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다시 그리스도께로!

2018년 06월 14일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최근 통계청은 8000가구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습니다. 하위 40% 가구는 근로소득이 줄었습니다. 출산율은 37만 명으로 역대 최저 수치입니다. 남녀 간 갈등, 동성애와 같은 젠더 문제, 세대 격차는 어떻습니까.

청년들은 ‘헬조선(hell-chosun)’이란 말을 입에 담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지옥’으로 묘사한 자조적 단어를 보며 무엇을 느끼십니까. 교회는 매년 거대한 범죄가 폭로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마태 5:13)이어야 할 교회는 길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야 말로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시대 유대 민족도 이와 같았습니다. 1세기 팔레스틴 지역은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지방 도시로 이루어졌습니다. 리처드 호슬리(R. Horsley)는 하스모니아 왕조 하에 살았던 유대 민족이 빈부격차가 컸다고 말합니다. 세금은 어찌나 많던지요! 학자 벨로(F. Belo)는 유대지역 세금만 600달란트라고 합니다. 노동자가 꼬박 하루도 쉬지 않고 600만 일간 일해야 낼 수 있는 액수입니다.

40년 경 말기엔 가뭄까지 찾아와 대중이 저항까지 했다고 하니, 그 시절은 아마 우리가 사는 2018년보다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그렇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은 시각도 밤(2)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랍비라 부른 이 장면에서 한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1-40에는 오병이어 사건에서 표적을 보여주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이요, 랍비로 부르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새번역, 6:27).”

니고데모 역시 주님의 정체를 아직 알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 근거가 본문 2절입니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서 와서 말하였다…….”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 니고데모는 예수를 믿는 것 같아 보입니다. 3장 이전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거민들의 장면에서도 우리는 한 가지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2:23-24)”. 이들은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바로 ‘참된 믿음’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루살렘 거민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믿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3).” 예수님의 반응은 칭찬이 아니었고 꾸짖음에 가까웠습니다.

니고데모와 복음서 예수

◇니고데모의 착각: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의 의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다시 난다”는 헬라어로 “아노텐(ανωθεν)’입니다. ‘다시(again)’라는 의미와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뜻을 지닙니다. 아무래도 니고데모는 ‘다시 난다’는 말을 우리 몸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보지 못한다”는 말 때문에 더욱 그렇게 받아들인 듯합니다. 몸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으로 말이지요.

그래서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4)”하고 묻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는 말이 이를 보여줍니다. 거듭남이란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거듭남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십니다. 바람으로 말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8).” 바람은 눈에 보이거나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하고 불면 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거듭남, 하나님 나라는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바실레이아(βασιλεια)를 의미합니다. 통치이지요. 하나님의 통치, 주권, 다스리심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요한복음에선 예수 그리스도의 ‘왕됨’을 말해줍니다. 왜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표징을 보여주셨고, 오병이어 이적을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잘 먹고 잘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요? 구원자 예수, 권세자 예수, 오직 예수님만이 죄와 ‘어둠’ 속에 슬퍼하는 우리들을 위한 안식(마태 11:28)이요, 눈물 흘리시는(요한 11:35), 인격체 예수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놀라운 구원자 예수를 니고데모는 알지 못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가르칠 선생으로, 표적에서 치료자로 보았을 뿐, 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실(갈라디아서 5:1) 통치자요 구원자 예수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니고데모가 본 시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진심을 넘어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시며, 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주님’이십니까.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고 말씀하십니다. 침례 요한을 의식한 구절일까요? 신앙적 요식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예배 생활, 헌금, 봉사, 헌신…… 다 좋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나셨습니까. 그 질문을 니고데모를 통해 주님께서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8).”

니고데모와 주님과의 대화는 일대일의 구도로 시작되지만, 어느새 다수 대 다수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11). 12절에 등장하는 ‘너희’를 2장 23절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거민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분명한 건 요한복음의 저자가 니고데모를 중심으로 우리에게 교훈 주려함입니다.

 

밤 중 찾아온 니고데모
밤이란 메타포가 가져다 준 헬조선,
예수를 믿으나 예수에게 몸을 맡기지 않은 군중 

니고데모의 착각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에서 구원자, 통치자 예수로 믿어야 

거듭남의 시작은 인정
사람 앞에서 깨끗하고 착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까지 아는 神을 속일 수 있을까 

하늘의 일은 십자가 사건
땅의 일, 분명하지 않지만 하늘의 일과
이분해서는 안 돼… 하늘의 일은 예수의 십자가 

믿음으로 시작하는 거듭남
영생 방법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예수를 믿음…
율법, 철학, 지식으로 이뤄지지 않아 

성장하는 존재, 그리스도인
성장을 내포한 거듭남, 그리스도인은 성장하는
존재로 여정인 구원을 향해 걸어가야

◇거듭남은 인정함에서 시작합니다

니고데모가 아주 적절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9)”라고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요. 사람은 가진 척 할 때 괴로운 법입니다. 

영화 ‘거짓말(2015)’도 있지 않습니까. 15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여주인공 ‘아영’이 커피를 마시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한강 둔치가 보이는 전망 좋은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고급아파트 공인중개사가 등장하면서 그 집은 주인공의 집이 아니라는 게 드러납니다. 비싼 물건도 구매할 것처럼 즐기다가 구매하지 않는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이지요. 문제는,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더욱 그럴싸한 거짓말로 자기 자신를 포장 한다는 점입니다.

구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깨끗하고 구원 받은 것처럼 말합니다. 착한 일도 하고, 봉사도 하면 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신(2:25)” 주님 앞에서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그 주님 앞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맙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그 첫 번째 행동은, 무지와 죄인임을 인정함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납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복수로써 표현한 것을 보면 비단 니고데모만의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땅의 일을 성서에선 정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1세기 팔레스틴 지역에서 일으키신 표적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이분하여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덜 필요하고, 더 중요한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직업적 일, 학업, 봉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나타내고 있는 건지, 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일’은 무엇입니까. 흥미롭게도 주님은 광야에서 모세가 구리 뱀을 든 사건(민수기 21:6-9)을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주님도,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십자가를 지실 당신의 운명을 보이십니다. “다시 난다”라는 헬라어, ‘아노텐(ανωθεν)’은 ‘다시’와 ‘위로부터’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모세 구리 뱀 사건을 말씀하신 것도 ‘위로부터’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오로지 하늘에 내려온 이요, 하늘로 올라간 이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승천하심으로써 구원자이심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구리 뱀 사건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 얻는 방법을 말씀해주시는데 영생(ζωην αιωνιον, 조엔 아이오니온)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그 영생의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7:3은 영생을 “한 분이신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요한일서 5:20은 어떻습니까?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등장하는 ‘안다(γινωσκωσιν)’는 말은 율법으로써 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요한복음 6:69과 17:8은 “믿으며 안다”고 하며, 오늘 본문 15절과 17:3을 비교하면 영생은 믿음이며, 아는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부 하나님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 알 수 있습니다(요한 5:24).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15) 가능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결코 혈과 육으로 될 수 없습니다(요한 1:13). 율법도, 철학도, 지식으로도 이뤄질 수 없는 그 믿음을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인 2018년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5).”

◇구원은 여정입니다

주님께서 민수기에 등장한 구리 뱀 사건을 언급하신 건, 다소 희망적입니다. 그것은 아무 대가가 없어도, 능력이 없어도 바라보기만 하면 누구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다소(多少)’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갈 수 없지 않겠느냐는 질문과 함께합니다. 바로 거듭남이란 ‘성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후, 과거를 그리워했습니다. 가나안을 정찰한 후, 이집트로 돌아가자며 모세를 원망했을 땐, 가데스바네아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선포하기까지 합니다(민수기 32:8-11). 거듭난 사람은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와 주님과의 대화를 살펴보며, 한 가지 사실을 아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은 여정(旅程)이라는 사실입니다. 완성으로서의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을 이뤄두고 방탕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사귐으로 표현한 ‘구원의 여정’을, 저를 포함한 여러분은 지금도 묵묵히 걸어가고 계십니까. 주님을 목적과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한 20:28)”으로 고백한 도마의 고백처럼 구원자, 주님으로 모시고 계십니까.

니고데모는 밤중에 주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빈부격차가 큰 나라였습니다. 청년들 입에서 늘 ‘헬조선’이 흐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과 아픔 속에서 구원의 빛을 찾아다녔습니다. 병과 귀신으로 고통당하던 데가볼리와 예루살렘,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찾아온 무리(마태 4:25)를 보며 주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그 ‘밤에’ 예수께 찾아온 니고데모의 마음처럼, 구원자이시며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향합시다.

주님은 빛이십니다(요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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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음 신앙의 별이 지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목사 靈山 조용기… 85세 일기로 逝去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85세 일기로 서거했다.(2021.09.14)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지난 2월 부인인 고(故) 김성혜 한세대 총장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조 목사는 2020년 7월 19일 ‘예수님과 강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나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으로 보이는 영상물로 설교를 대체한 바 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오른쪽 눈을 감고 설교하고서 뇌출혈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는 해방 이후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1958년 5월18일 5명의 교인으로 개척했다. 1961년 천막 성전에서 서대문성전으로, 1969년 여의도 부지에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건물을 세웠고 1979년 교인 10만명을 돌파해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84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개명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담임목사 직에서 은퇴한 조 목사는 원로목사로 취임했고 2020년 7월까지 주일4부예배에서 설교를 진행했다.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가 뒤를 잇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평소에 복음성가를 작사했다. 아내

조용기 목사 서거에 한국교회 이어진 哀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서거에 한국 보수교회는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고 조용기 목사님의 한국교회장에 즈음하여’ 성명을 통해 “산업화 시대, 실향민이 서울로 집중되는 변화의 시기에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치며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 위해 NGO 선한사람들 설립과 헌혈 운동 등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며 한국교회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다”며 애도했다. 한국교회연합은 ‘조용기 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합니다’ 성명에서 “지금도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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