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 03. 02 | 수정 : 2019. 03. 02 |
왜 Why?
옥성호 지음 | 은보 | 224쪽 | 1만원
여러모로 한국교회는 살아남을 위기에 처했다.
지난 2017년 학원복음화협의회가 발표한 수치가 단순히 기독교인 대학생 중 20%만이 출석 중이라는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신뢰받지 않으며 심지어 시민단체보다 믿지 않는다는 사실엔 그만큼 공적(功績)을 쌓아온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부동산 투기와 목회자 세습, 조세 체계에 미온적 태도를 지니는 데엔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이다. 강박관념이 목회자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교회 내에선 알레고리 해석, 반동성애와 창조과학을 위시한 유사과학을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여진 배경에 세속 사회에서 타락해가는 교회를 구조하려는 교인들의 이데올로기도 한 몫 했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 교회 세습
7-80년대 급격한 성장을 경험한 한국교회가 1990년대에 이르자 새 문제가 발생했다. 세대교체였다. 담임목사의 리더십으로 운영한 교회가 앞으로도 지속되기 위해서는 담임목사와 비슷한 카리스마를 지닌 이들로 권력이 재편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흡사 북한 체제와 다르지 않은 광경이 한국교회에 퍼지고 말았다.
시작은 충현교회다. 1997년 퇴임한 김창인 목사가 아들 김성관에게 물려주면서 광림교회(2001), 만나교회(2004), 금란교회(2008), 임마누엘(2009), 왕성교회(2012), 최근에는 명성교회(2017)가 세습에 성공했다. 하지만 사랑의교회는 달랐다. 세습을 피하고도 후계자 지명이 가능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옥한흠 목사는 오정현 목사를 선택했다.
저자는 물었다. ‘왜 옥한흠은 오정현을 후임으로 선택했을까’하고. 아버지 옥한흠 이후 아들 옥성호의 질문은 1987년으로 돌아간다.
◇플랫폼, 교회를 리모델링해 살리다
대학부 수련회 주제인 ‘하나님 나라’를 보고 저자는 그 탁월함에 감탄한다. 오정현 목사가 가진 문제 의식이 기독교 플랫폼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 초 윌로우크릭교회와 새들백교회에서 경영학적 가르침을 한국교회에 접목하길 바라던 저자와 일치하던 지점이었다. 그는 교회 컨설턴트를 꿈꾸었다.
사랑의교회에 부임한 오정현 목사는 2003년 특별새벽기도회(특새)를 추진했다. 특새는 성공적이었다. 담임목사로 정착하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영화표 마냥 늘어선 예배당 대기줄을 보며 교회 건축의 필요성을 상기시켰으니 말이다. 그리고 3001억 서초구 사랑의교회 신축으로 이어졌다. 공간의 협소함이 만들어낸 신화였다.
뿐만 아니라 옥한흠 목사가 강조한 목회방침인 ‘제자훈련’의 국제화를 모토로 제자훈련원을 ‘국제제자훈련원’으로 개명했다. 글로벌한 현대 사회에 복음을 전할 전초 기지로 생각한 오정현 다운 아이디어였다. 세습이 만연한 대형교회 사이에서 세습 없이도 성공적인 계승이 가능함을 보여준 선례라는 점이 사랑의교회를 돋보일 기회이기도 했다.
◇플랫폼이 된 사랑의교회
여기에서 글을 마친다면 오정현 목사는 한국교회에 더할 나위 없이 교회를 성장시킨 종교지도자로 끝맺었을지 모른다. 오정현의 측근이 된 옥성호로 한국에 귀국할지도 모른다던 저자가 오정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건을 그와 가진 식사로 회상했다.
한 장로, 오 목사 부부와 만난 식사에서 저자는 목사의 환상이 깨졌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봄과 가을에 개최하는 특별새벽부흥회를 ‘공연화’로 지적한 저자가 말하려는 건 ‘감성주의 컨벤션(感性主義 convention)’이었다. 식사 후에도 오 목사 설교를 여러 차례 들었지만 설교 속에 알맹이가 없었다는 문제의식은 저서 기저에 흐르는 줄기다.
현재 사랑의교회는 ‘영적 공공재’를 앞세워 예배당을 문화 공간으로 꾸미거나 마당을 행사로 사용하며 지역 사회와 소통을 보여줬다. ‘신앙자본’을 ‘영적 플랫폼’화 시켜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교회를 사용하리라 믿었다. 이런 걸 ‘영적 제곱근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조용하다 못해 적막이 흐르던 교회는 화기애애해졌고 옥한흠의 고함이 설교에 넘치던 사랑의교회는 두 손 들고 찬송을 부르는 강남판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되고 말았다. 법적으로 하등 문제 될 게 없다. 교회 밖 신자들은 세습하지 않고도 연착륙에 성공한 교회로 호평했다.
하지만 플랫폼이 된 사랑의교회에 예수의 정신이 남아 있는지 물음을 던진 저자의 문제의식이 발동했다.
◇종교적 기독교와 충돌하는 복음서 예수
오정현을 소개하며 옥한흠은 “옥 목사에게 있는 장점이 오 목사에게 없을 수도 있고, 오 목사에게 있는 장점이 옥 목사에게 없을 수도 있다”(85)며 목회 계승에 힘을 쏟았다.
옥한흠의 바램과 달리 사랑의교회에 남은 이들은 점차 줄었고 새로운 교인으로 채워갔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수평 이동한 교인 수(104-105)는 증명이 필요하지만 무시할 만하지 않다.
지난 해 9월, ‘기독교 이후의 신학(Post-Christian Theology)’ 강연에서 종교적 기독교를 지적한 신학자 테드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는 바울을 통해 로마 국교화 이전 기독교를 언급했다. 칭의에 매몰된 개신교가 정의를 ‘자기용서’로 잘못 해석하며 나치의 부도덕함을 방기한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법적인 방법은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조그마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환대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삶이 무법적 정의라고 주장했다. 교회와 복음이란 틀을 만들고 틀 안에서 반동성애, 정치적 보수화를 고수한 한국교회 제도화를 향한 비판이 저자의 문제의식과 맞닿는 지점이다.
복음서 예수는 현대 교회처럼 틀 안의 복음을 만든 적이 없다. 화려한 예배당을 건축하지도, 제자 훈련을 위시한 교조화를, 반동성애와 정치적 보수화를 통한 이데올로기 운동도 하지 않았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보이는 자리에서 기도하지 말라던 말씀을 자주 잊는 것 같다는 제닝스의 지적이 사랑의교회, 더 나아가 한국교회에 예수 정신이 남았는지 묻는 ‘근본적 물음’이다.
◇편목입학과 참나리길로 문제된 사랑의교회
지난 12월, 오정현 목사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 동서울노회를 상대로 위임결의 무효 확인 등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측이 승소했다(2018. 12. 5). 재판부가 오 씨를 목사 후보생 자격으로 신대원에 일반편입한 것으로 보아 교단 헌법이 정한 목사 요건을 갖추지 못해 교단 목사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즉각 반발했다. “교회법상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미국 장로교단(PCA)에서 목사 안수 받은 경력이 기재돼 있지 않은 점과 오 목사 스스로 일반 편입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인정한 점을 들어 편목편입이 아닌 일반편입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공간의 협소함이 만들어낸 서초구 사랑의교회 지하 참나라길을 원상복귀 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서울고등법원이 도로점용을 취소한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도로점용 위법을 판결했기 때문이다(2017. 1. 13). 교회 측은 ‘사랑의교회 참나리길 지하사용에 관한 진실’이란 동영상으로 ▲지역주민 위한 어린이집 기부채납 ▲점유한 지하 부분은 서초구청에 사용료 납부 ▲교회 앞 반포대로변 1개 차로 무상 제공 ▲주변 도로 상당 부분도 보행자 통로로 단장해 기부 ▲예배당을 주변 초·중·고교 발표회와 졸업식 ▲지역 주민에게 행사 장소로 개방한 점을 들어 도로점용 취소 판결에 “아쉽다”는 입장을 밝혔다.
◇옷을 갈아입는다에서 그 옷은 무엇일까
‘글로벌 플랫폼’을 앞세워 ‘SaRang On’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세속법보다 ‘영적 제사법’이 우선이라며 속과 성을 구분하는 게 큰 문제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오정현 목사와 식사를 나누며 목사에게 가진 환상이 깨졌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속이라 부르는 사회가 요구한다. 예수의 정신은 무엇이냐고. ‘글로벌 플랫폼’을 중심으로 ‘신앙자본’을 나누기 위해 ‘영적 공공재’인 사랑의교회에서 ‘글로벌화 된 제자 훈련’을 하며 ‘영적 제곱근의 법칙’을 논한다 한들, 초대형교회가 된 사랑의교회가 세상 법정에서 자본과 교회법을 위시해 문제를 덮으려 하니 누가 사랑의교회를 신앙 공동체로 평가하겠는가. 오 목사 입에서 나온 “(복음 전파에 있어)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던 그 옷이 무엇인지를 묻는 사회의 물음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오정현을 선택한 아버지 옥한흠을 돌아보며 내린 판단은 덤덤했다. 플랫폼이 된 사랑의교회 앞에, 아버지를 되돌아본 아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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