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종교인 납세, “세금을 내던가, 관리를 잘 하던가”

2018년 05월 21일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5>

국가와 교회의 분리.

대한민국 헌법 제 20조 2항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되, 종교와 정치를 구분했다. 그렇지만 교회를 둘러보면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지 않은 광경을 본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일념(一念)으로 퍼진 서명 용지, 특정 후보를 간접 거론하며 지원하는 모습, 교회에 방문하면 예배 시간에 인사하는 광경.

◇아우구스티누스, ‘두 도성’ 이론

종교와 자본이 유착되면, 그 종교는 타락하기 십상이다.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국가와 교회가 분리 된 이론은 누가 주장한 것일까. 보편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구분한 틀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비롯한다. 로마가 알라릭 서 고트족으로부터 약탈당한 후 집필한 ‘신국론’에서다.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으로 구분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하는 사물들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공통성에 의해 결속된, 이성적 대중의 집합.’ 정치가 키케로가 정의한 ‘법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통성에 의해 결속된 대중의 집합’과 다르다. 키케로에게 법은 공동체에게 ‘정신’이자 ‘영혼’인 반면 대중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어떤 대중인지를 안다고 본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랑(욕망)은 일시적인 개념을 사랑하느냐(탐욕),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대하느냐(선한 욕망)으로 구분했다. 두 사랑을 통해 인류를 두 개의 사랑으로 구분했는데 그게 바로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다. 성서 시편(46:5-6, 48:2-3, 87:3)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도성(새번역)’에서 ‘두 도성’ 개념이 등장했다. 물론 구분할 수 있는 가시적 개념은 아니었다. 두 도성은 보이지 않게 혼합돼 있기 때문에 종말의 날, 온전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타자 위한 그리스도인을 외친 루터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세속권세(1523)’를 통해 자손을 둘로 구분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아담 자손’ ‘세상에 속한 아담 자손’.

‘세속권세’에서 루터는 세속법과 칼이 하나님의 뜻이자 정하심이라고 성서 구절(로마 13,1; 1베드로 2,13-14)로 해석했다. 침례 요한 앞에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질문한 군인에게 군인이기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은 점, 백부장 고넬료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인 사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은 세상에 칼을 두었다고 설명한다.

율법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범죄자를 위해 필요한 것(1디모데 1,9)처럼 세속 정부는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가정과 사회 안녕을 위해 필요했다. 세속의 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 않다. 본성에 따라 선한 열매를 맺기 때문(마태 7,8)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위해 섬기고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속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칼은… 죄를 벌하며 악을 방지하기 위해 매우 유익하고 필요한 것… 기꺼이 칼의 통치에 복종하며 세금을 내며… 정부를 촉진시키는 일을 돕고 정부가 존중과 두려움 속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마르틴 루터, 451-452)

ⓒLucas Cranach the Elder

◇칼빈에겐 하나님께 신적 권위 부여 받은 통치자

존 칼빈도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와 ‘국가의 통치 질서’를 구분한 칼빈은 갈라디아서 3:28과 골로새서 3:11의 다양한 신분에 주목했다. “어떤 처지에 있든 어떠한 국가의 법아래서 살든, 그리스도의 나라가 절대로 그런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상관 없다”(기독교강요-하, 584)고 말한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국가적 통치가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았다. 칼빈은 “돕는 장치”라고 표현하며 이 장치를 빼앗는다면, 인간성 자체를 빼앗는 행위로 비유했다. 세속 정부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영적 정부가 완전해지면 되지 않느냐고 묻지만, 칼빈에게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칼빈에게 통치자는 하나님께 신적 권위를 부여 받은 존재다(탈출 22,8; 시편 82,1-6).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표현한 통치자들은 신명기에 의해(1,16-17), 유다 왕 여호사밧이 재판관을 임명할 때도(1역대 19,6) 하나님을 위해 판결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세금 징수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군주들로서는 그들이 부과하는 각종 조세 등 곡물들은 공적인 필요를 충당하는 정도로 그쳐야 하며, 아무런 연유도 없이 일반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폭군적인 착취 행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기독교강요-하, 588)

‘두 도성’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서 ‘神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으로 구분해 일시적 탐욕보다 선한 욕망 추구

두 자손으로 나눈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이며 신이 세웠기에 세속 정부는 필요하다고 주장

신적 권위 부여 받았다 주장한 칼빈
“어떤 처지든 그리스도의 나라에 상관없다”며 오히려 국가적 통치를 ‘돕는 장치’ 言

현실 문제로 접근한 존 웨슬리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며 신자를 청지기로 부르셨다는 청지기 사상 설파

직업을 신과 협력으로 본 존 스토트
직업을 목적 위한 행위로 보는 자세를 비판하며 “중요한 건 통합된 인간이 되는 것”

 

◇소유공동체와 청지기 사상, 가난함을 강조한 웨슬리

목회자 개념으로 성찰을 요구한 웨슬리 시대에 해결책은 오순절 소유공동체와 청지기 사상이다. 교제와 기도하기를 힘쓴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공동 소유에 초점을 맞췄다. 이 오순절 소유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청지기 사상’으로 본 것이다. 웨슬리는 축적된 부를 지적했다. 1780년, ‘축적된 부의 위험(The Danger of Riches)’에서 삶의 평안함 이상의 필요를 “어리석고도 해로운 정욕”에 빠지게 한다고 지적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함이 우선이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신자를 청지기로 부르셨다는 소명론을 주장했다. 웨슬리 시대는 공동경작으로 지방 인구가 감소했다. 농업을 주로 삼았던 이들이 산업지역이나 도시외각 빈민가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익빈 부익부가 부상했다. 사람들은 가난을 하나님의 징계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웨슬리는 반대했다.

가난의 원인을 일자리 부족으로 본 웨슬리는 사치스러운 귀족들을 비판했다. 과대세금은 국가 부채를 갚기 위한 원인으로 등장했지만 정치적 술수였다. 식량과 땅값을 세금 명목으로 올리면서 호화생활 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경제적 정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의해 시작 될 것임을 희망했다. 청지기 사상이 필요한 이유였다. 목회자는 가난한 자들을 후원하는 것을 넘어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더 큰 가치 실현을 위해 고민하는 자세를 촉구했다.

◇스토트에게 ‘일’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행위

소명은 “무언가 하라”가 아니라 “무언가가 돼라”는 의미로 설명한 존 스토트는 직업과 소명을 ‘소명’ ‘섬김과 사역’ ‘일’로 구분했다.

‘천하를 얻고도 제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있나’(마태 16,26)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인생은 우리가 어떤 직업적 능력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인간이 되는 것, 온전하고 통합된 인간이 되는 것”(온전한 그리스도인, 40)으로 설명했다.

단순한 직업으로 보지 않은 스토트에게 직업은 ‘부르심(calling)’이다. 소명으로 그리스도께 속하며, 교제하고 자유를 즐김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노동은 하기 싫은 행위, 앞으로 휴가를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변질됐다. 스토트도 같은 시각이다. 직업을 불가피한 숙명이나 유감스러운 일로 여겨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적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직업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려는 섬김,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코이네 그리스어에 의하면 사도행전 6장에서 교회 회의에 역할 분담은 같은 단어인 ‘디아코니아’로 표현했다. 일곱 사람의 구제 사역은 ‘디아코네인(diakonein)’이며 말씀 사역은 ‘디아코니아(diakonia)’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일하는 존재로 계시했다. 인간에게 일을 맡겨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과 협력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게으름이란, 인간성 부인을 뜻하고 전도서를 인용하며 일하는 행위를 긍정한다.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2,24)”

◇종교인 과세 시행했으나, 반발하는 교회

정부는 2018년 1월 1일부터 종교인 과세를 시행했다. 종교인은 근로자가 아니라는 종교계 입장을 받아들여 근로소득과 기타소득을 구분해 설명해왔다. 종교인도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국민개세주의(國民皆稅主義)’에 따라 세금을 내야 하지만 한국 교회는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가톨릭교회가 1994년부터 원천징수로 소득세를 납세한 상황과 달리 개신교회는 교회회계 기준이 정리되지 못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1987년 9월, ‘교회회계기준’을 마련했지만 타 교단은 전무한 상황이다. 다만, 경동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나 명성교회, 충현교회, 높은뜻선교회 등 47개 교회는 세금을 납부해왔다. 종교 탄압과 국가와 교회 분리 원칙이라는 명목으로 면세를 유지하는 건 세금을 내 온 교회 입장에서도 궁색한 변명이다.

종교단체 회계를 다룬 이원주 연구자는 석사논문을 통해 회계전문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결산서와 계정종목체계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고, 종교단체 회계담당자들이 회계학 전문지식이 없어 제무재표를 신뢰하기 어렵고, 재정 관리자와 감사 사이에 친분으로 인해 감사가 잘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 내부통제제도 부재로 인해 오류와 부정이 발견돼도 예방되지 않은 점을 들었다.

지난 해, 판결에서 명성교회 이월금 800억 원이 드러났다. 뉴스앤조이는 14년 간 홀로 이월금을 관리한 박 재정장로와 이월금 의혹을 보도했다. 법원은 “매년 이월된 자금이 실제 어떤 기준으로 관리, 투자되는지, 투자 수익금, 정산 내역 등도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 이 같이 보도했다.

누군가는 세무조사가 종교인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뉴스앤조이 인터뷰에서 최호윤 회계사는 지적한다(2017. 7. 25). “세무조사가 뭐가 부담되나. 왜 무서워하나. 고액 헌금자 들여다보는 용도로 쓸 거라 우려하는데, 반대로 일반 비영리법인은 그 사람에 대한 기부금 정보를 세무서에 다 제출한다. 교회는 왜 못하겠다는 건가.”

 

루터는 ‘세속권세’에서 마태복음서 7장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속의 칼이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루터는 직업을 세속적으로 보지 않았고 소명 의식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은 사슴이 입을 외투를 만든 재봉사로, 한 사람의 목공으로 일한 그리스도, 구속자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는 우쭐대지 않고 양젖을 짜고, 주전자를 닦은 존재로 묘사했다.(베인턴, 마르틴 루터, 326)

아기 예수를 만난 목자들은 수도사 옷을 입지 않았고, 양들에게 “되돌아갔다.”(누가 2,20) 비참한 꼴을 당할 양들 앞에 목자는 일하는 존재였다. 목사들은 요한복음서 10장을 인용하며 자신을 목자로 칭하곤 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납세 앞에 질문을 받았다. 일하는 하나님 앞에 목회는 노동이 아닌가. 회계는 투명한가. ‘사회적 섬김에도’ 왜 교회는 사회로부터 지탄받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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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만 읽으면 되지, 굳이 구약도 봐야 하나” 그래서 교회는 구속사에 주목한다

같은 신명기 문헌 안에서 연좌제 허용·불허 왜 일까 수많은 사람 손 거친 결과 기독교라 부르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가톨릭은 더 나아가 제2경전이라 부르는 ‘토빗기’ ‘바룩서’ ‘집회서’ ‘마카베오서’ 등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기본적으로 구약은 고대 이스라엘을 다룬다. 어려운 구약을 굳이 공부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명확하게 예수의 생애와 죽음, 부활, 재림을 말하는 신약만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 묻는 이들도 있다. 신약성경 중 복음서를 읽다보면 각주에서 구약성경 주소를 볼 수 있다. 신약성경 구절이 구약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마태7,23에서 각주는 시편6,8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가 시편 구절을 인용해 설교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복음서 외에도 바울 서신이나 일반 서신에서도 구약 인용을 볼 수 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하박2,4)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로마1,17) 하박국과 로마서 본문을 정독하다보면 바울 사도가 하박국 구절을 인용하며 재해석함을 알 수 있다. 하박국서 내용은 ‘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힘들게 살며 믿지 않는 이방인은 승승장구하느냐’는 물음(1,2-4)에 야훼 하나님이 “정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2,3)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4)며 믿고 기다릴 것을 독려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박국의 의도대로 인용하지 않는다. 단순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려함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향한 구원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면서 바울은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는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권면한 것이다.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에서 구약의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살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연구자 조주희도 논문(어거스틴, 칼빈과의 비교를 통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관한 연구, 2015)에서 칼빈은 구약의 역할에 대해 구약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신약성경을 지침서로 활용한 점을 가리켰다. 예수 그리스도 역할을 구약 본문으로 인용하는 해석 방법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비슷하다. 단지 가톨릭 교부 전통과 루터의 해석 방식, 칼빈의 해석 방식 등으로 세분화되어 차이를 만들 뿐이다. 개신교회는 이를 ‘구속사’라고 부른다. 유대교는 신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구속사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신약은 구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신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약도 필요하다. 신약과 구약을 떼어 한 경전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가톨릭과 일부 교회가 성경 읽을 때 구약과 복음서, 서신서 세 군데를 모두 읽는 게 아닐까. 누가 구속사적 해석 방식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성경 형성 과정을 보면 이해 가능하다. 구약은 얌니아 회의(기원후 90년)를 통해 확정되었으며 신약은 카르타고 공의회(기원후 397년)에 이르러서야 정경 과정을 마무리한다. 예수가 죽고 300년가량 지나서야 신약조차 정경으로 완성되어 지금에 이르렀고 구약은 말할 것 없이 원본을 확보할 시간과 여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오늘의 성경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사라지고 추가된 문헌 자리는 오늘 우리의 성경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없음’ 구절 속에는 성경 형성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의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이다. 신명5,9에서는 연좌제를 허용하지만 신명24,16에는 연좌제를 부정하는 성경 내용상 불일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같은 신명기 문헌 속에서 불일치가 나오는 이유는 성경이 다양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으로 모든 신약성경을 재해석할 수는 없다. 마태2,23에서 나사렛 사람이라 부를 것이라 예언한 구약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잘한 성경 속 오류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성경을 완벽히 해석할 수 없다. 이쯤 되면 ‘구속사’ 용어 자체가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가톨릭도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으로 이어지는 예수로부터 시작될 해방을 믿는다. 자기가 해석한 성경이 더 구속사 관점이고, 더 예수 중심이라는 미사여구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완벽한 해석이란 없다.

[미망이의 신학 서재] “호오, 의외네요.” 非전공자가 쓴 성경 통독서라니…

“호오, 의외네요.” 만화 드래곤볼에서 악당 프리더는 예상 못할 만큼 강해진 주인공 일행에 놀란다. “호오 전투력이 상승하는군요.” 한 페이지 펼치자 엇비슷한 입버릇이 나왔다. 저자가 신학이나 종교학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공자 아닌 사람이 성경 가르치는 책을 쓰다니. 그렇다고 전공자만 써야 한다는 편견에서 느낀 당혹감은 아니었다. 전공자도 어려워하는 성서에 관한 글쓰기를 일반 신자가 감당했다는 사실에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의외는 이어졌다. 본문 초반부터 다른 성경통독 서적에서 다루지 않는 성서 번역의 역사를 다룬다. 보통 신학을 모르는 일반 신자들은 성경에 과도한 신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신의 가르침과 의미를 성경이라는 문자로 가두어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책은 다르다. “우리는 ‘신이 메시지를 준 대상이 고대인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읽을 때는 현대 뉴턴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정력을 소비하는 것보다 고대인들이 어떤 역사적 경험을 했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32쪽) 기독교인 다수가 가진 성경에 대한 생각에 도전장 내밀며 포문을 연 것이다. 신학교에선 저자의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자가 집필했다니. 흥미롭고 재미있다. 미망이의 평점가독성│★★★내용│★☆☆소장가치│★★☆보너스점수│★☆☆총점│7점 평점 기준가독성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내용은 쉽지만 구약의 존재를 묻게 만드는 구성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학자들이 그간 써놓은 내용을 정리했다”(머리말) 전체적으로 괜찮은 입문서로 보인다. 중간사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성경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읽을 정도로 쉽다. 하지만 ‘좋은’이 아니라 ‘괜찮은’으로 평가한 이유는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순복음 신앙의 별이 지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목사 靈山 조용기… 85세 일기로 逝去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85세 일기로 서거했다.(2021.09.14)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지난 2월 부인인 고(故) 김성혜 한세대 총장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조 목사는 2020년 7월 19일 ‘예수님과 강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나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으로 보이는 영상물로 설교를 대체한 바 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오른쪽 눈을 감고 설교하고서 뇌출혈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는 해방 이후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1958년 5월18일 5명의 교인으로 개척했다. 1961년 천막 성전에서 서대문성전으로, 1969년 여의도 부지에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건물을 세웠고 1979년 교인 10만명을 돌파해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84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개명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담임목사 직에서 은퇴한 조 목사는 원로목사로 취임했고 2020년 7월까지 주일4부예배에서 설교를 진행했다.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가 뒤를 잇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평소에 복음성가를 작사했다. 아내

조용기 목사 서거에 한국교회 이어진 哀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서거에 한국 보수교회는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고 조용기 목사님의 한국교회장에 즈음하여’ 성명을 통해 “산업화 시대, 실향민이 서울로 집중되는 변화의 시기에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치며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 위해 NGO 선한사람들 설립과 헌혈 운동 등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며 한국교회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다”며 애도했다. 한국교회연합은 ‘조용기 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합니다’ 성명에서 “지금도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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