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교회 탐방] 여의도, 영산(靈山)의 진해지는 그림자: 여의도 순복음교회②

2022년 03월 01일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돔 예배당만이 전부가 아니다. 매 일요일 국회대로 가득 메운 인파 속을 헤집고 예배당에 도착해 남는 시간 주보를 읽노라면 오늘 설교 할 조용기 목사 설교 제목이 가장 눈에 띈다. 사회자의 시편 낭독. 손을 휘 저으며 찬송가 부르는 지휘자. 10분 남짓한 장로님 기도. 성경봉독, 성가대의 찬송 순서가 지나 예배는 하이라이트에 다다른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주님의 복을 받으십시오’ 인사해주십시오.”

이제 등단한 조용기 목사가 “제게도 축복해주세요”를 덧붙이면 교인들은 두 손 가리키고서 박수를 친다. 언젠가는 이 부탁을 빠트렸고 교인들이 조 목사를 향해 손짓과 함께 축복하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도 잊어버렸는데 여러분이 기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용기 목사는 중학생이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말들로 설교를 이어갔다. 과감한 어투와 가벼운 농담도 섞은 덕분에 딱딱하지 않다. “‘나는 적은 죄 지었고 너는 많은 죄 지었다.’ 죄는 다 똑같은 죄인 것입니다. 작은 돌멩이도 물에 가라앉고 큰 바위도 물에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저 소리가 다를 따름입니다. 작은 돌맹이는 ‘퐁당’하고 가라앉고 큰 돌맹이는 ‘푸응덩~’하고 가라앉는 것입니다.”(2008. 06.22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남) 교인들은 조 목사의 ‘퐁당’과 ‘푸응덩~’ 두 단어에 박장대소한다. 죄와 인간 그리고 하나님의 관계를 이처럼 쉽게 설명해주는 설교에 감탄한다.

예수쟁이더러 미쳤다고 말하던 소년 조용기는 오히려 예수를 전하는 목사가 되었다
조용기 목사의 설교는 언제 들어도 익숙하다. 크게 소리 지르지 않는다. 쓸데없이 시간만 길지 않는다. 예화와 통계 인용은 우리 사회에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돕는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1,2)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모든 일들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설교로 이루어진다. 누군가는 ‘번영신학’으로 비판하지만 조 목사를 뒷받침하는 생애를 들여다보면 근원을 알 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조용기는 폐결핵을 앓으며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하나님도 혼자 바닥에 누워 통곡하던 조용기의 기도를 들었는지 누나의 친구를 통해 예수를 접한다. “예수쟁이들은 다 미쳤다 카드마, 누이도 예수 믿고서 미쳤구마. 당장 이 방에서 나가이소.”(여의도의 목회자,165쪽) 다시 찾아온 누나 친구가 건네준 성경책을 읽으며 조용기는 병을 고쳐달라고 호소한다. “예수 씨여!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나의 폐병을 고칠 수 있는 당신입니더. 의사들은 아무도 내를 고칠 수 없다고 말합니더. 그러나 성경을 보마 예수 씨는 중풍병자도 고치고,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나병환자도 깨끗하게 하고, 죽은 나사로도 살려 주지 않았심니꺼. 만약 예수 씨가 내를 고쳐주신다카마 예수 씨를 위한 사람이 되겠심더. 제발 나를 살려 주이소.”(여의도,169)

가슴이 뛰고 온몸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마음속에서부터 생명의 기운이 넘치자 조용기는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찬송가를 모르던 시절 아는 노래라곤 ‘신라의 달밤’뿐이었다. 마당을 돌면서 노래를 부르니 어머니도 드디어 정신이 나간 줄로 오해했다. 병 고치는 예수의 활동을 통해 조용기는 병 고치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한 절 읽다가 눈물 흘리고 다시 한 절 읽다가 눈물 흘리고 하니까 온종일 성경을 읽어도 다섯 절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성경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고 기뻤습니다.”(여의도,171)

사흘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동안 예수는 조용기에게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데 너의 일생을 바치라”고 말한다.(여의도,194) 예수의 다리를 안으며 정신을 잃은 조용기는 환상을 통해 폐결핵이 나은 사실을 알아차렸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조용기에게 고치시는 예수, 살리는 복음이 누구보다 살에 와 닿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목사가 된 조용기는 설교한다. “육군 대위 한 사람이 암에 걸려서 죽어가는데 그 아내가 하도 사정해서 병원에 심방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나는 안 믿습니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당당한 군인이오, 군인 정신으로 죽겠습니다.’ 군인 정신이 천당 보내 줍디까? 당신 당당한 군인정신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죽음 앞에는 군인도 장사가 아닙니다. 죽음을 당신 이길 수 있습니까? ‘나는 사관학교 출신으로서 군인으로서 살다가 군인으로서 죽지 시시하게 예수 믿고 죽지 않겠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시시합니까? 용감한 사람만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자기 스스로가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인 것입니다.”(2008.06.22)

역설
“예수 씨여! 살려 주이소”
예수쟁이라고 말하던 소년
목사가 되어 예수를 말한다

고난
석유파동으로 찾아온 위기
믿음과 희망 가지고 돌파
고난 통해 神 만난 조 목사

유지
순복음 신앙의 핵심은 성령
‘유지하기’ 통해 번영 추구
역사상 전무후무 교회 이룩

고난 중에서 만나는 하나님
대조동에서 단 다섯 명 교인으로 시작한 교회는 순복음중앙회관에서 순복음중앙교회로 이어졌다. 300명 교인은 1968년, 8000명으로 늘어났다. 1만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조용기 목사에게 “이곳을 떠나 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을 지어라. 그곳에서 너는 500명 선교사를 파송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여의도,442) 위기는 거대한 예배당을 지으며 시작됐다.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공사가 멈춘 것이다.

위기는 가장 나약한 이에게서 발휘된다. “목사님, 나 마이크로 말 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80대 할머니가 놋밥그릇을 꺼내며 “여러분, 이러다 우리 목사님 죽어요. 밤낮 우리가 이곳에 모여서 기도만 하면 뭐합니까? 우리 가진 것 다 털어서 교회 건축에 쓰라고 헌금합시다.”(여의도,455) 교인들은 특별 헌금을 작정했고, 5000만원을 융자해주겠다는 한 은행 지점장까지 나타나자 공사가 재개됐다. 이같은 고난 내러티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의 신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크신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을 만남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나야 돼요. 이야기만 듣고 지나가면 안 돼요. 나와 일대일로 만나야 돼요. 십자가 밑에 엎드려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돼요.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봐야 해요. 우리가 아닌 것입니다. 전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2007. 10.28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난을 통해 자신을 현현(顯現)한다. 따라서 질병과 고통, 정신의 문제 상황은 일시적인 것이며 이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육체의 문제도 해결되는 삼중축복을 강조한다. 삼중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중복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고난 없이는 순복음 신학과 조용기 신학을 이해할 수 없다.

‘신앙하기’와 ‘유지하기’
고난을 이겨내어도 끝이 아니다. 광활한 신앙생활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순복음 신학 특유의 ‘유지하기’가 발동된다. 여기에서 성령충만이 등장한다. 조용기 목사는 번영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몸소 보여주었다. 세계 최대 교회는 한국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과다. 거대한 예배당 돔만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조용기 목사의 일생도 세계 최대 교인 수 역시 전부가 아니다. 서른 살도 안 되는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1962)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으로 피선(1966)됐고 하나님의성회 극동아시아대회를 서대문교회에서 개최(1969)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조용기는 이미 세계적인 시각으로 활약했다. 지금의 여의도 교회에서 세계오순절대회를 개최(1973)했고 국제교회성장연구원(CGI)을 창설해(1976) 본격적인 세계 선교에 힘을 쓴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에게 징계를 주기도 한다. “어릴 때 잘못하면 어머니가 부지깽이로 때렸는데 여러 번 맞다가 보니까 점점 체험으로 지혜가 생겨서 도망을 치니까 부지깽이 끝에 맞으니까 몹시 아프더라고요. 때릴 때 어머니를 안고 뒹구니까 부지깽이 안으로 맞으니까 아픈 척하지만은 실제로 안 아파요. 그래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아이고 내 죽네’ 고함을 치면 실제로 안 아픈데도 어머니는 심히 아픈 줄 알고 때리는 걸 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때릴 때는 멀리 달아나지 말고 어머니를 끌어안아야 돼요. 하나님이 때릴 때는 하나님을 끌어안아야 돼요. 하나님을 떠나서 자꾸 도망치면 무지무지하게 아프고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2007.12.02 징계)

새천년을 맞이하고 한국교회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도 집중 조명된다.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 후는 조 목사가 교회 돈으로 재산을 증식한 과정을 보도했다.(2007.03.24) 조용기는 다음 날 주일 2부예배에서 ‘긍정만이 사는 길이다’를 설교했다. 2011년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2017년 교회에 손해를 끼친 혐의로 2017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확정판결 받았다.

코로나19 발병 이후에는 설교를 직접 듣지 못했다. 2020년 7월 뇌출혈로 인해 ‘예수님과 강도’가 마지막 설교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는 강대상에 서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찾았다. 마스크를 낀 채 2-3m 간격을 유지하며 조문 온 교인들로 북적였다. 조화(弔花) 문구를 하나하나 읽던 할머니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가슴이 먹먹했다. 한 시대의 저무는 역광이 강렬했다. 중학교 1학년 시절부터 교복 빨래를 하면서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기독교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지금에서까지도 듣곤 한다. 뼛속까지 오순절의 피가 흐르는 지금의 시대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어제의 기적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이제 더는 조용기 목사가 겉옷을 던져가며 “나는 죄인이다. 나는 못 났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패배자다. 하는 이 부정적인 생각이 거지 바디메오의 의복같이 나를 가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주님께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이 마음 속의 정죄의식 죄의식 패배의식 부정적인 생각을 벗어서 내어 던져버리고 주님께로 나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1981.02.25 겉옷을 벗어 버리고)라고 말한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조용기 이후의 시대, 신 죽음의 시대 이후 앞에 길이 놓여 있다. 한번도 걷지 못한 길일 테지만 조용기가 개척하여 걸어간 것처럼. 보이지 않은 답을 찾아가며 긍정의 희망을 품고 한걸음 내딛어야 할 용기를 얻었다.

ⓒFGTV
자유의 새노래

자유의새노래

정론직필의 자유·시대성의 창달·주체자의 기록

답글 남기기

Previous Story

발바닥이 보일 만큼

Next Story

[내 맘대로 교회 탐방] 여의도 순복음교회 주보, 현대적 시스템은 예배를 거들 뿐

Latest from 나우

두쫀볼, 두쫀붕, 두쫀궁까지… 없어서 못 먹는 ‘두쫀쿠 열풍’

두바이 쫀득쿠키. 이름만 들어도 일단 두바이에서 만든 쿠키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두바이 초콜릿은 들어봤어도 쫀득쿠키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쿠키면 쿠키지 쫀득쿠키는 뭘까. 여자친구가 먹고 싶다던 두쫀쿠를 더현대서울에서도 판다기에 점심시간, 지하 1층 식당가를 헤집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품절 대란이 일어날 만큼 인기리에 판매 중이었기 때문이다. 절찬리 판매 중인 ‘존맛탱 쿠키’ 두쫀쿠는 ‘두바이 쫀득쿠키’의 줄임말로 중동식 얇은 면인 카다이프와 피스타치오 크림을 속에 넣고 마시멜로 반죽으로 감싸 바삭하면서 쫀득한 식감을 내는 쿠키 형태다.

[지금,여기] 두 손 모아 경건함으로 “소원을 빕니다” 「2박3일, 교토여행③」

❹청수사·니넨자카·산넨자카·은각사 자연을 재편집하는 섬세한 손길과 애절함 관광지의 정수였다. 청수사 그러니까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 이르자 새빨간 사찰 건물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청수사는 매년 12월 12일 일본 ‘올해의 한자’를 발표하는 곳이다. 인왕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신비로운 눈빛으로 인왕문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노송나무 껍질로 만든 본당 지붕은 나조차 익히 알고 있는 교토의 유명한 건물이다. 높은 지대를 감추고 있는 파릇파릇한 가을의 나뭇잎이 우드톤 본당의 지붕과 대조적이었다. 자연 속 사찰로 더욱 살아나는 분위기였다. 사찰로 향하는 길목에는 니넨자카와 산넨자카가 늘어섰다. 일관된 목조건물과 절제된 간판이 교토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무척 많은 관광객에 걸음을 멈춰야 했을 정도다. 전범기 앞에선 잔기침이 터졌다. 은각사에서 나는 동양 전통의 권력과 위계적 미학을 감지했다. 서양 전통은 압도적 규모와 기하학적 질서로 권위를 드러내지만 일본의 건축은 자연을 통제함으로써 힘을 보여주려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목조 건물은 콘크리트와 달리 거대한 규모로 짓기 어려워 자연을 통제하거나 인위적으로 길들이는 방식으로 발전했다는 인상이다. 모래를 쌓아 만든 코게쓰다이(向月台)와 긴샤단(銀沙灘)은 동양적인 권력처럼 보였다. 이치조지로 향하기 전, 우리는 철학의 길을 걷고서 한 카페에 도착했다. ‘하나 긴카쿠(花ぎんかく)’. 우리는 이곳에서 커피와 멜론 소다를 마셨다. 빨간 벽지로 마감된 카페에는 일본인 가족으로 보이는 단란함이 엿보였다. 아버지와 딸이 손뼉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흐뭇한 광경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나, 아쉽게도 이 카페는 9월 30일을 끝으로 폐업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미소로 대해준 그곳 점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여기] 단정한 제복, 섬세한 인사… 이치조지에서 느낀 일본의 감각 「2박3일, 교토여행②」

카페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허탈했다. 하필 우리가 방문한 때가 ‘추분(秋分)의 날’이었다. 우리에게 추분은 평범한 날이지만, 일본에서는 공휴일인 모양이다. 오늘 낮에 방문했던 ‘도쿠라 교토 산조점(手づくりハンバーグの店 とくら 京都三条店)’에서 세트 메뉴 주문이 어쩐지 불가했다. 도쿠라 교토 산조점은 함박 스테이크를 파는 곳이다. 내가 먹은 명란 마요 함박 스테이크를 젓가락으로 자르자 쏟아져 나오는 육즙에 놀랐다. 40분을 바깥에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❺무시야시나이 카드 결제 물으니 한국어로 “아, 네!” 달콤 디저트 카페 ❻센나리 새침한 접객 태도 허나 풍성한 식탁 평범 일본 가정식 즉석 데코레이션 디저트 카페 ‘무시야시나이’, 푸짐한 일본 가정식 ‘센나리’ 다만 우리의 발걸음이 잠시 중단돼야 했다. 오래도록 걸었기 때문이다. 은각사와 철학의 길을 걷다가

[지금,여기] 뜨듯한 온천과 시원한 맥주 “캬, 이 맛이지” 끝없는 ‘오사카의 밤’ 「2박3일, 오사카여행③」

우드톤 단색의 고즈넉한 도시가 교토였다면, 오사카는 그저 화려하고 젊은 분위기의 도시였다. 우리는 나가호리바시를 기반으로 오사카의 도톤보리와 난바, 우메다, 나가자키초를 돌아다녔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큐카츠 토미타(牛かつ 冨田)다. 각자 구워 먹을 수 있는 큐카츠 전문점이다. 다행히 우리는 기다림 없이 바로 입장해서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와,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맛. 달달하고 고소하며 담백한 맛. 입 안에서 녹는 육즙이 끝내줬다. 현금만 받는 가게라 카드로 결제하지 못했다. 곧이어 낮에 예매해 둔 리버 크루즈를 타고 우리는 도톤보리 강을 누볐다. 베테랑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주변 관광객들이 선사하는 손인사에,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가까운 타지에서 느끼는 이색 풍경에 하나가 되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낮에는 여자친구를 따라 우메다 근처에서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 우리는 아식스 오사카 스토어에 방문했다. 스티브 잡스 같은 분위기의 직원이 우리를 맞았다. 여자친구가 둘러보는 동안, 나는 작은 소파에 앉아 쉬었다. 다소간의 긴 시간을 머무르는 바람에 여자친구와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며 나왔다. “失礼しました。(실례했습니다.)” 곧장, 직원이 90도로 숙이며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중한 인사에 깜짝 놀랐다. 작고 진심 어린 순간에서 문화적 감동이 남은 것이다. ❼오사카 아식스·마크 커피 ‘90도 인사’ 진심 어린 문화적 감동 카라멜마끼아또, 바리스타의 손맛 ❽큐카츠 토미타·리버 크루즈 직접 구워 먹는 담백하고 고소한 맛 도톤보리 강 유람하는 이색 ‘밤풍경’ ❾소라니와 온천·토리키조쿠 온천물에 담근 설익은 발, 피로가 싹 여자친구와 마신 달달한 맥주 한 잔 감동은 나가자키초(中崎町)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끝내 다다른 곳 ‘마크 커피 로스터스’에서 우리는 쉴 수 있었다. 나가자키초 카페 거리는 관광 친화적인 동네가 아니었다. 내부 사진 촬영이 어렵거나 현금 결제만 가능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크 커피에서 짧은 시간 지친 몸과 마음을 가누었다. 이따금 귀에 들려오는 일본 밴드 음악에 힐링이 되기도 했다. 카페에 머무는 동안, 오사카 시내에 짧은 가랑비가 내렸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우리는 고민했다. 예전부터 생각해온 곳을 예매했다. 벤텐초역(弁天町駅) 근처에 있는 소라니와 온천(空庭温泉)이 끌렸기 때문이다. 소라니와 온천은 다른 의미에서 놀라웠다. 이 가격에 이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자친구는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도 “그날 숙소의 작은 욕조에 입욕제 넣어서 물 받아 넣고 몸을 담궜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소라니와 온천은 일본 전통 의상인 유카타(浴衣)를 입고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특히 5층에서 4층으로 내려가면 공중정원에서 족욕을 즐길 수 있는데, 발을 담그면 따뜻함에 온몸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온천의 다양한 공간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다시 우리 발걸음은 도톤보리로 향했다. 토리키조쿠 도톤보리점(鳥貴族 道頓堀店)에서 꼬치구이와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도톤보리에서 나가호리바시까지 향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다채로운 얼굴의 오사카를 보았다. 확실히 교토에 비해 젊은이들의 도시라는 분위기가 강했다. 가출 청소년으로 보이는 아이들, 거리를 쏘다니는 폭주족까지 밝고 친절한 모습만이 아닌, 사회의 이면을 마지막 밤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짐을 정리해야 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 로손(Law-son)을 들러 생크림이 담긴 빵을 먹었다. 오사카에서 먹는 세 번째 빵이었다. 어느덧 오사카의 밤이 스산해졌다. 그새 가을이 다가온 것이다. 우리의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9월로 미뤄야 했다. 여자친구와 다행이라는 고백을 주고받았다. 이토록 흐드러진 날씨와 분위기, 꼭 지금이어야 할 여행의 묘미를 만끽했기 때문이다.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