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너에게 맞설 수 있는 치트키

2022년 03월 01일

매화고등학교 학보
이른아침매화는,
정갈한 글꼴에
기승전결 육하원칙
매듭진 분명한 문체
단숨에 읽혀서 좋다
선배에게 배우면서
찢어지게 웃었던
지난날, 기자 생활
어느덧 보이는
좋아하던 그 아이

어젯밤 키스는 예정에 없었다.

홧김도. 밀당도. 큰 그림도. 힘들어서도. 빼앗길 듯해서도. 붙잡으려던 욕심도. 좋아한단 말 한마디 선전포고 꺼낸 것도. 아니었다. 느낌의 흐름 따라 입 맞췄을 뿐이다. 아닌 건 어제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변명의 여지는 충분하다. 이슬톡톡만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날밤으로 새야했다. 내내 간지러웠다. 이부자리 설쳤다. 이상하다. 내가 이상해졌다. 숨어서 좋아하던 두근거림 따위와는 달랐다. 모두가 잠든 밤 달만이 미소 짓는다.

그 캔 레모나 맛은 들었다 놨다 장난질이었다. 달달했는지 새콤했는지 아무 기억도 없다.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한 순간 사라진 용기에 남자애들 그것처럼 허무감에 휩싸였다. 떠오른다. 순식간에 달아올라 한 순간에 꺼져버린 그 달. 새벽 기운이 오른다. 지저귀는 새 울음에 달고도 짠맛이 후폭풍처럼 밀려온다. 모든 감정을 앗아갔다. 후회조차 매듭 짓지 못했다. 스마트폰 뒤적였다. 그 애 프로필 들여다봤다. 어땠을까. 좋았을까. 맡았을까. 들렸을까. 불쾌하진 않았을까. 천천히 다가갔다면 받아 줬을까. 아침 해가 떠서야 겨우내 생각했다. 좋아한다 말이라도 해줄 걸. 아니아니. 멀찍이서 지켜보았다는 말이 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 그러나 모든 질문은 한 가지로 모아졌다.

“어젯밤 키스의 맛은 어땠을까.”

정신이 들었다.

“우리 뭉뎡이 어젯밤에 키스했구나?”

매듭진 문장들 너머로 ‘어젯밤 키스의 맛은 어땠을까’로 도배된 한글 문서가 눈앞에 선명했다. 황급히 화면을 내렸다. 늦었다. 들켰으니 취조 당할 차례. 귓불이 화끈거렸다. 한 모금 차디찬 커피를 마셨다. 어깨를 감싸 쥔 소혜의 사탕 냄새가 은은했다.

“누군데 누군데!”

남자라곤 1도 관심 없는 천하의 우리 사회부장님께서 편집국장도 모르게 남자애와 입 맞추고 끈끈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칼럼으로까지 담아내려 하다니 이러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순풍순풍 아이 낳아 연금 받는 것까지도 보도할 기세라며 기함 치는 바람에 죽어도 누구랑 입 맞췄는지 말 안하기로 다짐했다. 근육질 운동부 취향은 아니고. 노느라 바빠서 글쓰기에 학을 뗀 애들은 더욱이 아닐 테고. 하나 둘 오탈자 잡아내 몰아붙이는 최문정 낚아 챌 변태가 우리 학교엔 없을 텐데. 점차 올라가는 텐션에 집중이 어려웠다. 귀를 막았다. 왜. 왜. 왜 안 보여줘. 어젯밤. 키스의. 맛은. 어땠을까. 어젯밤. 키스의…. 짧고. 굵은. 입체. 서라. 운드. 짜증. 난다. 오른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소혜가 책상에 올라탔다. 야릇한 눈빛으로 막대사탕 굴려댔다. 낯빛을 피해 사시를 되새겼다. 다니씁 게하직정 지웠다가 문소혜 좀 닥쳐 얍 주문을 외웠다.

“압수수색하기 전에 빨랑 불어라.”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여자를 모르는 고등학교 남학생이라. 밀당조차 감 못 잡는 최문정도 직진 한 방이면 뻑 가버리는 건데. 키스의 맛을 물어볼 정도라며는. 흐음 최문정을 먼저 좋아할 가능성 제로. 하지만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최문정이 하루 종일 키스만을 생각할 순 없어. 한 문장 한 문장 쌓아가며 추리 중인 저 입술. 달그락 녹여내는 저 입술이 얄밉다.

“최문정, 알아둬. 남자 애들이 말하는 사랑, 분위기 타고 감성 타는 속에서 내뱉는 기분 따위에 불과해. 네가 널 더 사랑할 수 있을 때 기분이란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힘이 생긴다구.”

막대사탕 입에서 빼 바람을 후 불었다. 불었지만 허벅지를 드리운 검지 손가락 한 마디 반격에 앞선 문장들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빙그레 웃었다. “왜 이러실까”도 덧붙여서. 약점을 스치자 가볍게 흔들던 다리가 규칙을 잃었다. 삐걱대던 책상 울음이 괴상해졌다. “얔 그만, 그만햌.”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문소혜는 무너진다. 을로 돌아온 소혜가 콧소리 섞어가며 내 이름을 불렀다.

“잘못했습니다. 해봐!”

“싫어! 많이 컸다, 최문정!”

끝까지 할 말만 하는 문소혜.

너란 여잘 만나면서 사람 조련하는 스킬만 늘었어. 알어? 사회부 김나율이 동료들과 들어오고서야 편집국장을 내던졌다. 둘이서 사귀는 거 아니냐는 말 듣고서 자제 했건만. 깝죽대는 거 상대할 때마다 나만 힘 빠지더라. 옷깃을 여미고 뒷 문단 어젯밤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회수했다. 완성.

“다 썼어. 송고할 게.”

사랑해 애정해 문정해. 나만의 최애 뭉뎡이. 편집국장보다 글 잘 쓰는 뭉뎡이. 이아매 절반의지분은 뭉졍이꼬. 이어지는 아부 받아칠 기력도 없다. 쭉쭉 뽑아내는 레이저 프린터기 박자에 맞추어 소원을 빌었다. 기사도 죽죽 뽑아내게 해주세요. 문소혜 체력도 쫙쫙 뽑아가 주세요. 마감 당일. 빨간 펜으로 신문에 조판할 칼럼을 빠르게 훑는다. 역시나 제목 하난 잘 지었다고 극찬해 마지않았다. 편집국장도 승인했으니 지면에만 앉히면 끝난다. 칼럼은 끝. 투 두를 열어서 빗금을 그었다. 남은 건 기사 뿐.

“좀 그래.”

“뭐가.”

“아직 제대로 챙겨준 것도 없는데 내 품에서 네가 떠날 생각하니까 좀 그래. 질투도 나구.”

뼈만 앙상히 남은 막대를 버리고 사탕을 꺼내어 입에다 물었다.

“차라리 내 첫 경험 써볼까?”

안 물어봤어.

“그렇게 해서라도 봐주면 얼마나 좋아? 휴.”

막대 사탕 물고서 창밖 내려다보는 역광이 딱 은퇴를 앞둔 부장님 포스다. 오래됐다. 언제부터 학보사 이른아침매화가 활기를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읽어주질 않는다. 평범한 아침 수험생에게 신문은 쓰레기일 뿐이다. 무거운 발걸음 달래줄 오락거리로 부적격이란 말이다. 매학기 지원자는 줄어든다. 지면 꾸며 줄 편집 기자 하나 모시기 어렵다. 모든 신문이 그랬다. 시대 변화도 한몫했다. 전통미디어가 외면 받는다. 뉴미디어로 소통하는 새로운 시대에 발 디딘지 오래다. 언론 수준 미달은 후폭풍 같다. 방금 뽑아낸 칼럼을 매만졌다. 누가 봐도 읽고 싶지 않은 글줄이다. 암묵적 폭력에도 나에게 미소 지어 달라는. 대학 포폴에나 제격일 문장들을 누가 재밌어나 할까. 소혜의 서랍에서 사탕을 뺏어다가 물었다. 맞담 피우듯 옆에 서서 햇볕을 쬐었다. 막대사탕 입에서 빼 바람을 후.


매화고등학교 학보 이른아침매화는 날카로운 글꼴이 정갈하다. 멀리서 보면 한 눈에 보인다. 기승전결 육하원칙 매듭지어 문체가 분명하다. 호흡이 짧아서 단숨에 읽힌다. 들여 쓴 글줄 첫 글자와 다음 줄 두 번째 글자의 완벽한 배치에 반했다. 예민하고 섬세한 글줄을 풀어내고 싶었다. 내 이름 걸고서 기사로 내보면 어떨까 상상했다. 단문이 좋다는 평가에 단번에 뽑혔다. 선배에게 배우는 동안 찢어지게 웃었다. 기사 쓰는 법. 조판 기술. 배치와 디자인. 하나의 질문으로 두 가지 정보를 캐내는 취재 요령. 정기자가 되고 칼럼 한 꼭지 쓸 기회를 얻었다. 그 무렵 좋아하는 애가 생겼다. 신문 속 프로필 사진보다 멋있는 본문. 입에서 굴리고 굴리다 흘려 낸 최문정 같은 제목. 칼럼을 낼 때마다 멋있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 애가 읽어준다는 생각에 단단함을 느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힘. 단단해진 나를 보았다.

기사에다가 오피니언으로 연결한 기사 흐름이 신문의 특징이죠. 팩트만 건조하게 기사로 담아내고 기자 생각을 기명 칼럼으로 다룬 이번 방식. 다음에도 기대하겠습니다. 기사 잘 봤어요. 연애와 놀 거리로 파편화 된 개인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소수자에게 집중해서 좋았습니다. 발로 뛰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그 노고를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학생회장 임기도 얼마 안 남았는데 매니페스토 기사들이 없네요. 다음 호에서 다뤄주세요.

그 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 때문일까. 내내 숙이고만 있었다. 사람들은 이아매를 평가해줄 독자위원회가 있는 줄 모른다. 칭찬의 의미는 지루하니까 여기까지만 넣고 다음엔 신박한 기획으로 내놓으란 요구. 부족하단 말은 자기가 쓴 칼럼을 기획 기사로 연계해달라는 청탁. 잘했다 한마디는 깨어 있고 우월한 나의 지성을 알아달라는 의도. 대학 진학 그리고 포트폴리오에 목매던 귀찮은 사람들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빈 의자를 흘겼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문소혜가 냄새 맡을 게 뻔했다. 그 후각 귀찮은 사람들 대하는데 집중하느라 바빠 보였다.

이아매는 대학 입시를 위한 종이 쪼가리로 전락한지 오래다. 자신이 썼는지 검증조차 어려운 수준의 칼럼. 인터뷰 해달라는 낯간지러운 청탁과 뇌물. 교내와는 동떨어진 학내 단신. 조금이라도 삐딱하면 잘려 나가는 기사. 마음 속 고민을 검열해 어른답게 포장한 기획물. 명분을 위해 완장차고 교장 내빈이나 담아대는 사진. 다니씁 게하직정 폼으로 걸어둔 사시가 면접관님, 최선을, 다해, 일하겠, 습니다, 만큼이나 역겹다.

귀찮은 사람들이 흩어졌다.

“바지 떴다, 바지.”

소혜도 나가려던 순간, 급히 돌아와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맸다.

꼬질꼬질한 셔츠에 슬리퍼 차림의 바지사장 학보 주간 교사가 출몰했다. 엉덩이를 다시 붙였다. 인사도 무시한 채 빈 의자 끌어다가 부패한 육질을 뉘었다. 주머니에 손 넣고 고개를 까딱. 편집국장부터 순서대로 취재할 아이템을 늘여 놓을 차례다. 다음 호 아이템 배정의 건이다. 내 차례가 다가왔다. 재개발 구역으로 외면당하는 또래의 학교 밖 친구들을 담으려 했다. 달동네가 신도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잃어가는 인간다움에 주목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한”

“킬 해. 다음.”

“인터뷰이는 이미 섭외해 놨어요. 모레 끝나고 만나보려구요. 재개발 분야에서 소수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몇 안 되는 분이세요. 그 다음은 학교 밖 아이들, 청소년 성소수자, 소년소녀 가장 순으로 취재할 계획이구요.”

“최문정. 건학이념 몰라?”

“알아요.”

“알아요? 나 지금 엿 먹이는 거야? 다른 동아리에 비해서 참견 안하잖아. 건학이념에만 맞추면 쓰고 싶은 글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했어, 안했어? 전번에 학업성취도 1위한 걸로다가 넣어.”

이후로 입도 뻥끗 안했다. 지껄이는 대로 지켜만 보았다. 여태껏 편집국장 문소혜한테 던져 놓고 관여도 안하다가. 언제부턴가 회의라는 명목으로 내 기사를 마구잡이로 잘라댄다. 신념도 이념도 없이 하루 하루 좀비마냥 꿀만 빠던 아저씨가 갑자기 완장질인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바지의 입술에선 설교가 이어졌다. 뉴스 커뮤니케이션. 지 전공도 아니면서 나도 읽은 교과서 첫 페이지 첫 줄 읊어댔다. 사람들과 소통도 않는 게 뭔 놈의 신문이냐고 지껄였다. 이딴 식으로 감정이나 부추기는 기사를 쳐 내니 망하지 않을 수 없겠냐고 질러댔다. 기획력과 취재력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신뢰와 관심을 잃어서 취재력을 잃은 건지, 읽을 만한 취재기사 못 내놔서 버려진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분명한 건 하나. 기자로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데에서 더는 반격하지 못 했다.

편집회의가 끝날 무렵 이사장 이름을 말했다.

“어.”

의외의 대답. 그 사람이 자르는 거냐고는 묻지 않았다. 현실을 알았으면 이만하고 접으란 말 앞에서 입안이 텁텁했다.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터졌다. 오타를 발견해도 사진 보정이 미숙해도 취재가 모자라서 부랴부랴 써 놓은 것도 괜찮았다. 다음에 잘하면 되니까. 후속 기사로 내보내면 되니까. 그러나 찢어버리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순간은 따로 있었다. 문뜩 한 마디 손가락에 의해 오려지는 느낌. 누구로부터 내뿜은 입김인지 모르겠다. 하얀 지면으로 탈색한 자리에다 예정에 없었던 글자들이 배치됐다. 바지에게 달려가 물었다. 왜냐고. 대답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기사를 거부한다는 건 기사를 쓴 기자를 반대한다는 의미다. 내 얼굴 실어둔 이 신문 이아매가 삐걱댄다. 새 아이템 올려놔도 반려 당한다. 잘려나간 기사 뭉치 모아봤다. 의도는 명확했다. 취재에 나섰다. 팩트는 간결했다. 이 학교 상층부 누군가를 가리켰다. 속삭이는 목소리를 뒤늦게 깨달았다.

납작 엎드려. 내가 말하라는 대로만 말해.

“한여름 들어와!”

마지못해 들어온 한여름의 깨문 입술에서 직감이 발동했다.

“여 앉아. 기초부터 다지라고.”

무슨 꿍꿍이인지 훤하다. 속 보이는 새끼.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모르겠다.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때면 한 마디 씩 던져주던 소혜도 입을 다물었다. 늘상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학기 중 동아리를 옮긴 사례는 드물다. 한여름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무슨 의미일까.

저녁 먹고 학교 건물을 나섰다. 이 시간이면 소혜와 건물 한 바퀴 걸으며 어떤 기사로 지면을 채울지를 구상한다. 그러다 넌지시 하나 둘 알려주는 메시지. 그럴 땐 잘했다고 말해줘야 한다. 예쁜 것 앞에선 예쁘다고 말해줘야 한다. 화도 낼줄 알아야 하지만 음료수나 사탕으로 풀어주기도 해야 한다. 애교 한 단어 새어 나올 틈 정도는 벌려둬라…. 무뚝뚝함 보완해준답시고 거든 몇 마디.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 에둘러 말하면 동반자 같은 우리 사이.

그런 소혜를 오늘만큼은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히 둘러대어 적당한 어투로 들여다 보내야 한다.

“이따가 봐.”

“엉, 좀 일찍 들어와. 마감이니까.”

소혜가 들어갈 때까지 천천히 걸어가다 방향을 틀었다. 현관을 나서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 애를 지켜 볼 시간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얼어버린 연못. 그 애가 쪼그려서 무언가를 관찰 중이다. 꽃이면 꽃, 풀잎이면 풀잎, 해충으로 보일 나방에게까지도 말 거는 모습에 처음엔 헛웃음이 났다. 순수 문학소년이 있다면 저 애가 아닐까. 어젯밤 말랑거리는 입술이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했다. 바스락 소리에 내 쪽을 쳐다보자 벽 뒤로 숨어버렸다.

저 애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만큼 좋아한다.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소혜에게 물었다, 마음은 가지만 머리론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고 그랬다. 사랑도 그런 거라면서. 머리론 정리 되었지만 마음은 흥건히 젖어서 버려 버리고 싶을 지경인 게 사랑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내 마음이니까, 그런대로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이아매에 애착이 강해진 것도 그 무렵 같다. 그 애 생각하며 써 내려가는 기사들. 그 애 향하여 속삭이는 칼럼 제목들. 그 애가 봐주는 이아매, 그 애가 평가해주는 최문정.

이아매를 떠나기 직전이었다. 선배는 다시 한 번 기자. 이 한 단어에 주목했다. 사람들을 대리해 팩트를 정리하고 전달하는 역할에 그친다면 기록가일 뿐이지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팩트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취재할 때에야 기자가 된다는 말을 되뇌었다. 기자는 사건을 통해 사람을 다룬다. 활자로 인쇄된 글로써 독자를 만난다. 이아매로 연결된 그 애와 나 사이를 느낄 때마다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기억했다. 그 애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때 묻지 않아서. 적당히 거리 두고 적당히 웃으며 적당히 속이는 애들과 달랐다. 내 모든 걸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한 마디 손가락에 잘려나가는 기사가 늘어갔다. 조금씩 지면에서 사라지는 이름 최문정에, 최문정을 평가해준 그 애 목소리도 사라져갔다. 멀어지는 우리 사이가 싫었다. 소리 없이 우는 날도 있었다. 가슴이 아파서 침대에만 엎드렸다. 이 상태가 병인지 감정일 뿐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어젯밤 키스도 못 견디다 홧김에 저지른 일일지 모른다. 살고 싶어서. 그 애 숨결을 들여다 마셔야만 했던 내 마지막 의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져 가는 노을을 등진 채 그 애 바스락 숨결을 두 눈 감아 적어 두었다.

좋았던 감정은 복도에서 바지를 마주치기 전까지 살아 있었다.

“최문정.”

고개를 까딱이는 건 내 자리로 오라는 의미다.

“기자 생활, 그거 쉬운 줄 아냐.”

몸이 무거워졌다.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다. 

“신문사 들어가면 말야, 우라까이부터 배운다고. 취재하려면 쎄가 빠지게 진흙탕 굴러야 돼. 고고한 척 학보나 만든다고 걔네들이 좋아해 줄 것 같냐?”

건너편 수학이 펼쳐 든 자유의새노래 헤드라인이 보였다.

“하여튼 아깐 어쩔 수 없었어. 위층 위대하신 분께서 그러라는데 별수 있냐. 너 나중에 편집국장한테 대들면 기자질 오래 못해. 지금은 문소혜니까 뒤치다꺼리 다 해주는 거지. 그 뭐냐 인원보충. 늦었지만 한여름으로 채웠으니까 좀만 봐줘라.”

텔레비전에선 속보가 흘렀다. 위아래 모니터와 신문을 번갈아 보았다.

“항상 늦네요.”

“어, 미안미안. 우리 문정이 열심히 하는 건 아는데, 쫌만 유연해지자.”

그렇담, 지금 수학이 읽는 건 어제 벌어진 사건을 오늘에서야 들여다본다는 의미다. 아무도 읽지 않는 궁극적 이유. 방송국 포털 커뮤니티보다 느린 활자 매체의 특성. 오늘 저녁 쎄빠지게 ‘보고싶어’를 조판해야 내일 새벽 ‘보고싶어’하는 독자에게 도착하는 물리적 한계.

“애 잡으시겠어요. 거, 아직 저처럼 신문 보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수학이 꾸깃하게 올려둔 1등 신문 첫 면을 흘겨보았다. 그 한 면에 힌트가 숨어 있었다. 다채로운 그래픽. 정치 사회 경제 아우르는 여섯 꼭지 기사. 한 눈으로 훑어보는 조판된 활자.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만 하는 동영상과 다른 문법. 정보의 홍수라 부르는 광활한 공간에서 헤매지 않아도 될 깔끔한 편집과 배치.

사람들은 누가 누구와 사귀는 야릇한 소문을 즐기지만 뒤돌아서자마자 잊는다. 그런 기사들은 신속해도 아무데도 쓸데없다. 달동네 콘크리트로 대충 발라버린 출근길 계단 이야기는 신속함과는 무관하다. 오늘도 퇴근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외로운 죽음은 속보 체제론 도무지 보도할 방법이 없다. 현상으로 드러난 결과만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진실이 말하는 원인을 정리해 보도할 때 정보는 비로소 호소력을 가진다. 신속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신속함을 버리는 대신 정확한 분석을 취해야 한다. 신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야릇한 소문 대신 신속함과는 무관한 정보를 전달해야 산다.

발바닥을 딛자 추락이 멎었다는 걸 느꼈다. 신문이 왜 안 되는지. 그래서 신문이어야 할 이유를 깨달았다.


마감이 코앞이다. 소혜는 빨간 펜으로 한 면씩 오탈자를 확인했다. 지면 강판이 끝난 부서부터 하교했다. 완성한 지면은 노션에서 실시간으로 체크됐다. 항상 늦어지던 특별섹션부도 나보다 먼저 자리를 정리했다. 남은 건 사회부에게 맡겨진 단 하나의 지면뿐. 느리게 움직이던 손길에 미안해서라도 나율이를 집으로 보내야 했다. 소혜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둘만의 공간이 되어버린 학보사 방 안에 피로감만 가득했다. 키보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소혜가 남자애와 카톡을 쉬고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지면을 남겨둔 채 기다리다 지쳐 엎드려 자는 듯했다.

답을 찾지 못했다. 우리 신문은 35년 동안 한 번도 백지 발행한 일이 없었다. 백지 발행은 패배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할 말은 한다는 게 우리 신문 정신이었다. 단 한 번도 내보지 않은 백지를 상상했다. 사람들이 관심이나 가져다줄까. 사회부 기자 최문정을 기억해줄까. 마감이 가까울수록 불안해서 입술만 깨문다. 현실이란 이름의 벽 앞에 섰다. 한껏 단단해진 나라면 부술 수 있는 줄 알았다. 강해서. 너무 강해서 산산조각 날 게 뻔했다. 답을 내려야 했다. 심장이 죄는 것 같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게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기 싫은 말을 하면서 사는 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학보사 방 안 곳곳 때 묻은 선배 동료들 냄새에 주목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짱 끼고 주변을 훑었다. 면접 볼 때 먼저 눈에 띤 언론 연감 백서. 여덟 면 초판으로 도배된 거대한 칠판. 세절 직전 쌓아둔 기사 뭉치. 데스크의 권위를 상징하는 빨간 펜. 까뒤집어 조롱 했던 ‘정직하게 씁니다’. 새근새근 침 흘리던 편집국장 문소혜.

차마 깨울 수 없었다.

‘왜 기자가 됐어?’

들숨과 날숨이 들려왔다.

처음 칼럼에 글 싣고 나서 반응 기억나? 최문정. 있어 보이는 프로필 활자가 존나 멋있더라. 기자로 불리고 나서 여러 루트로 메시지가 왔어. 나 좀 멋있게 실어 달라, 총학 좀 홍보 해 달라. 부탁들 사이에 낀 글 하나가 보이더라고. 근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 또 그 아줌마가 잘라 버리면 그만이니까. 무력감을 느꼈어. 지금의 이 신문으로는 어림도 없는 걸. 근데 말야. 멋있는 일을 해서 멋있는 줄 알았는데. 죽을 만큼 힘든 사람들과 고통을 맞닥뜨리니까 힘이 나더라고. 이상하지? 할 말을 하니까 살 거 같더라. 키스도 그랬어. 몰래 좋아할 때하고는 달라. 좋아한다는 말을 했을 때 숨이 트이는, 살아나는 기분 말야.

하루에도 수백 번도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가. 아침엔 힘이 나는데 점심에는 무기력해 져. 저녁엔 죽고 싶다가도 또 용기가 나. 냉기가 도는 달동네 사이 골목을 걷던 밤이 떠올라. 다음은 재개발 3구역. 다음은 허물어진 학교 담벼락. 청소년보호센터. 또 알바로 내몰리는 친구들. 자꾸만 다음 장소 다음 기사로 이어져. 선배도 내 자리에서 고통스러웠겠지? 아줌마랑 얽혔다는 이유로 갈려나간 원고…. 그때도 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어제의 해직 기자는 지금도 해직 기자일 테고 앞으로도 신문은 같은 말만 반복할 테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신문은 힘을 잃었다. 차기 학생회장 권력 정도는 재창출 할 수 있다지만 학내를 변화할 어떠한 힘도 가지지 않는다. 한여름의 의미는 단순하다. 말 안 듣는 최문정 물러내고 어느 정도 길들인 한여름으로 갈아 치우는 치졸한 수법. 편집국장과도 상의 않고 무작정 인원 충원부터 한 심보가 고약했다. 바지가 그렇게도 바라던 학업성취도 평가 1위한 기사를 종합 면에 실었다. 그러나 오피니언 칼럼만큼은 하고 싶은 말들로 채워 넣었다. 아직 편집국장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글을 옆에다 두었다.

지금은 문소혜를 지켜내야 할 때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고개를 숙여야 산다. 편집국장이 집필한 내일 자 사설을 빼다가 사회부장의 글로 교체했다.

‘본지 기자 입 막으며 “친 기독교 기사만 내보내라”는 청탁
우리 신문 우습게 여기던 이사장은 어느 학교 이사장인가’

‘학업성취도 평가 1위에 가려진
韓 청소년 문해력 OECD 바닥’

소혜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오늘 저녁 내 손을 벗어나 내일 새벽 인쇄소에서 활자로 만들어져 소혜에게 가닿을 것이다. 기다리다 지쳐 자던 오늘의 소혜가 내일이면 울다 지쳐 내 손을 놓아 버릴 것이다. 어젯밤 키스가 예정에 없었던 것처럼 오늘의 편지도 예정에 없었다.

말없이 어깨에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학보사를 나섰다.

미안, 문소혜.

소혜 넌 모를 거야
아줌마랑 싸우는
불안하고 무서운
고달픈 외줄 타기
지금은 네 숨결
네 웃음 너의 냄새
네가 지켜준 문정
네  맞잡으며
지낼 테지만
언젠가는 문소혜
널 놔버릴지도
모르겠어


어젯밤 달을 보았던 그 자리를 찾아갔다. 그 애가 기침을 한다. 나도 기침을 했다. 자리에 앉았다. 인쇄한 마지막 칼럼을 내밀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있잖아.

나도 목숨 걸고 사랑할 수 있을까. 죽는다 해도 사랑하는 걸 지켜낼 수 있을까. 지금도 흔들려. 그치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니면 죽을 각오로 싸우려고. 할 수 있는 일 찾아서 싸울 거야. 나. 아침이 되면 의기소침해 질 거야. 그 때 되면 말해줘. 응원한다고.

네 입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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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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