌석 중간 통로까지 꽉 찬 경우는 보지 못했는데 인파가 마구 몰려들었다. ‘어떻게 내려야 하지’ 고민했을 정도다.

아뿔싸! 내려야 할 곳에서 한 정류장 일찍 벨을 누르고 말았다. 아무도 내리지 않자 괜히 출퇴근 시민들을 괴롭힌 것 아닌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설상가상 스마트폰도 떨어뜨려 다시 줍는 불상사도 벌어졌다. 버스 한 번 탔다가 제대로 망신당하는 기분이다.

자산공원도 들러 여수 밤바다를 느껴보려 했지만 소망에 그쳐야했다. 내일 저녁 집에 가기 전 들르기로 마음먹고 숙소로 돌아갔다. 혼자 도보여행 다니기에는 이 도시가 거대하게 느껴졌다. 운치를 느끼려면 최소 한 두 군데만 가서 오랜 시간 즐기다 오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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