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 02. 05 | 지면 : 2018. 12. 18 | B4-5
[Cover story] 그 시절 옥희가 아로새긴 선물
시간이 소비된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선 94, 95년생 특징이라며 20년 전 학용품, 군것질 과자들이 나열 된다. 드라마에선 20년, 30년 전 과거 향수를 자극한다.
때론 과거가 추억으로 남아 웃음 짓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회한. 후회라고 했던가, ‘돌아갈 수만 있다면’하는 소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좌절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살이에 지쳐 타임슬립(time slip)은 드라마 요소로 남아버렸다.
모두가 지쳐있다. ‘하얗게 불 태워 버렸어’란 말이 유행한다. 소진증후군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누구보다 효율적이어야 했기에 ‘지금 여기’를 망각한다. 이미 노동은 휴식을 위한 고통스러운 작업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생각할 겨를도 없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팬(pan)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밤새도록 돌아가는 팬이 자유에 의해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만다. 순간이라도 멈추면, 무위(無爲)가 되어 버리면 곤란하다. 한병철 교수는 저서 ‘피로사회’에서 성과의 극대화를 이루는 성과사회를 두고 “강제하는 자유, 자유로운 강제”로 표현했다.
그래선지 더욱 옛날과 과거를 그리워하는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땐 이렇게 숨이 턱 막힐 만큼 바쁘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돌아갈 수도, 이미 지나와버린 현재란 시간 속에 과거는 그저 옛날 얘기에 불과한 걸까.
여기,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작품이 있다. 주크박스 뮤지컬, ‘서른즈음에’. 선곡 한 음악에다 내러티브(narrative)를 입힌 뮤지컬이다. 故 김광석의 ‘서른즈음에’가 떠오르지 않는가. 점점 멀어져가는 나의 꿈, 나의 사랑. ‘서른즈음에’가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만년 차장 마흔아홉 이현식이 20년 전으로 돌아가, 선택하고 싶었던 진짜 인생을 살아내는데. 만일 우리 앞에 주어진 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무엇을 잡으시겠는가.
이제 매듭지을 수 있다면, 마냥 콘트라스트에 머물러 멈춰버린 시간을 배회하는 나 자신을 멈추고 싶다면. 뮤지컬, ‘서른즈음에’를 통해 달달했던 대학 청춘. 그리고 뮤지컬이 말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화해, 과거 아픔을 재해석해 선물하고자 한다.
후회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속상했다. 인지부조화일까.
광화문 광장에 섰다. 서글프게 세워진 세월호 천막 앞에서 회한을 날려버렸다. 2016년 10월 22일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또 다시 광화문 광장에 서, 날려버린 그 간의 회한을 떠올리며 자유를 느꼈다. 손가락에 스친 옷매무새를 <서른즈음에>로 마무리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에 등장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종식하지 못한 채 시류에 굴복한 자신을 추스르기 바빴으니까. 그래선지 휴식한단 마음으로 방문한 이화여자대학교 삼성홀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기억 여행의 종착지인 ‘서른즈음에’가 던진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이 여행의 큰 그림을 옥희가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지도.
이현식의 삶에 이현식이 없는 역설
셀 수 없이 달리는 자동차. 동에서 서로. 바쁘게 움직이는 평범한 마흔아홉, 이현식 차장이 운전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산다는 건 그저 살아남은 하나의 목숨 부지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일하는 걸까. 상무에게 아부를 떨며 오로지 상무만을 위해 일해왔다고 자부하지만 현식에게 돌아온 건 화장실 앞 자신의 책상이었다. 화장실 입구가 걸리적거리니 문 옆으로 책상을 순수 옮겨주는 상무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한탄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해가 떨어지고 한강을 거닐며, 푸념을 늘여놓았다. 전화가 왔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 현식은 아버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아내에게마저 이혼하잔 얘길 들으며 고요한 한강이 적막해져갔다. 유일한 친구는 소주. 누가 봐도 한강 다리 아래에 숨어있는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자 밝아오는 자동차 랜턴에 눈을 감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다.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여긴 어딜까, 생각하기도 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선인 ‘디지털 월드’가 시끄러웠다. 이현식 씨를 데리고 왔다며 좋아하는 저승사자에게 “내가 죽었단 말입니까?” 따져보지만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못했다. 삶과 죽음, 정해진 운명에서 현식은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고 침소봉대하던 저승사자가 이현석을 데려와야 할 걸, 이현식을 모셔왔다며 부활시켜주겠다는 약속. 이름하야, 타임슬립(time slip).
저승사자와 함께 본 현식의 삶은 누가 봐도 고단했다. 상무에게 아부를 떨던 기억, 이제 막 태어난 아들을 안으며 오줌을 맞은 기억, 돌이켜 본 태블릿 속 기억엔 역설적이게도 이현식이 등장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현식으로. 주연이어야 할 존재가, 조연으로 등장하면서 우리 사회는 가장 진지하면서도 근원적 질문인 “너 왜 사냐”를 농담처럼 건네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인간은 소외되었다.
그러나 현식이 “에잇!”하며 돌려 본 1997년에서 이현식을 발견했다. 기타를 치며 낭만을 노래한 유일한 시절, 스물아홉 대학 청춘이었다. 아름다웠던 과거를 바라보며 결정한다. 낭만적인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갈 것을.
잿더미와 함께 죽음을 택한 현식
‘우동사’. ‘우리동네사람’ 동아리 메인보컬인 청년 이현식이 저승사자의 도움으로 과거로 돌아왔다. 지저귀는 새, 따사로운 햇살. 대학 내 벤치에서 잠자던 스물아홉 현식의 복부를 가격한 건 옥희였다. “옥희? 오~키!”하며 다음 수업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돌아왔구나, 낭만적인 청춘으로. 그래, 이번엔 다르게 살아보자.
그 동안 차장 이현식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 쳐 왔던 삶과 정반대로 살아보려 애를 쓴다. 사랑과 음악,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전과 다른 경험을 통해 행복을 느꼈다. 일은 술술 풀려갔다. 동아리 활동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혜원에게 고백도 하고, 어머니의 만류에도 진로를 음악으로 정했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 어머니처럼 모든 길이 현식에게 열린 순간이었다.
뜻밖이었다. ‘과연 그랬더라면’이 후회와 회한으로만 남듯, 새로운 현실과 마주쳐야 했다. 어느새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꿈이 되어버린 음악이 혜원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건넨 이별 통보. 설상가상, 어머니가 꾸린 반찬가게에 화재가 발생했다. 잿더미와 함께 모든 걸 잃었다. 현식뿐만이 아니었다. IMF가 터지면서 30년을 일한 선배의 아버지 역시 실직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머리에 띠를 둘렀다. 시위를 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실패했다. 좌절했다.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할까, 어째서 사랑하는 여인이 떠난 걸까. 다시 차장 이현식으로 돌아가기 싫은데. 살기 위해 포기해야 했다. 음악을, 사랑을. 지켜주지 못한 꿈에 대고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미안해”라고.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 “서른즈음에”, 4집 일어나, 1994.06.28
자신의 정체성인 음악과 사랑을 등진 채, 살기 위해 죽어야 했던 20년 전의 선택을 또 다시 택했다. 현식이란 이름으로. 마흔아홉, 현식에겐 지금까지 회한으로 남아 그 때의 선택이 흑백, 고요함으로 존재하는 순간이다.
옥희, 여전히 그 자리에
달라진 건 없었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좀 더 행복한 인생, “잘 살았구나” 한 마디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지만 정신없이 오늘이 지나갔다. 지루하고도 반복되는 현대 사회를 두고 누군가는 성과사회로 표현했다. 닥쳐온 현실을 위해 꿈과 사랑을 포기한 채 고민하던 순간, 눈앞에 서 있던 건 옥희였다.
갈 길을 잃고 말았다.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면 공강 시간, 벤치에 누워있을 때. 작사 작곡 중에, 전소 된 가게에서, 휴학 결정을 내린 술자리에 앉아 있는 옥희였다. 바빴던 걸까, 진부해진 여사친 옥희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옥희는 현식을 피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혜원에게 고백한 때부터였을 거다.
처음 나의 손끝이 당신을 느꼈을 때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하여
오고 가는 세상 속의 모든 일들 사랑 하나로 멈추었고
처음 당신의 눈물이 내 옷깃을 적셨을 때
나는 당신의 눈물에 젖어서
내가 알지 못하였던 내 모습들 당신과 함께 알게 됐죠
때론 모를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 나를 가두었고
밤과 낮에 다른 내 모습과 생각들 속에서 나는 노래하고
때론 모를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 나를 가두었고
밤과 낮에 다른 내 모습과 생각들 속에서 나는 노래하고
처음 나의 손끝이 당신을 느꼈을 때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하여
오고 가는 세상 속의 모든 일들 사랑 하나로 멈추었죠
사랑 하나로 멈추었죠
성시경, “처음”, 7집 처음, 2011.09.15.
현식을 사랑하면서부터 시간이 멈추어버린 옥희에게 현실이란 눈을 뜨게 한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한 휴학(休學). 마지막으로 함께한 술집에서 우동사 멤버들에게 현식이를 부탁했다. 그 순간까지도 마음을 몰라주던 현식을 보고 멤버들이 멱살을 잡았다. 윽박질렀다. 옥희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주느냐고. 그가 남긴 선물꾸러미를 열었다. 편지를 보자 마음을 읽었다.
궁금했다. 옥희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작가는 옥희를 통해 무얼 건네고 싶었던 걸까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여준 옥희를 통해 마침내 답을 찾았다. 가슴 아려올 때, 한 줄기의 소망을 찾았던 것처럼, 옥희의 역할을 찾아내자 알 수 없는 빛에 매료 되었다. 그 빛은 ‘일상’이다.
숨어버린 일상, 용기 내어 고백하다
어느덧 옥희는 현식의 뒤로 도망가 버렸다. 혜원에게 고백하는 순간, 현식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현식에게 옥희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을 회피하고 과거에 애착하는 건 어쩌면 일상이 진부하거나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않을까.
옥희는 일상이라는 이미지로 현식과 함께 했다. 그리고 현식을 사랑했다. 현식은 일상을 잊어버렸다. 옥희를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다. 피안의 세계, 혹은 이상을 꿈꾸며 그 이상을 향해 달려갔다. 그래서 현식에게 옥희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계처럼 순응하고, 반복적 노동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음악과 혜원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머물며 외롭고 고단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믿었던 세계가 하염없이 무너져버렸다. 예상했던 바다.
옥희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을 감추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듯 행동했다. 현식의 어머니 병문안에도 몰래 찾아갔고, 잿더미가 된 반찬가게를 혼자서 정리했다. 주인공 모르게 친구들을 통해 현식을 챙겨주었고, 마지막 만남에서 역시 그에게 선물을 건넸다. 친구를 통하여, 그 자신에게 사랑을 건넨 일상을 인식하지 못했다. ‘옥희’이라는 일상, 그리고 ‘현실’이라는 언어를 생각하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 날도 여전히 옥희는 어머니의 병실을 찾았다. “아니, 네가 왜 여기에?” 옥희가 뜸들이며 물었다. “혹시, 나한테 할 말 있니?” “아니” 또 머뭇거렸다. 20년 전, 혜원에게 머뭇거렸던 것처럼 바보같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차장 이현식으로 사는 걸까. 후회하지 않을 인생,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했는데!
모두가 숨죽이는 순간, 후회하지 않을 마지막 용기를 내었다.
“옥희야, 너……. 휴학…. 안했으면 좋겠어.”
“그걸……. 왜 이제 말해!”
드디어 일상을 알아차렸다. 현식의 가슴팍을 내리치는 옥희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현재가 과거의 일상과 화해하는 순간. 옥희라는 일상이 왜 자신을 알아주지 못했느냐고, 현재의 내게 소리쳤다. 그렇게 일상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드디어 깨달았다. 달라진 것 없고 바뀐 게 없지만. 그럼에도 일상은 현식에게 행복을 주고 있었다는 걸. 그 일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 현식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화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일상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군가에겐 그 자체로 아픔일 수 있고, 행복이자 무덤덤한 무언가 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것이다. 이는 일상이 중립적 개념임을 말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일상, 있는 그대로의 김지연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누군가에겐 러블리즈 케이이지만 동시에 옥희이기도 한 김지연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존재하는 김지연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가 동일하다는 명제가 지시하는 건, ‘사랑이 영원히 남아 있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20년 전, 현식을 향한 옥희의 사랑─20년 후 현재, 옥희의 사랑.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일상’이자 ‘사랑하는 존재’인 옥희가 여전히 남아 있다. 사건과 시간, 배경은 다르지만 현존하고 있는 김지연이 여기 남아 있다.
시작도 끝도 모를 공간과 시간
그 교차로 위에 우리가 있다 기적이다
너를 부른다 사랑한다
오늘이 가도 사랑은 여기 남아있다
꽃비 내린 그 때 그 봄날 늦여름 불어온 시원한 바람
지루했던 기다림 어쩔 수 없던 슬픔과 이별들
온천지 하얗게 덮인 눈 찬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수많았던 좌절과 간절했을 희망이 덮여간다
뜨고 진다 해와 달과 별들은 어제와 오늘 조금씩 다르다
멀리 개짖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 사람들
하늘에선 빛이 쏟아진다 서 있기 힘들게 바람이 분다
아득해진 사랑과 떠나보낸 날들이 다가온다
풀리지 않는 어제의 질문과
아직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내일
그래도 지금 우리 여기에 서 있다
믿는다 사랑 사랑사랑사랑
믿는다 사랑 사랑사랑사랑
강승원, “어쩌면 기적”, 뮤지컬: 서른즈음에(미발표곡), 2017.
그러니 오늘 걱정은 오늘로 충분하다. 내일이 알아서 걱정해 줄 거다. 현식처럼 다가온 일상에 용기 있게 말했듯 ‘지금, 여기’를 인식하며 행복을 만끽해도 충분하다. 고대 그리스어에 시간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있다. 일반적 시간으로 불러야 할까,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인 크로노스(Κρόνος). ‘특별한 시간’이자 ‘기회’를 뜻하는 카이로스(καιρός)가 있다. 누군가는 순간과 순간이 엮이는 순간을 ‘복합순간(momentum adiunctum)’이라 했던가. 우연한 옥희와의 첫 만남, 동아리 ‘우동사’에서 호흡한 멜로디, 잿더미가 된 반찬가게와 병문안, 짹짹 울리는 벤치에서의 만남. 단순순간이 한데 어울러 옥희의 사랑으로 재해석 되었다.
일상을. 옥희를, 사랑이란 카이로스로 재해석하며 비참하지 않은 과거와 조우했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였다. 중년의 현식이 청년 현식에게 손을 내밀어 현재를 노래하는 장면에서 소망을 잃지 않았다. 화해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으니까.
돌아가겠단다. 현재로. 여전한 일상, 병실에서 옥희가 복부를 가격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며 깨어난 현식이 말한다. “옥희야, 사랑해”라고. 옥희가 말했다. “나도, 현식 선배.”
그리고, 우리 앞에 아로새겨진 옥희가 서 있다. 지금 여기에(hic et nu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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